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62화 (261/328)

262화

컴백을 준비하던 비활동기였다. 스케줄이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빠듯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크라운 게임에서 일어난 일들과 더불어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우승자라는 이름값이 방송계 여기저기에서 호의적으로 적용한 모양인데.

오늘은 모처럼 모든 멤버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날이었다. 정규 방송은 아니고, 메이터스에서 진행하는 자체 콘텐츠를 촬영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바쁘게 떡밥을 주면 컴백을 예상하지 못할 거라나 뭐라나.

매니지먼트실에서 팬덤에게 깜짝 서프라이즈를 해 주자며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뭐, 우리도 팬들이 기뻐하면 좋았기에 싫다는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사전 설명도 없이 막무가내로 끌려온 세트장 내부였다. 스태프가 주는 옷을 입고 메이크업을 받고 나서야 어떤 내용의 촬영인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저희 미술관 작품 중 그림 1점이 사라졌습니다. 탐정 여러분께선 ‘괴도 사인’이 훔쳐 간 미술품을 되찾아 주세요.”

- 헐 상황극?? 나 얘네 상황극 자컨 개좋아해 ㅋㅋㅋㅋㅋㄱㅋㄱㅋㅋ 상황극 안 같은 상황극 미친 내 취향임 ㅋㅋㅋㅋㅋ

- 이 무슨 노xx없는 노xx팀임

- 신리다 표정 봐 혼자 초탈했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까까지만 해도 스태프진 사이에 섞여 있던 사람이었다. 우스꽝스러운 가짜 수염을 달고 나타나선 도난품을 찾아 달라며 명연기를 선보였다.

우리가 촬영할 콘텐츠는 하이사인 상황극 ‘하이사인 다이어리: 미술관 편’이었다.

어쩐지 옷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더라. 갈색의 체크무늬가 촘촘하게 들어간 재킷과 모자를 살펴봤다.

탐정 옷에서 모티브를 짜 온 스페셜 의상이었나보다. 멤버들마다 디테일이 다른 게 그럴듯한 분위기였다.

미술관처럼 꾸며진 스튜디오에서 열연하는 스태프를 바라보니 도둑맞은 작품의 사진이라며 패널 하나를 들고 온다.

“와, 되게 못 그렸…….”

“쉿.”

3살 먹은 아이가 그렸을 법한 낙서풍의 그림이 보였다. 권혜성이 자기가 느낀 바를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 옆에 서 있던 강태오가 빠르게 녀석의 입을 틀어막았다.

- 아 ㅅㅂ 나 벌써 웃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캐입 안되는 상황극 맛집 하이사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원래 아기강쥐는 거짓말 못해요 ㅜ

- 강태오 반응 속도 미쳤냐고 ㅋㅋㄱㅋㄱㅋㅋ 육아 폼 미쳤다 ㅋㅋㅋㅋ

…아니, 근데 맞는 말이긴 하잖아. 누가 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크레파스만 쥐어 주면 다시 똑같은 걸 만들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그림이었다. 그림이라고 하기에도 아쉬운 낙서에 가까웠다.

그냥 하나 그려 주고 되찾았다고 하면 안 되려나? 당연히 안 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무덤덤한 얼굴의 이정원이 넋을 놓고 서 있는 윤명의 어깨를 툭툭 건드린다.

“명아. 너, 왜 이렇게 넋을 놓고 있냐.”

“…나 지금 되게 심경 복잡해.”

“왜?”

헌팅캡을 눌러쓴 윤명이 새삼 심각한 얼굴로 제작진을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영문을 몰라 하자 측면에 있던 문채민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얼굴로 폭소했다.

“그게 이거였구나. 형들, 저거 아까 명이 형이 그린 거야.”

“명이 네가 그린 거야?”

“…….”

“엥? 윤명, 너. 언제 저런 걸 그렸냐?”

“…음, 되게……. 응, 많이 예술적이다… 명아…….”

“…다들 조용히 해.”

- ㅁㅊ 윤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기는 그림 못그려도 괜찮아

- 하이눈들 아기라이팅 많이 늘었다?

- 아니 근데 저건 좀 심하지 않냐 그러니까 내게 내놓도록

-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근데 이거 상황극이라잖아 미술관에 걸려있는 그림을 그린 사람이 탐정이자 그림을 훔쳐간 용의자 중 하나가 되면 어쩌잔건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타팬덤에서 오셨나요 저희 애들은 원래 이럽니다 이렇게 시작해도 잘 끝나니까 걱정마세요

- 캐입없는 상황극 츄라이 츄라이

알고 보니까 저 그림은 윤명이 녹화 전에 스태프의 부탁으로 그렸던 것이었나 보다.

