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내용은 복잡했으나 이야기 자체는 최대한 간단하게 말하려고 했다. 인트로가 흘러나오고 1절 싸비에 들어가기 전부터 온갖 사건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군무도 아닌 1인 등장 시점에서 소품으로 말썽이 많았는데. 순서대로 하나씩 꼽아 보자 그걸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이동 통로가 아예 막혀서 뛰어내리거나 액션을 섞어 가며 회피한 것만 여러 번이었다. 마지막에 있었던 프로펠러의 고장까지, 정말 방심할 틈이 없던 무대라고 할 수 있었다.
지원겸은 이번 사태로 크라운 게임의 제작진, 정확히는 한동준에게 학을 뗀 모양이었다. 혀를 내두르는 꼴을 보니 자기네는 양반이었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듯했다.
“그 정도면 거의 정해진 대로 한 게 없는 거 아니냐?”
“따지자면 그렇겠죠.”
강태오와 친분이 있었던 이민석도 이런 방향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용케도 잘 마무리 지었다며 고생했다는 뜻을 내비쳤다.
“허, 그렇게 문제가 많았는데 티가 안 난 것도 능력이다. …강태오, 실력이 좋아졌네? 난 원래 짜 놓은 안무인 줄 알았거든. 이번엔 그냥 아크로바틱한 동작을 많이 넣었나 싶었지. 태오 녀석…….”
다른 팀들에 비하면 첫 타자로 시작한 자기네는 큰 방해가 없었던 것 같다는 류정까지.
그 뒤에서 멋쩍게 웃고 있는 김환준이 입을 열었다. 저기는 우리 다음으로 자잘한 방해가 많았던 팀이었으니까. 저 웃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원하는 게 딱 보이네요. 1등을 유지하고 있던 하이사인과 2등이던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
“그렇게만 이야기하기에는 걔네 너무 못하지 않았냐? 솔직히 1, 2등인 너희 제쳐도 우리나 원더 보이즈, 얼티밋나인이 있는데.”
“음…….”
지원겸의 타박을 들은 김환준이 가만히 고민하는 듯한 뉘앙스를 취했다. 속사정이야 훨씬 더 많이 있지. 그걸 지금 오픈하느냐 마느냐로 갈등 중인 것 같았다.
김환준의 침묵이 길어지자 류정과 이민석도 지원겸과 김환준의 대치를 바라봤다.
저 인간,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꺼내서……. 알아서 해결하라며 모르는 척하는데 김환준이 고개를 틀어 내 쪽을 보곤 웃었다.
궁지에 몰렸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잖아. 도와 달라는 듯 가련한 척하는 게 퍽 얄미운 인간이었다.
느물느물 빠져나가려는 속셈이 훤히 보여서라도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곁에 있던 상대가 지원겸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두 손 두 발을 다 든 참이었다.
저기서 안 밝히면 내 멱살을 잡으려고 들겠지. 에휴, 작게 한숨을 내뱉자 김환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 내 행동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부 알아차렸나 보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속사정이고 자시고 편하게 이야기하란 뜻을 밝혔다. 손을 내저으며 됐다는 시늉을 하니 침묵을 깨고 김환준이 말했다.
“허락도 떨어졌겠다, 간단하게 얘기할게요. 이 프로그램, 뒤가 제법 많이 구리거든요. 메인 프로듀서인 한동준 PD가 ‘온다 레이블’과 ‘MXP’와 손을 잡고 있었어요.”
“…온다까지는 이해했는데 여기서 MXP요?”
이민석이 놀랐다는 얼굴로 크게 입을 벌렸다. 자잘한 건 자주 공유했지만, 이 정도로 깊은 부분까진 알려 주지 않은 상태였다.
“정확히는 MXP가 온다의 뒤를 봐주고 있던 거죠. 원한 관계가 제법 복잡하거든요.”
