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64화 (263/328)

264화

“하나, 둘, 셋, 넷…….”

숫자는 늘어가지만, 이정원은 거뜬하단 얼굴이었다. 처음엔 워낙 승부욕도 강하고 체력도 좋은 놈이라 그러려니 했다.

근데 그것도 스물을 넘어가고 서른을 넘어가자 모두 사색이 됐다.

“…해신이 형.”

“…어, 왜.”

“…저 형이 저렇게 하면 우린 어떡해? 나, 분명 평균인데.”

- 마이크 차고 귓속말 해봤자 의미가 있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쓰바 뼈땨ㅐ렸어 ㅋㅋㅋㅋㅋㅋㅋ

- 혜성아 넌 찐으로 평균이잖아… 해신이는…

- 형아 사색된다

가까이 다가온 권혜성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퍼렇게 질린 모습을 보아 말하고자 하는 건 단 하나였다. …쟤 하나 때문에 우리가 다 부실해 보이는 거 아니야?

게임은 둘째 치고 앞으로의 이미지가 달린 일이었다. 모두 평균 이상으로 체격이 좋은 편이었는데. 지나치게 타고난 인간이 있어서 나머지가 모자란 인간처럼 보이게 생겼다.

심지어 옆에서 걱정스럽다며 오버하는 권혜성도 팀 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스포츠맨이었다. 여기서 가장 걱정해야 하는 게 나이가 많은 나였다.

“서른다섯… 서른여섯… 서른일곱…….”

“…야! 이정원, 그만해!”

- 신해신 존나 다급해짐

- 아무래도 그룹의 이미지가 걸린 일이니까

- 제일 타격감 큰 건 본인 아닐까?

- 너무해 ㅠ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ㄱㅋㄱ

다음 타자인 윤명이 느긋한 목소리로 이정원의 턱걸이 카운트를 세 줬다. 저놈 다음이 저놈이라니. 아찔해졌다.

나머지 멤버들, 특히 나나 운동으론 영 아닌 것 같던 이유준을 위해서라도 이정원을 뜯어말려야 할 것 같았다. 반칙 써도 되나요? 제작진을 돌아보니 자기네는 그런 규칙을 만든 적이 없다며 씨익 웃어 보였다.

“가라, 권혜성!”

“롸져!”

- 오~ 대박 엉망진창인데?

- 벌써 엉망이구나

- 스포츠 아니었음?

- 멋진 건 공중파에서 찾으라니까

- 존나 맞말이라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ㅜᅟᅲᆿㅋㅋㅋㅋㅋ

제작진의 뜻을 확인하자마자 권혜성이 이정원에게 달려들었다. 스스로 안 내려오면 끌어내리겠다는 의미였다.

거기서 나는 이 게임의 뒤가 두려워졌다. 다들 온갖 반칙이란 반칙은 다 선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혼자 망가지는 것보단 다 같이 망하는 게 나았다.

철봉 위에 훌쩍 올라간 이정원이 권혜성에게 뭐라고 했다.

“이러기 있어? 권혜성, 너. 내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 봐, 그럼 진짜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혀, 형……. 후퇴해도 될까?”

- 기깔나게 튀어 나가서 3초만에 주춤거리기

- 태세 전환 장인

- 멈머 목줄 풀고 달려나가서 다시 주인 돌아보는 거냐고 ㅠㅜ

이정원의 살벌한 경고에 권혜성이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봤다. 왜 여길 쳐다봐? 나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 해신이 모르는 척한다

- 아무래도 주인도 살아야 하니까…

내게 버림받은 권혜성은 자신의 미래를 엿봤나 보다. 어차피 혼날 것 화끈하게 혼나자며 다시 턱걸이하려던 이정원의 허리에 매달렸다.

쿵- 아무리 팔 힘이 강한 이정원이라고 하더라도 제 몸뚱이만 한 놈을 하나 더 달고 턱걸이하기는 무리였나 보다.

마흔 개 언저리까지 채운 이정원이 권혜성의 목에 팔을 걸곤 힘을 주며 뒤로 물러섰다.

“정원이 형, 마흔둘이요…….”

“켁, 켁, 케켁, 이거 놔.”

“난 분명 말했다. 근데도 먼저 덤빈 건 너야. 권혜성, 너. 오늘 나랑 정신 단련 좀 하자.”

- 권혜성 시간과 정신과 단련의 방으로

- 거기 해신이 방 아님?

- bgm 미쳤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른 멤버들 익숙한 광경인가 봐 ㅋㅋㅋㅋㅋㅋ 헤드록을 걸든 말든 신경도 안 써

- 윤명 몰래 박수쳤다

- 상대의 불행은 나의 행복

이정원의 팔을 치며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권혜성은 무시했다. 멤버들은 모두 익숙한 광경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다음 진행으로 넘어갔다.