거기서 뭐라 말할 수도 없으니 멤버들의 위로 아닌 위로가 이어졌다. 낄낄거리며 윤명을 놀리다가 헤드록에 걸린 권혜성만 빼면 말이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탐정들 위로 경고음이 울렸다. 삐익- 귀를 울리는 소리에 모니터를 쳐다보자 간곡한 부탁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경고! 여러분은 탐정입니다! 제발 이입 좀 해 주세요. ㅠㅠ]

- 하이사인 자컨 특: 맨날 제작진이 빔

- 아 쓰바 ㅠㅜㅜㅠ 나 얘네 이런 거 이제 알았어 니들만 이런 거 보고 있었냐 ㅠㅜㅠㅜㅠ

- 얘네 개꿀잼 컨텐츠인 거 비해서 안알려지긴 했지 뭉쳐놓으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애들임

- ㅋㅋㅋㅋㅋㅋㄱㅋㄱㅋㄱㅋ윗 돌았냐 ㅋㅋㅋㄱㅋㄱㅋㄱㅋ

- 근데 맞말이라서 부정못하겠다 우리 애들 같이 있으면 같이 망가진다

“아차, 그럼 미스터 윤이 그린 작품을 훔친 괴도 사인을 찾아볼까나?”

아무래도 우리 멤버들에게 정극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권혜성의 어색한 외침 이후론 간단한 배경을 들을 수 있었다.

- 아니 얘들아 벌써 스토리 꼬였다

- 하망진창 오히려 좋아

우리 멤버 중 한 명이 괴도 사인인지 뭐시기인지를 맡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건 도대체 언제 부탁받은 건지 모르겠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지 않은 편이었는데, 그 잠깐 새 제작진과의 컨택을 끝낸 인물이 있었단 것도 신기했다.

말로는 괴도 잡기라고 했지만, 실상은 스파이 찾기였던 듯하다.

스파이라……. 얼마 전엔 진짜로 그걸 했었는데. 눈이 마주친 이유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멋쩍게 웃는 얼굴이 퍽 민망해 보였다.

까짓것, 현실에서도 해 본 걸 가상에선 못 하겠냐. 낯이 익은 콧수염을 단 스태프에게서 규칙을 들었다.

“여러분 사이에 숨어 있는 ‘괴도 사인’을 잡아 잃어버린 미술관의 미술품을 되찾아 주시면 되시겠습니다. 우선은 탐정단 여러분 스스로가 ‘괴도 사인’이 아니란 알리바이를 대 주세요. 그중 진실이 아닌 거짓이 섞여 있습니다. 그 거짓은 라운드별 게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힌트로 구분이 됩니다. 자, ‘괴도 사인’은 어디 있을까요? 그럼 게임 스타트!”

펑! 시작을 알리는 폭죽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하는 거야? 정말로? 상황극이 깔린 자체 콘텐츠치곤 막무가내인 구석이 있는 편이었다.

이러다가 노잼이면 어떡하려고 그러지. 심란한 마음에 주변을 돌아보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게 내 기우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벌써 캐릭터에 이입한 것인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고 있던 멤버들 때문이었다.

시니컬한 얼굴로 권혜성과 윤명을 바라본 문채민이 입을 열었다.

“이거, 명이 형 아니야? 스스로의 그림 실력이 부끄러워서 훔쳐 달아났다든가……. 왜, 그 서X라이즈 같은 거 보면 나오잖아. 과거 예술가분들이 딜레마에 빠져서 본인 작품 쫙쫙 찢어 버리는 거.”

“…서X라이즈 그게, 여기서 왜 나와.”

“아니, 근데 좀 일리 있어. 윤명, 너. 지금 완전 부끄럽잖아!”

“둘 다 이리 와…….”

- 자컨인데도 타 방송에 삐처리를 하는 성실함

- 도리어 수상해보임

- 챔니 막내온탑 오늘도 광역딜 시전 돌았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 근데 설득력 미쳤냐고 ㅜ

- ㅇㅇ 나도 모르게 고개 끄덕이고 있음;;

- 채민이는 아이돌해서 다행이다 옥장판 팔았으면 판매왕 됐을 듯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ㄱㅋㄱㅋㄲㅋㅋ

권혜성과 문채민에게 딜을 먹은 윤명이 눈에서 레이저를 쏟아 냈다. 심각한 듯 심각하지 않은 듯한 막내 삼인방의 대화가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저기는 글렀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쪽도 썩 멀쩡해 보이진 않았다. 점잖은 목소리로 점잖치 못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세 명 때문이었다.

