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그렇게 마저 이어지는 생방송 경연을 구경했다. 시작을 열었던 얼티밋 나인부터 마지막을 장식한 디레스트까지 좋은 퀄리티의 무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역시 이쯤 되니까 다들 이를 악물고 부딪치는구나. 점수 차가 크지 않았던 상태이기에 오늘 이 한 번으로 모든 게 뒤집힐 수 있었다.
다른 그룹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나 보다. 생방송 경연에서 쏟아부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은 듯했다.
…블릭투, 저기 쟤네들만 빼면 말이야.
“크라운 게임 대망의 마지막, 드디어 파이널의 결과 발표만을 앞두고 있는데요.”
안지하의 진행을 듣고 있는 과정에서도 놈들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자신들이 했던 실수가 두려웠나? 아니, 저건 정해진 대로 가지 못했을 때의 불만스러움이었다.
쟤네, 전부 알고 있었나 보네. 한동준이 우리 무대에 손을 대 놨었다는 것을.
아까부터 여기를 힐끔거리는 눈길이 불안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마치 어떻게 그걸 무사히 넘겼냐고 따지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걸 확인하자 동정심을 가졌던 과거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결국 전부 거기서 거기였어. 쟤네는 최한성을 포함해 그 윗선의 인물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광고 보시고 가겠습니다!”
엔넷 특유의 시간 끌기로 짧게나마 여유를 가지게 된 참이었다. 3분 정도인가. 제작진 측에서 보내는 사인을 추론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측면에서 팔뚝으로 나를 찌르고 있던 인물을 향해서였다.
지원겸, 저기는 계속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훤히 오픈된 장소라 사리고 있는 것 같았으나, 한 번쯤은 아는 척을 해 줘야 할 것 같다.
‘…왜요?’
주변을 의식하여 입 모양으로 뻥긋거리니 고개를 슬쩍 숙인 지원겸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방송 끝나면 너만 잠깐 빠져나와. 해 줄 얘기가 있어서 그래.’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시간 2분 30여 초. 자세를 바로잡고 정면을 바라봤다.
지원겸이 있던 반대쪽에선 멤버들이 우스갯소리로 서로를 다독이고 있었다.
“정말 마지막이네.”
“실감이 안 난다.”
“그래도 재밌었지?”
“…자세한 얘기는 숙소에서 하자.”
다소 의미심장한 내용이 이어졌다. 다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단 말이야. 녀석들의 대화를 듣고 고생했다는 얼굴로 웃어줬다.
그때 나와 같이 정면을 바라본 자세로 있던 이유준과 강태오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거의 복화술에 가까운 속삭임이었다.
“형, 아직일까?”
“슬슬 시작됐을 것 같은데…….”
강태오의 이야기가 끝나자 눈을 돌려 관객석을 바라봤다. 우리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제 시작이었다.
객석 앞쪽에 서 있던 제작진에게서 1분 남았다는 스탠바이 소식이 알려지고, 그와 동시에 뒤쪽에 앉아 있던 일부 관객들이 술렁거렸다.
희게 쏟아지는 빛을 보면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는 거였는데. 하나둘씩 퍼지는 빛이 곧 옆으로 또 옆으로 옮겨 갔다.
아마도 근처에서 하는 소리를 듣고 같이 찾아보게 된 것일 거다.
나는 저게 뭐를 뜻하는 행동인지 잘 알고 있었다.
크라운 게임 파이널의 종지부를 찍어 줄 서도경의 마지막 카운트였다.
[3, 2, 1]
[Live ON]
제작진의 손짓과 함께 번쩍이는 조명이 출연자들의 머리 위로 쏘아졌다. 긴장감을 고조하는 드럼 소리가 둥둥 귓가를 울렸다.
등 뒤에서 스크린이 바뀌는 걸 느끼며 안지하와 객석을 번갈아 쳐다봤다.
실패하면 여기서 바로 아프려나. 6단계면 쓰러지는 거 아니야? 긴장을 풀기 위해 농담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짓는 중이었다.