처음부터 알았다면 좋았을걸. 그 난리를 쳐서 저지한 선이 42개였다. 이제부턴 온갖 반칙과 비열한 술수가 판을 칠 텐데. 더 빨리 녀석을 내보낼 걸 그랬다.

뒤이어 윤명의 차례가 다가왔다.

“…해도 되죠?”

“명이 형, 왜 우릴 보고 말해. 얼른 해~”

“…불길해.”

- 명아 왠지 미래를 본 것 같다

- 나도 그거 같이 봤음

분명 제작진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윤명은 불안하단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문채민이 싱글벙글 웃는 와중에 팔짱을 낀 이유준이 고개를 까딱였다.

가장 요주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권혜성은 이정원에게 붙잡혀 있었지만 다른 애들도 만만한 스타일들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삐익- 긴 호루라기 소리와 동시에 윤명이 펄쩍 철봉에 매달렸다. 그와 동시에 뒤에 서 있던 나머지 멤버들이 우르르 철봉 쪽으로 다가갔다.

“하나… 어? 이, 이러기 있어요……? 심판……! 레프리……! 해신이 혀엉……!”

- 하이사인 자컨 특: 각자도생

- 그 와중에 리더형아 부르는 것 좀 봐 ㅜㅜㅜㅜㅜㅜㅜㅜㅜ풒ㅍ

- 심판이 있었으면 이렇게 개판은 아니었겠지

- 일단 심판이 필요하기는 함?

- 이거 스포츠였으면 전원 퇴장받았음 마지막에 쫓겨나는 사람이 우승자급

- 우승자도 레드카드 받는 거냐고 ㅠㅜㅠㅜㅜㅜ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윤명이 턱걸이를 하나 하기가 무섭게 둘이 달려들었다. 언제 말을 맞춘 건지 모를 문채민과 이유준이 있었다.

권혜성처럼 매달려서 떨어트릴 생각은 없었던 모양인데. 어째 저게 권혜성보다 훨씬 더 지독한 것 같았다.

어디서 난 건지 모를 깃털이 이유준과 문채민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었다. 그걸 든 둘이 윤명을 간지럽혔다.

무던하기 짝이 없던 윤명도 저런 행동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나 보다. 하나를 하기가 무섭게 심판과 내 이름을 부르며 철봉 위로 도망쳤다.

“하하……! 으학……! 가, 간지럽잖아……!”

완전히 위로 올라가 봤자 키가 큰 이유준이 발꿈치를 들어 올리면 손이 닿을 법한 거리였다. 도망갈 공간이 없었기에 넓은 스튜디오 내부로 윤명의 웃음이 울려 퍼졌다.

“명이 형, 탈라~악!”

“윤명 한 개요.”

- 탈라~악!

- 폰트 존나 찰지네

- 탈라~악!

- 탈라~악!!

- 너준이 사람 너덜너덜하게 만들고 태연하게 1개 말하는 거 킹받음

- 어차피 유준이는 많이 못 할 테니까

- 뿌이뿌이뿌이~

- 힙합의 신 드립니다

“…억울해.”

철퍼덕, 끝끝내 매트로 떨어진 윤명이 드러누워 항변했다. 이정원의 처벌에서 벗어난 권혜성은 윤명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낄낄거리던 상황이었다.

나는 이제 그냥 어이가 없었다. 그건 곁에 있던 강태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암담하단 기운이 더 강했다.

“다음은… 태오, 너지?”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ㄱㅋㄱㅋ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ㄲㄲ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미쳤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 나 여기 왜 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걸로 도배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방금 태오의 세상이 무너졌기 때문에…

- 우리의 간죽간살… 하이사인의 얼굴짱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 그런 거 없어 같이 죽어

- 아니 시바 벌써 뒤에서 권혜성 윤명 문채민 스탠바이하고 있잖아요 ㅜㅠㅜㅠㅜᅟᅲᆿㅋㅋㅋㅋㅋ

- 이유준이랑 이정원 안 그러는 척 웃는 거 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ㅅㅂ 신해신 모르는 척한다 ㅋㄱㅋㄱㅋㄱㅋㄱㅋㄱㅋㄱㅋㅋ

바로 강태오가 다음 타자였기 때문이었다. 말이 게임이지 실상은 누가 더 망가지는지 대결하는 중이었다.

턱걸이 3개를 넘기지 못한 강태오가 매트 위로 떨어져 있었다. 이유준이 철봉을 쥔 강태오의 손가락을 억지로 펼쳤기 때문이었다.

“이거 맞는 거예요?”

