251화
“준비는 잘되어 가는 것 같더군요.”
멤버들이 모두 분주한 어느 날이었다. 각자의 스케줄에 맞춰 흩어진 틈을 타 서도경과 면담 자리를 가졌다.
들이치는 햇살을 블라인드로 가린 서도경의 질문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반응했다.
“네, 뭐 아시다시피 그렇습니다.”
전부 알고 있으면서, 괜히 한번 떠보는 것이 얄밉게 느껴졌다.
저번 미팅에서 윤재희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은 이후로 멤버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회사에 불려 다녀야 했다. 특히 작곡 팀 쪽으로부터 섭외가 온 이정원은 밤낮이랄 게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얘한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긴, 예전에 유어돌 무대를 준비하다가 편곡 아이디어를 내는 부문에 있어서 두각을 드러냈던 일이 존재했었다.
그때도 음악적인 견해가 뛰어난 놈이라고는 생각했었는데 보컬 스탯과 시너지가 겹치며 이쪽으로 재능이 개화했나 보다.
이런 성장은 팀에게도 본인에게도 좋은 편이었다. 지금쯤 윤재희와 프로듀싱 진영에 끼어서 일하고 있을 녀석이 떠올랐다.
굳이 걔가 아니더라도 전 멤버가 작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생각해 둔 컨셉에 맞춰 가사와 무대를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거기에는 거기가 할 일을 맡기고, 우린 우리가 할 일을 하죠.”
“네?”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다가 정신이 확 차려졌다. 그래, 이 사람은 이런 시답잖은 일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할 인물이 아니었다.
멤버들 몰래 호출한 걸 보면 또 뭔가를 꾸미거나 이상한 쪽에서 촉이 발동한 것 같았다.
나도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 맞는 것보단 나으니 서도경과의 면담은 쉽게 빼지 않으려고 했었다.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로 사람을 놀라게 만들려나. 긴장되는 마음 반, 걱정스러운 마음 반으로 태연하게 커피를 마시는 대표를 봤다.
“익숙하시잖아요, 저랑 이런 자리 갖는 건.”
이제 아예 이런 포지션이 잡혀 버린 모양인데. 뒤가 구린 이야기들이 오가는 자리에 있어서 불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스스로가 불쌍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뭐가 됐든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는 게 정답이었다.
일단 본론부터 말하란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암투라면 지겹도록 해서 무섭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담담해서 좋네요. 빨리 듣고 싶어 하시는 것 같으니까,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거든요. 조진만을 잡을 방법이 생겼습니다.”
“…네?”
이게 무슨 소리지? 서도경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꽉 다물고 있던 입이 벌어졌다. 조진만? 지금 조진만이라고 한 건가?
그 사람은 우리가 나름 자리를 잡은 이후부터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일을 난처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매번 거치적거리는데 치울 명분은 없어서 사내에서도 몰래 만나거나 비밀 회동을 하는 등, 자주 일을 꼬곤 하는 인간 중 하나였다.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서도경을 견제하는 엔필름을 등에 업고 등장한 세력이었다. 그래서 함부로 치우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도경이 이번 기회에 그 사람을 치울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것도 표정을 보아 우리 손은 그닥 더럽히지 않는 방법인 듯했다.
“…어떻게요? 아니, 그보다 엔필름은 어쩌시려고요?”
당장의 나로서는 묘한 걱정이 앞섰다. 조진만이 능력이 좋든 나쁘든 그 인간을 들이밀은 존재가 엔필름, 즉 본사였기 때문이었다.
서도경의 능력이 출중하여 사내에서 견제용으로 보낸 인물답게 뒤를 받쳐 주고 있던 것은 기업이었다. 잘못하면 그들을 배척하게 되는 게 아닌 거냐는 뜻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서도경은 다 생각이 있었나 보다. 내 염려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코웃음 쳤다. 아, 저 얼굴은……. 갑자기 안도가 됐다.
웃고 있는데도 별로 웃는 것 같지 않은 구린 미소. 해결법이 생겼을 때 짓곤 하던 대표의 표정이었다.