드디어 굳게 닫혀 있던 안지하의 입이 열렸다.
“생방송 크라운 게임 파이널, 이 기나긴 여정 앞에서 왕관의 주인이 될 최종 우승자는……!”
펑! 앞뒤로 쏟아지는 꽃가루와 폭죽이 귀를 아프게 했다. 다시 한번 스크린이 전환됐는지 뒤에서부터 다른 컬러의 빛이 쏟아져 내렸다.
정신을 차리고 봤을 땐 나를 덮친 멤버들의 포옹에 반쯤 끼어 흔들리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하이사인~!”
아, 해냈구나……. 비명을 지르는 팬들과 축하의 박수를 쳐 주는 다른 출연 그룹을 보며 감사의 의미로 꾸벅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지하에게서 전달되는 꽃다발과 트로피를 받으니 이제야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에 대해 실감이 났다.
…우승할 마음이 만만했으면서. 하이사인으로 활동하며 나름 담대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포부나 거창하지, 내용물은 작은 사람이었나 보다.
“어, 우선, 크라운 게임에 출연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프로그램을 제작해 주신 관계자분들께 감사 인사드리겠습니다.”
양념을 조금 치긴 했지만. 전혀 고맙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나 겉으로는 예의를 차려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그 인간이 더 큰 태풍을 만날 테니까 말이다.
“연습하느라 고생한 우리 멤버들, 부족한 리더 따라 주느라 수고 많았어. 대표님 그리고 저희 스탭진 여러분, 늘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하이눈! 여러분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객석으로부터 터지는 비명에 활짝 웃었다. 유달리 사건 사고가 많았던 그룹이었는데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저 사람들이 힘을 줘서였다.
리더라고 오래 마이크를 쥐고 있을 마음은 없어서 간단하게 해야 할 말만 딱 꺼냈다. 자연스럽게 측면으로 마이크를 넘겨 이정원에게 다음 소감을 맡긴 이후였다.
이정원이 멤버들과 함께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슬며시 뒤쪽 스크린을 확인해 봤다.
아까 제대로 듣지 못한 결과가 궁금했다.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었을지.
우승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입장이었기에 신기한 마음으로 점수판을 확인했다.
[For, 그들을 위하여]
1. 하이사인
2. 디레스트
3. 인클루
4. 얼티밋 나인
5. 원더 보이즈
6. 블릭투
[3차 경연 점수 및 최종 순위]
1. 하이사인 (705)
2. 디레스트 (645)
3. 인클루 (540)
4. 원더보이즈 (480) / 얼티밋 나인 (480)
5. 블릭투 (360)
아슬아슬했군. 2위까지 치고 올라온 디레스트가 무서웠다. 이번 미션에서 1위를 했다면 동일 점수로 공동 우승할 뻔한 상황이었다.
순위로 친 배점에서는 30점 간격이라 벌어진 것 같아 보였는데. 아마 저 순위가 책정됐을 투표로는 미미한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티가 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딘가로부터 질긴 시선이 느껴졌다. 멤버들의 소감 발표가 모두 종료된 이후여서 안지하의 클로징 멘트가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흘낏, 눈동자를 굴려 보니 나를 쳐다보고 있던 당사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다. 이번엔 너냐? 저건 김환준이었다.
우승하지 못해서 아쉬운데 티를 내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저래 먹은 것인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포커페이스로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차피 당장은 할 말이 있더라도 하지 못했다. 스테이지 뒤에서 얘기해 보자며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척 회피했다.
“크라운 게임을 응원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MC 안지하였습니다!”
펑! 화려한 효과 속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다른 출연진 그룹들이 보였다. 지금쯤이면 방송에서도 후원 그룹에 대한 광고와 함께 제작사명을 오픈하고 있을 것 같았다.
이젠 움직여도 되겠군. 카메라의 빨간불이 사라지는 걸 확인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맙다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우승자만 핸드 마이크로 소감을 발표하고, 나머지 출연진은 모두 의상에서 마이크를 빼놓은 상태였다.
