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세 번째 순서이던 블릭투까지 경연이 종료된 무렵이었다. 역시 말아먹었군. 최한성의 부재와 뒤늦게 터진 악재로 나머지 멤버들까지 크게 흔들렸던 모양이다.
라이브 AR을 깔아서 듣기로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퍼포먼스라든지 정해진 무빙 방면에서 자잘한 실수를 많이 발견했다.
특히 저놈, 블릭투의 막내로 보이는 멤버가 동선을 놓친 게 눈에 띄었다. 원테이크로 방영 중인 상태이기에 시청자들에겐 걸렸을 게 분명해 보였다.
하필이면 단체 군무에서 위치를 놓치냐……. 아까의 아찔한 사고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파트를 부르고 합류해야 할 타이밍에 다른 곳에 가 있었던 장면이었다.
안 그래도 4인으로 꾸려진 소수 인원의 무대였는데. 거기서 1명이 빠져 버리니까 댄서들로도 쉽게 가려지지 않는 듯하다.
일단 헉헉거리며 무대를 떠나는 놈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카메라는 다시 안지하를 잡고 있었다.
이젠 우리 차례겠군. 안지하가 큐 카드를 읽으며 시간을 끄는 사이 스태프들로부터 스탠바이 명령이 떨어졌다.
블릭투의 무대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반대편 스테이지 커튼 너머로 이동해 있던 참이었다.
“하이사인, 스탠바이 하시겠습니다!”
“네!”
모니터를 보던 눈길을 거두고 분주하게 몸을 푸는 멤버들을 훑어봤다.
가장 근처에 있었던 이정원부터 제법 떨어져 있던 거리의 윤명과 권혜성까지 차례대로 어깨를 한 번씩 툭, 툭 쳐 줬다.
“뭐야?”
“기합.”
“저 형도 좀 뜬끔없는 구석이 있어.”
“이유준, 너만 하겠냐.”
왁자지껄하게 이어지는 수다들을 보아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시스템 창 위에 적혀 있는 문구를 재차 점검했다.
[해프닝 실드 - 영구 아이템] → 장착 중
[‘(프리미엄)럭키 챌린저’ - 일회성 아이템] → 장착 중
혹시 모를 사건 사고에 대비해 준비해 놓은 마지막 보루였다. 그 아래로 적힌 멤버들과 내 이름을 살피고 녀석들을 불러 모았다.
맹하게 서 있던 윤명이 문채민에게 이끌려 오고 나서야 7명이 둥글게 서 있을 수 있었다.
“크라운 게임에선 이런 거 처음 해 보는 것 같은데. 해신이 형, 설마 떨려?”
“그럼 안 떨리겠냐. 혜성이, 네가 이상한 거야.”
“헤~ 윤명, 너도 그래?”
“…아니. 전혀.”
그래, 내가 여기서 무슨 얘기를 더 하겠냐. 그냥 원래 하려던 거나 얼른 해야겠다.
“얘들아, 생방송이다. 정신 단단히 차리고. 실수 나오면 바로 백업 들어가면 되니까, 절대 멈춰서는 안 돼. 알았지?”
“형, 그건 너무 기우 아니야? 괜히 더 불안해지잖아.”
“아니, 나도 해신이 형 말에는 동감. 서로 믿어 보자고.”
강태오 저놈만 나랑 비슷한 상태였었나 보다. 무던하게 대답하는 문채민의 뒤로 낮은 목소리의 강태오가 끼어들었다.
사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이런 말을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블릭투 쟤네가 가라앉는 배이든 뭐든 간에, 지금까지 제법 얌전하던 한동준이 신경 쓰였다. 녹화 전 등장하기까지의 길었던 여백도 영 거슬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으로 옆에 있던 이정원과 이유준의 등에 손을 올렸다.
나도 낯간지러워서 이런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냥 가면 나중에 후회가 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고생했다. 재밌게 놀다 오자는 뜻으로 구호 한 번 하고 들어가자.”
“어우, 신해신. 오늘 좀 이상해. 그래도 뭐, 나쁘진 않으니까.”
“롸져!”
“그럼 외친다? Star sign on stage!”
“하이사인!”