“다 신해신 씨 덕분이었죠. 크라운 게임 2차 경연에서 유출된 곡 사건, 기억하시죠?”
“네, 그런데 그게 이번 일과 무슨 관련이 있… 혹시…….”
“김현석 씨가 전부 불었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조진만의 지시하에 실행했던 일이라고요. 뒷일이 무서워서 오랫동안 다물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덕분에 회유하느라 힘 좀 썼죠.”
저건 크라운 게임 2차 경연에서 블릭투 진영으로 우리 무대에 대한 정보를 유출했던 사건이었다.
그걸 실행한 범인은 조진만 아래에서 새로 들어온 인물로, 조진만과의 연관성을 찾기 힘들어 금품을 대가로 받고 실행한 개인적인 일이라고 보고 있었다.
근데 알고 보니 그 일은 김현석의 단독 범행이 아닌 조진만과 연루된 일이었나 보다.
법적 처벌은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대신에 은근슬쩍 끄나풀처럼 부려 먹는 것 같긴 했지만. 그 인간을 아직도 이렇게 잘 써먹고 있는 줄은 몰랐다.
“알고 보니 김현석 씨, 하청의 하청을 맡고 있더군요. 1차 거래는 조진만과 블릭투의 회사 온다였습니다. 아, 온다 뒤의 본체는 MXP라는 것, 이미 알고 있으시죠? 한 실장님께서 조사해 본바, 조진만은 원래 엔필름 내에서도 그렇게 힘이 있거나 입지가 센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뭐, 여태까지 했던 실적만 봐도 업계에선 밀리다 못해 구석으로 처박힌 상태인 걸 알 수 있죠. 엔필름 내에선 엔터 쪽으론 도무지 쓸 수 없는데, 다른 곳으로 보내기도 애매해서 골칫덩이처럼 취급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워낙 오래된 인물이고 사측의 기업적인 비밀을 많이 알고 있기에 함부로 커트 칠 수 없어서 방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이 사측의 비밀이지, 뭐 뻔하지 않습니까? …세간에 알려지면 기사 1면을 장식할 법한 이야기들? 그러던 찰나, 엔필름에서 조진만을 써먹을 기회가 만들어진 것 같더군요.”
“대표님 견제요?”
“이런, 역시 전부 알고 계시네요. 네, 맞습니다. 엔필름에서는 메이터스를 통해 저의 힘이 강해지는 게 싫었던 모양입니다. 견제용으로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인물을 하나 심고 싶었나 본데, 그게 조진만이 되어 버린 거죠. 그런데 웃기게도 조진만 그 사람, 다른 쪽으론 눈치가 없어도 이쪽으론 본인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잘려 나간 이후이든, 아니면 스스로가 져서 밀리든, 본인의 최후가 좋지 못하다는 건 깨닫고 있던데요? 그래서 미리 새로운 줄을 찾아보고 있던 거고요.”
“그게 바로 온다… 아니, MXP란 소리죠?”
“바로 나오네요. MXP는 원래도 경쟁업체 죽이기를 즐겨 하던 회사였고, 또 비슷한 시기에 나온 스턴즈를 눌러 버린 하이사인과 우리 메이터스를 경계하고 있었으니까요. 거기다가 김환준 씨, 그러니까 디레스트를 통으로 빼 온 것에 대한 원망도 상당한 상태였죠. 하지만 사내 분위기까진 알지 못해서 엔필름과 메이터스가 제법 돈독한 상태라고 알던 것 같습니다. 메이터스를 죽이려면 엔필름부터 건드려야 할 줄 알고 조진만과 접촉을 시도한 모양입니다. 그 인간, 내부에선 문제아지만 외부에서는 엔필름과 메이터스 양측에 모두 발을 담근 인물처럼 보이니까요. 살살 꼬드겨서 제 쪽으로 돌리면 쌀이라도 나올 줄 알았던 것 같은데. 아시잖아요……?”