한껏 가까워진 거리에 일부 사람들이 다가와 속삭였다. 대게는 그룹의 리더들로 나와 회동을 거쳤던 인물들이었다.
류정과 이민석. 지원겸과는 사전에 대화를 나눴었나 보다. 아까 들은 것과 비슷한 내용의 말들을 전달해 줬다.
“들었지? 저번에 본 거기서 만나자.”
“하~ 마지막까지 쉽지 않네요~ 그래서 뭐 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류정이 어깨를 으쓱인 뒤 팬들을 향해 팬 서비스를 했다. 저걸 보니 우리 역시 스테이지를 벗어나도 될 것 같았다.
“해신아!”
“얘들아, 축하해!”
물론 여기까지 응원해 주러 온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꽃다발을 흔들고 조심히 들어가라는 안부를 전하며 멤버들을 데리고 백스테이지에 들어갔다.
* * *
대기실에 들어가선 정리중인 멤버들을 두고 황급히 복도로 나왔다. 인적이 드문 곳까지 가자 먼저 와 있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지원겸을 필두로 류정과 이민석 그리고 김환준이다.
역시 먼저 얘기를 나눴었구나. 각자 팔짱을 끼거나 벽에 등을 기댄 자세에서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왔냐? 우승자라고 너무 느긋한 거 아니야?”
“축하해요. 해신 씨네 강한 줄은 알았지만, 완전히 당해 버렸네.”
“야, 신해신. 진짜 넌 못 이기겠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유부터 좀 듣고 싶은데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마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리허설은 모두 따로 들어갔으니까, 우리 무대 세트에 대한 문제점은 아직 알 수 없을 텐데.
아까부터 줄곧 느끼고 있던 기시감에 대해 질문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답을 해 준 것은 근처 벤치에 앉아 있던 김환준이었다.
“혹시 해신 씨네도 세트가 리허설이랑 달랐어요?”
어, 설마. 놀란 마음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맞은 편 벽에 기대서 있던 지원겸이 발로 바닥을 밀어냈다.
“망할 자식들이, 마지막까지 장난질이냐!”
“티가 안 나서 몰랐는데. 거기도 그랬구나.”
“…거기도? 설마 선배님들도 전부?”
내 말을 들은 류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 설명해 주는 내용이 제법 가관이었다.
“네, 저희랑 원더 보이즈는 좌석도 백스테이지 자리도 붙어서 중간에 얘기를 나눌 수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모두 세트 장치에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제완이가 열어야 할 소품이 하나 안 열렸대요. 프리로 넘기긴 했는데, 덕분에 백댄서들이랑은 다른 동작으로 하게 된 거 있죠?”
류정의 이야기라면 나도 뭔지 알 것 같았다. 손제완, 얼티밋 나인의 무대 구성 중 로커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춤을 추는 동작이 있었다.
백댄서들과 일렬로 서서 진행하는 연출 같았는데, 중간에 손제완이 홀로 댄스 브레이크에 가깝게 움직였던 기억이 났다.
겉만 봐선 전혀 티가 안 나서 무대 사고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무대 사고였나 보다.
“하긴 댄서 포지션이 아니라 래퍼였죠.”
“네, 거기서 혼자 튀는 안무를 줄 리가 없잖아요?”
류정의 설명에는 긍정하는 바였다. 보아하니 여기 모인 모두가 이런 피해를 공유하고 있었나 보다.
각 팀당 적게는 하나에서 많게는 두 개까지. 리허설과 다른 동선으로 생방송을 진행해야 했다는 아찔한 경험담들이 이어졌다.
“역시 너네도 그랬지? 표정 보니까 익숙하단 느낌인데. 그래서 신해신, 하이사인은 어떤 장치가 애를 먹였냐?”
지원겸의 질문에 곰곰이 고민했다. 김환준도 궁금하다는 듯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기 있는 그 어떤 인간들보다도 우리 무대가 가장 난처한 상황이었단 것이었다.
좀 긴데 다 들을래? 내려놨다는 느낌으로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