서로의 어깨에 포개진 팔을 강하게 한 번 내리눌렀다.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떠오른 몸에 맞춰 모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스스하게 흩어지는 권혜성의 머리칼을 보며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무대로 이동했다.
자, 시작해 보자. 드디어 잔당들을 처리할 싸움의 막이 열렸다.
* * *
길게 갈라진 스테이지 양측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경쟁 그룹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크라운 게임 파이널의 주제로 우리가 준비한 노래는 아날로그 신스 베이스에 트랩과 붐뱁이 섞인 ‘야간비행’이었다.
데뷔곡이자 세계관이 되었던 밤하늘에서 모티브를 착안해 왔다. 기존에 내세웠던 타이틀들의 특색을 가져와 만든 팬 송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다소 익숙한 듯 처음 듣는 인트로가 흘러나왔다. 높은 소리의 건반 소리가 신비롭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스크린 너머로는 문이 활짝 열린 경비행장의 광경이 송출되고.
그 아래에 흰 셔츠와 멜빵을 입은 채 한쪽 어깨에 배낭을 짊어진 윤명이 등장했다.
까맣게 가라앉은 무대 위에서 핀 조명을 받은 녀석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드드득 윤명 옆에 있던 비행장의 문을 나타내는 소품이 효과음에 맞춰 좌우로 밀려 이동했다.
- 까맣게 물든 그 밤 빛나는 단 하나의 별
그게 너무도 반짝여 보여 오랜 시간 동경했어
가벽이 사라지자 그 뒤에선 권혜성이 등장했다.
흰 테이블 위로 어지럽게 널린 지도와 다양한 공구를 만지고 있던 모습이었다. 어? 그런데 이상했다.
원래라면 권혜성의 손에 경비행기 모형이 들려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권혜성은 쓰고 있던 헬멧을 벗어 던지며 다시 받기만을 반복했다.
리허설 때까지만 해도 문제가 없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권혜성의 근처에서 내가 찾던 모형을 발견했다. 아, 이런……. 이유는 모르겠지만 경비행기가 공구에 깔려 부러져 있었다.
권혜성은 그걸 무대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나 보다. 지금은 다른 소품으로 동작을 대체 중이었다.
그걸로 모자라서 공구와 비행기를 들고 고치는 듯한 제스처를 연발했다.
…혹시 이게 시작인가? 거기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한동준이 늦게 온 이유, 그리고 적들의 마지막 발악.
이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무대 장치에 함정이 있다는 뜻이었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상태에서 곁에 있는 이유준과 문채민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른 애들도 눈치챘어야 할 텐데.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권혜성과 윤명은 나름 저들끼리 사인을 주고받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부서진 경비행기와 공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권혜성이 머리를 헤집었다. 부스스하게 흩어진 머리칼이 나풀거림과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 무턱대고 떠나기로 한 여행
두렵지 않다면 그것 거짓이겠지
그런 권혜성의 근처로 배낭을 내려놓은 이가 하나 있었다. 함께 무대에 올라가 있던 윤명이었다. 윤명은 발걸음을 옮겨 공구가 올라간 테이블 뒤의 단상을 밟았다.
그리곤 권혜성이 힘껏 던져 준 헬멧을 받아 제 머리에 올려 쓰며 손짓했다.
원래라면 윤명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건 저기 있는 저 경비행기 모형이었다. 그러나 그게 망가져서 권혜성이 급히 소품을 재선정한 것 같았다.
나름 자연스러운데? 거기서 씨익 미소가 터져 나왔다. 럭키 챌린저. 아무래도 이걸 구매한 건 아주 잘한 선택인 듯했다.
앉아 있던 권혜성은 윤명의 바로 아래에 자리하여 같은 안무를 췄다. 힙합 베이스를 살짝 얹은 경쾌한 리듬이 점차 웅장해지는 멜로디와 잘 어울렸다.
고글을 목에 걸고 있는 권혜성과 헬멧을 들었다 내리며 춤을 추는 윤명이 제법 재밌는 그림을 만들어 냈다.
거칠지만 톡톡 튀는 느낌이 강한 권혜성과 중고음에서 안정으론 팀 내 최고이던 윤명의 화음이 무대 위를 가득 메웠다.