김환준의 설명을 들은 류정이 팔짱을 끼며 몰두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지원겸은 슬그머니 걸음을 옮겨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손날을 들어 몸을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데, 내용을 들어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야, 너희 저거 전부 까발려도 되냐? 김환준, 저 새끼. 혼자 폭주해서 상의도 없이 말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지원겸은 나와의 작당을 통해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엔 이야기해 주지 않은 정보들도 제법 됐는데, 놀라지 않는 걸 보니까 스스로 알아냈던 것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머리가 비상한 인간답게 눈치도 좋은 편이었지. 그러면서도 김환준의 행보가 독단적인 거라고 보고 내게 묻고자 찾아왔다. 역시 이 사람은 호구가 맞는 것 같다니까.
억양만 강해서 그렇지. 실상은 전부 우리에 대한 걱정이었다.
김환준은 제게 다가온 류정과 이민석을 보며 사태에 대해 브리핑했다. 속이 시커먼 인간답게 말할 필요가 없는 부분은 자르고 살을 채워 가며 분위기를 조정하는 중이었다.
“대충 블릭투와 온다 레이블은 하이사인에게 좋지 못한 감정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 이유는… 다들 아실 것 같은데요.”
“정원이 사건이요. 해결되면서 최한성 씨가 터졌잖아요.”
저기는 내가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먼저 말을 꺼냈다.
“우와~ 그게 진짜면 내로남불 아니야?”
“뭐, 지금까지 한 짓만 봐도 못 할 사람들은 아닌 것 같잖아요.”
더 깊이 파고들자면 이정원 사건을 해결하며 블릭투를 끝장내려고 우리가 직접 손을 써서 그랬던 거겠지만 말이다.
서도경이 뒤쪽에서 뭘 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온다 레이블을 벼랑 끝까지 몰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래서 우리 편을 들어 주려는 듯 질색한다는 뉘앙스를 내비치는 류정과 이민석에겐 멋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뒤에 있는 MXP는… 여기도 아시죠? 저희 전 소속사인 거?”
김환준 저 인간… 속도 참 좋은 인간이다. 아닌가? 좋지 못해서 저렇게 싱글거리며 말을 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메이터스로 이동한 이후에는 루머 때문에 고생한 것을 알고 있었는데.
전 소속사가 계약 문제로 원한을 갖고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걸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말할 수 있는 건가 신기해졌다.
물론 여기서 학을 뗀 것은 나만이 아닌 듯했다. 이민석은 놀라기 바빠서 그렇다 치고. 류정이 질렸다는 느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원겸은 한참 전부터 입이 닳도록 혀를 차기 바빴다. 이 정도면 대략적인 설명은 됐겠지. 다들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관계에 대해선 전부 이해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프로그램의 PD가 두 그룹과 원한이 있는 소속사랑 유착 관계였다, 이 소리죠?”
“네, 처음에는 저희를 누르고 자기네가 우승할 생각 정도였을 겁니다. 겸사겸사 저희 쪽에 여러 가지 문제를 터뜨려서 힘들게 만들려고 했던 것 같은데. 역으로 수세에 몰려 생방송에서 마지막 발악을 한 모양이더라고요.”
김환준, 거기까지만 해. 묘하게 날이 선 말투를 듣다가 손을 들어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저기도 사람이긴 했나 보네. 더 가는 건 좋지 못할 거라는 판단하에 나도 모르게 도움 비슷한 걸 준 듯하다.
뭐, 어차피 할 말은 있었으니까. 작게 한숨을 내쉬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저, 할 말이 하나 있는데요…….”
“뭔데?”
듣고 놀라지나 마.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대기실 돌아가시면 인터넷부터 확인해 주시겠어요? 온다랑 한동준 PD,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들었거든요.”
“네?”
“하? 너 무슨 소리냐?”
“그거까지 얘기해 줘도 괜찮은 거예요?”
“…이미 다 말했잖아요. 뒤에 가서 놀라는 것보단 미리 알고 있는 게 낫죠.”
김환준의 장난 아닌 장난에는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 유착 관계 관련 비리, 곧 터진다고 했었거든요.”
지원겸이 어깨를 흔들며 묻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건데?!”
“윽, 저도, 그냥, 주워들은 거예요.”
미안, 지원겸. 이 말의 반은 거짓말이었다. 아니, 뭐 나도 들은 건 사실이니까. 멀미가 난다는 핑계로 몸을 물렸다.