이정원이 무심한 표정으로 강태오와 이유준에게 손가락질했다.

“유준이, 너냐? 아니면 태오?”

“너무 생사람 잡는 거 아니야?”

“자수해서 광명 찾자. 자기 발로 나오면 감형되는데 남한테 잡혀가면 그딴 거 없다.”

“이 형은 뭘 또 이렇게 진지해…….”

- 그래 이렇게 나와야 이가든이지

- 막내가 광역딜이라면 맏형은 한 놈씩 잡아 때린다

- 역시 손맛 장인

현재 상황을 즐거워하며 웃기 바쁜 이유준과 지쳐 보이는 얼굴의 강태오가 가관이었다.

아,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해. 아니면 피곤하다고 해야 해.

평소 성격답게 움직였을 뿐인데도 예능적인 그림이 뚝딱 만들어진다.

여기서 이 콘텐츠를 기획한 사람의 마음을 전부 깨달았다. …알아서 잘 노니까 미션 하나 던져 주고 그림을 만들란 거였구나. 왠지 한숨이 마르지 않는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일단은 범인을 잡아야 녹화가 끝날 건 분명했다. 그래서 집중해 보자며 도움이 될 만한 녀석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럴 만한 인간이 도무지 발견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며 다음 순번으로 넘어가기 위해 진행을 자처했다.

박수를 쳐서 모두의 관심을 한 곳으로 모았다.

“자, 자. 일단 각자 알리바이부터 이야기해 봐. 명이, 넌 혜성이 좀 풀어 주고!”

“…쳇.”

“켁, 켁……. 이거 얼른 놔악……!”

- 아기강아지가 아니라 동네북이었던 모양

- 땐스강쥐는 리액션이 죽여서 잡을 맛이 있나 봐

- 칭찬이야 욕이야 ㅠㅜㅜㅜㅜㅜㅋㅋㅋㅋㅋㅋㅋㅋㅋ

콘텐츠 녹화 바로 직전에 받았던 종이가 하나 있었다.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오기 전에는 절대로 펴 보지 말라고 해서 뭔가 싶었더니. 이게 우리의 알리바이를 알려 주는 것이었나 보다.

완전히 즉흥이군. 범인역을 맡은 멤버는 미리 받았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연장자인 이정원부터 소지하고 있던 쪽지를 펼쳐 읽었다. 중간중간에 첨언이 된 이정원의 주관이 퍽 예능스러웠다.

“그림이 도난당한 건 오전 11시. 나 탐정 이정원은 오전 10시 58분에 사무실 건물에 앉아서 업무 메일을 보냈습니다. …내가 그랬어? 아, 일단 아무튼 증거로는 발송한 업무 메일의 캡처본을 제출합니다. 이건 또 언제 준비했어요? 진짜 내 이름으로 보낸 메일이네.”

“야, 이정원.”

“왜, 뭐.”

- 역시 절대 캐입 안됨

- 얘들아 연기는 하지 말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스바 눈물나 ㅠㅜㅠㅜㅠㅜㅠ

이정원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쪽 스크린으로 캡처 화면이 떠올랐다. 10시 58분, 의뢰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보낸 메일이었다.

“예, 일단 제 알리바이 증거라네요. 전 11시에 사무실에 있었고요. 범인은 아닙니다. 그림도 제 취향 아니에요.”

“…아, 괜히 내가 그렸어.”

- 말 한마디 한마디에 뼈가 박혀있음

- 칼 수준인데 아니 나 처음에는 머리쓰는 편인 줄 알았는데 ㅋㅋㅋㅋㅋㅋ

- 우리 애들은 머리 쓰는 기획으로 짜도 콩트가 되거든요 정극 보고 싶으면 공중파 가야함 거기선 멋진 척해주니까

- 멋진 척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ㄱㅋㄱㅋㄱㅋㄱㅋ

뻔뻔한 얼굴로 웃는 이정원이었다. 괜히 윤명만 대미지를 입는 듯했지만 말이야. 물론 한 방에 인정받을 만한 증거는 아니었다. 권혜성을 비롯하여 문채민에게선 공격이 들어왔으니까.

“에이~ 그래도 메일 정도야 핸드폰으로 보낼 수 있잖아. 미술관에 들어와서 작품 떼 가기 전에 발송한 거 아니야?”

“21세기에는 예약 발송이란 좋은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기각.”

하여간에 한 번을 쉽게 넘어가려 하질 않았다. 이정원의 발언이 끝난 후 다음은 이유준이 쪽지를 펼쳐 들었다. 여기도 그리 쉬운 느낌은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