- 모자를 눌러쓰고 가방을 움켜쥐어
서툰 계획을 실행해 보기로 해
윤명이 내려놓은 배낭을 짊어진 권혜성이었다. 목에 걸려 있던 고글을 머리끝까지 올려 썼다. 그 상태에서 카메라의 무빙이 돌아 우측을 비췄다.
다른 출연 그룹들이 앉아 있던 계단 좌석 사이로 강한 조명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반짝이는 먼지를 뚫고 나타난 강태오가 입고 있던 항공 점퍼를 털었다.
이번엔 저기군. 강태오에게서도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한 찰나였다.
녀석이 이동해야 할 동선 앞에 제법 많은 세트가 널려 있었던 것이었다.
리허설 때까지만 해도 저 정도로 장애물이 많이 있지는 않았다. 예정보다 3, 4개는 더 깔려 있어서 움직임이 퍽 난처해 보였다.
하지만 강태오도 뒤쪽에서 사태를 파악했는지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한번 웃고는 뒤에서 쏟아져 나오는 댄서들과 함께 빠른 속도로 주변의 지형지물을 통과했다.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나, 그렇게 날아오를게
철제로 이루어진 단상과 공구함을 넘어 화려한 안무들이 이어졌다. 댄서들은 뒤쪽으로 돌아가며 포즈를 취했고, 강태오는 정면 돌파라는 듯이 액션을 섞어 움직였다.
오히려 거기서 더 큰 반응들이 터져 나왔다.
스크린에는 밤하늘 아래 조명이 켜져 밝혀진 활주로가 나타나 있었는데, 투박한 워커가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으니 근사한 그림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저렇게 격한 춤을 추면서도 안무 퀄리티를 챙기는 강태오가 괴물처럼 보였다.
아니, 그전에 다들 위기 대처 능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때 귓가에서 녀석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럭키 챌린저의 시전자에겐 동화한 인물들의 음성이 들리는 모양이었다.
‘뭐야, 저기에 왜 공구함이 놓여 있어.’
‘태오 형, 짱이다. 원래 안무 같네. 분명 저 타이밍에선 스텝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빼고 점프로 변형했어.’
‘권혜성, 하필이면 무겁게 헬멧으로 바꾸냐. 받다가 놓칠 뻔했잖아, 바보. …그래도 나름 괜찮았어. 다행이다, 안 어색해서.’
투덜대는 것치곤 잘들 하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나아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타이밍에 맞춰서 강태오의 허스키한 보컬이 나오고, 그 옆으로 맑은 미성의 목소리가 깔렸다.
- 돌아가는 프로펠러
흔들리는 머리카락
눈앞이 흐린 것 같지만 이 정돈 이겨 낼 수 있어
이번에는 좌측의 계단 좌석의 위쪽이었다. 원더 보이즈 뒤쪽 가장 높은 단상에 서 있던 이정원으로 카메라가 돌아가 있었다.
푸른빛의 백라이트가 주변을 감싸는데 여기도 나름의 문제가 있어 보였다.
원래라면 계단 좌석 측면으로 이정원이 내려올 수 있는 발판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건 또 언제 치운 건지. 이정원의 길목이 막혀 있던 것이었다.
앞쪽으로는 원더 보이즈의 멤버들이 몸을 돌려 이정원을 쳐다보는 상태였다. 이렇게 되면 안전히 나올 길이 막힌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정원아, 어떡할 거냐. 위기 상황임에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머릿속에 들리는 이정원의 거친 말투가 어이없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발판 어디 갔어. 설마, 이 망할 자식들이.’
달달한 목소리와 달리 지나치게 투박한 성격이었다. 원더 보이즈가 눈치를 채고 비켜 줄까 싶던 찰나, 아래쪽에서 흩어지는 스모그 연기를 발견한 이정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와 동시에 자세를 잡아 사람들을 뛰어넘어 무대 위로 훌쩍 넘어갔다. 하여간에.
‘오늘 난 컨디션 좋거든.’
숨 쉴 틈도 없이 뒤에서 쏟아져 나오는 댄서들과 합류해 대형을 갖춘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