MXP, 사람을 제대로 잘못 골랐다. 엔필름과 메이터스는 사이도 좋지 못한 편이었고, 조진만도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조진만은 MXP의 제안에서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았다. MXP가 현재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조진만을 기용하고 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게 꼬이고 꼬여서 블릭투와 온다를 괴멸할 기회를 만들어 준 거였군.
조심스럽게 정보를 빼 오라고 지시한 걸 바보같이 아랫사람을 시켰다. 그 사람도 제 상사만큼 똑똑하진 못해서 서도경을 비롯하여 사내에 발각이 된 거다.
“김현석 씨는 아직 조진만에게 이런 사실들을 전부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 알렸겠죠. 법적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저희 밑에서 일해 주셔야 하니까요.”
“그럼 사외 이사 그 사람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겁니까?”
“네, 저희 측에서 증거를 잡은 건 꿈에도 모르고 있죠.”
곧 끝나겠군. 서도경의 호쾌한 미소를 보니 절로 소름이 돋았다. 서도경은 김현석을 버리지 않고 패로서 계속 가지고 있었다.
MXP가 박아 넣은 스파이의 스파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정보를 빼 오고 있던 것이었다.
그 상태에서 이번 사태의 모든 시작을 알게 되고, 파이널에서 블릭투와 온다를 치는 겸 조진만을 처단할 각오를 했던 듯하다.
원래도 능력은 없었는데, 서도경의 견제용으로 심은 것치곤 그쪽 일도 시원찮게 했던 인물이다.
게다가 엔필름을 배신할 목적으로 MXP와 직접 손까지 잡았으니, 이 사실을 엔필름 측에서도 알게 되면 조진만은 메이터스, 아니 엔필름 관련 기업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인간이 사라지면 자동으로 조진만이 데리고 온 기타 끄나풀들까지 전부 정리될 일이었다. 한마디로 파이널 한 번에 걸리적거리던 적들을 전부 소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MXP는요? 혹시라도 거기가…….”
조진만은 데리고 간다고 하면? 그런데 그건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보다. 서도경이 길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신해신 씨, 잔걱정 많은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MXP에선 사태 파악이 완료된 것 같으니까요.”
지이잉- 서도경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타이밍이 좋네요. 자, 한번 봐 보시죠.”
핸드폰을 확인한 서도경은 그대로 내게 액정을 들이밀었다. 그리 크지 않은 화면 위에 서도경의 것으로 보이는 메일함이 나타났다.
제목: 사내 유출 견본 및 습득 증거물 전달드립니다.
보낸 이: 한 지헌 [○○○○@○○○○.com]
보낸 이에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지헌? 한 실장님? 근래 잘 안 보인다 싶었더니 서도경의 지시로 파이널에 보일 증거들을 수집하고 다녔었나 보다.
아래로 보이는 첨부 파일에는 그만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첨부 파일:
<온다 레이블 + 한동준 PD 비밀 미팅 관련 추적 자료.PDF>
<온다 레이블 + 조진만 연락망 관련 추적 자료.PDF>
<조진만 이 外 사내 컴퓨터 메일링 추적 자료.PDF>
<한동준 PD 비리 관련 추적 자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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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이 많은 것을 다…….”
“시작은 1차 경연도 전이었습니다만, 크고 굵직한 것들은 전부 신해신 씨가 물어본 정보들 덕분이었죠. 그걸 기반으로 하나씩 연결 고리를 찾아 올라갔습니다. 한 PD와 온다 그리고 MXP의 담당자가 대화를 나누는 녹음본은 정말 기가 막혔거든요.”
아무래도 서도경은 우리만큼 파이널에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MXP는 먼저 발을 뺀 것 같아서 조금 안타깝긴 한데. 어차피 거긴 아직 무너트릴 수 있을 만한 타격이 없으니까요. 다음 기회를 같이 노려 보죠.”
놀라서 정신이 없는 나를 두고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얼굴보다 가장 두려운 상황이었다.
나, 이 사람과 계속 팀 먹어도 괜찮은 거겠지? 갑자기 미래가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 그것도 결국 해내야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