“일단 가시면 아무 얘기 마시고, 인터넷만 조용히 확인해 주세요.”
크라운 게임 파이널 무대에선 우리가 애를 썼다. 이제는 대표인 서도경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사람, 같은 편이지만 무서운 구석이 있거든요. 다른 이들은 모를 속마음이었다.
지금까지 모은 증거만 봐도 온다와 한동준의 말로는 정해져 있었다.
* * *
“우웩, 멀미 나…….”
간신히 리더들의 회동에서 벗어나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끝도 없이 붙잡고 질문을 던지려는 지원겸은 김환준이 붙잡아 준 상황이었다.
자기 몸에 손대지 말라며 왁왁대는 지원겸을 보다가 먼저 가 보라는 류정과 이민석의 손짓에 먼저 자리를 떠났다.
지금쯤이면 모두 해산했겠지? 인기척이 드문 곳이라곤 했으나 이렇게 각 팀의 리더들만 사라져 오래 돌아오지 않은 것은 수상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대충 낯이 익은 곳 언저리까지 이동한 이후였다. 저 멀리 있는 문 위로 하이사인이라고 붙은 종이가 보이는 듯했다.
“신해신입니다. 들어갈게요.”
똑똑, 노크를 하고 문고리를 돌리는데. 뭐지? 이상하게 시야가 어두웠다. 깜깜한 내부에 인기척이 없는 고요한 방 안으로 발걸음을 들이밀었다.
그와 동시에 펑! 커다란 폭죽 소리가 귀를 때렸다.
“으악!”
“해신이 형! 고생 많았어!”
“해신 씨~! 크라운 게임 우승, 축하해요!”
…이게 뭐야? 번쩍, 켜진 형광등 불빛 아래로 케이크를 들고 있는 멤버들과 축하한다며 말을 던지는 회사 스태프진이 보였다.
꽂혀 있는 초 위로 박재민이 라이터를 들이밀며 불을 켜는데, 그제야 거기에 적힌 문구를 발견했다.
[우리사인 장하다 장해
크라운 게임 수고했어요!]
초콜릿으로 장식된 케이크를 보고 나서야 모든 상황이 파악됐다. 이 사람들, 이벤트 참 좋아하네. 아무래도 우리 몰래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다들 탈의하러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 깜짝 서프라이즈로 해 주려고 했는데. 거기에 해신 씨만 없어서 저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맞아요~ 들어오자마자 다시 나가는 게 어디 있어요! 케이크 못 먹게 한다고 고생 했잖아요~”
박재민과 김윤하의 이야기를 듣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일렁이는 불꽃을 보고 있으니 케이크를 들고 있는 윤명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나, 안 먹고 형 기다렸어.”
“신해신, 너. 이 먹보가 포크 들고 대기하는 거 못 봤지. 내가 사진 찍어 뒀다. 이따가 보여 줄게. 그나저나 이런 날은 너도 대기실에 좀 붙어 있어라. 어떻게 눈만 떼면 사라지냐.”
이정원의 장난기 섞인 타박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차려지는 듯하다. 그대로 고개를 틀어 멤버들을 쳐다봤다.
멋쩍다는 듯 시선을 피하는 강태오와, 어디서 받은 건지 주워 온 고깔모자를 쓰고 낄낄거리는 권혜성, 권혜성의 뒤쪽에 서서 안 보인다며 팔을 내젓는 문채민을 더불어, 어서 불을 끄라며 재촉하듯 이야기하는 이유준까지.
그래, 다들 고생 많았다. 감사의 의미로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케이크에 다가갔다. 그러고는 후- 바람을 불어 촛불을 껐다.
펑- 펑- 사이드 너머로 서 있던 오병은과 다른 스태프가 추가로 폭죽을 터뜨렸다. 케이크를 손가락으로 콕 찍은 이정원은 내 뺨에 길게 크림을 묻히고 있었다.
“늦게 온 벌이야. 얼른 앉자.”
이런 맛에 그룹을 하는 건가. 기묘한 심경으로 녀석들의 뒷모습을 살폈다.
[미션이 완료되었습니다.]
때마침, 찾아와야 할 것도 찾아온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