- 태오야 일단 진정하고 머리부터 좀 보면 안 될까

- ㅋㄱㅋㄱㅋ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왜 턱걸이 하는데 저 꼴이 되는 거죠???

- 이게 턱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대단하다

- 턱을 걸칠 틈도 없는데 무슨 턱걸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내가 보기엔 유사 격투기임

- ㅋㄱㅋㄱㅋㄱㅋ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 허리에 권혜성 쟤가 매달렸거든.”

“…태오 형은 3개라도 했잖아. 난 1개였다고…….”

강태오의 이의 제기 뒤로 이정원과 윤명의 항의가 이어졌다.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거지.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면 차라리 다행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뒤로도 이어진 게임은 아주 가관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편집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차마 두 눈을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공정한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건 좀 심했다.

3개, 2개, 4개… 갖은 반칙으로 한 자릿수를 넘기지 못한 숫자들이 확인됐다. …물론 나도 여기 끼어 있었다.

“셋이 협동하기 있어? 연장자에 대한 배려가 없잖아.”

- 이제는 인정하는구나 몰이 당하는 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 나 저 셋이 뭉쳐서 형아들 골려먹는 거 왜 이렇게 좋지 ㅋㅋ쿠ㅜㅜㅜ

- 근데 이쯤 되면 경기가 의미 있나요? 정원이 빼고 숫자가 처참한대?

- 스포츠 보고 싶으면 다른 채널로 가셔야 합니다

- 다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거 상황극임

- 아 맞다;

- 아 그랬지; ㅎ

- ㅋㅋㄱㅋㄱㅋㄱㅋㅋㅋㅋ

욱하는 마음에 손가락질하니 머리 뒤로 뒷짐을 진 권혜성이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부렸다.

뻔뻔하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는 문채민이나, 멍한 얼굴로 내 기록을 말하는 윤명까지.

그래, 나는 막내 삼인방에게 처참하게 당한 이후였다.

“…해신이 형, 2개요.”

그 결과 첫 번째 게임의 우승자는 이정원으로 정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거저먹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탁월한 운동 신경과 더불어 반칙해도 된다는 개념이 없을 무렵에 먼저 시작한 놈이라 마흔 개를 넘는 기록을 지니고 있었다.

“힌트 주세요.”

“우우~ 치사하다~”

“우우, 반칙왕…….”

“불만이야? 그리고 반칙왕은 너희잖아.”

제작진에게 가까이 다가간 이정원이 진실 확인을 했다. 뒤에선 권혜성과 윤명이 엄지를 거꾸로 세우고 이정원을 맹비난 중이었다.

“첫 번째 게임의 우승자인 정원 씨에겐 멤버들 중 한 명의 알리바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기회를 드립니다.”

“아, 이거 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개가 되나요?”

“그건 정원 씨 마음이겠죠?”

“아하.”

- 아하 단 두단어로 모든 걸 이해했다

- 자 이제 게임을 시작하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작진의 설명을 들은 이정원이 씨익 길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텄구만. 아무래도 저놈은 입을 싹 닫을 생각인가 보다.

속닥속닥, 여기에는 들리지 않는 비밀 회담이 이어졌다. 뭘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상쾌한 얼굴의 이정원이 돌아오고 있었다.

“야, 정원아. 진짜 안 알려 줄 거야? 좋은 것 좀 들었으면 말해 봐. 이럴 때는 머리를 써야지. 빨리 밝히면 퇴근, 이거잖아.”

“…흠, 그럴듯한걸. 신해신, 너. 좀 설득력 있다?”

- 형들의 딜은 퇴근으로 정해지는구나

- 정원이도 사람이었구나

- 아까부터 신해신 퇴근 요긴하게 써먹네

- 아무래도 일단 직장인이니까

- 응 아이돌도 직장인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팔꿈치를 들어 이정원의 옆구를 찔렀다. 녹화가 재밌기는 하지만 퇴근보단 덜 재밌었으니까.

처음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정원이 반응했다. 길게 콧소리를 내며 다음 게임을 듣고 알려 주겠다며 신호를 보내 온 것이다.

이어진 다음 게임은 초성 말하기였다. 릴레이로 정해진 초성에 맞는 단어를 내뱉는 거였는데 순차적으로 한 명씩 사람을 탈락시키고 마지막까지 남은 자가 힌트를 얻는 단순한 규칙이었다.

이정원과 내가 딜을 걸던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된 것일까. 쉴 틈 없이 이어진 게임에 이정원과는 눈짓으로 대화를 나눠야만 했다.

이거 끝나면 힌트 콜? 오케이, 기왕이면 여기서도 하나 타 와라.

모종의 거래가 오가고 있던 현장이라고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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