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컴백을 코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뮤직비디오 촬영도 종료되고, 컴백 포스터까지 올라간 이후다.
연습에 매진하기 바쁜 하루였는데. 문채민에게서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았다.
저번에 촬영한 자체 콘텐츠에서 포상으로 받았던 휴가를 이용하자는 이야기였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진즉 사용하고도 남았어야 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몰아치는 스케줄 및 컴백 관련 기획과 미팅으로 도무지 빠지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었다.
덕분에 유야무야 지금까지 사용하지 못하고 지나 버렸다.
솔직히 나는 크게 쓸 만한 일도 없었던 데다가 휴가라고 해 봤자 숙소에서 보낼 계획이었기에 크게 탐탁지 않아 했던 상태였다.
말로만 쓴다고 하고 결국은 놈들을 따라 연습실에 가 있을 자신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채민은 뭔가 이런저런 일정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짧게 잘라 눈썹이 보이는 앞머리를 한 상태에서 나를 보고 비장한 눈빛을 내뿜었다.
“놀자, 형. 이대로는 안 되겠어.”
“뭐?”
“지금도 죽겠는데, 조금 더 가면 진짜 휴가고 뭐고 활동 종료 전까진 쓰지도 못할 거라니까? 팀장님들도 이제는 괜찮다고 했잖아. 약속했던 거 지키겠다고 말씀하셨어.”
“그래?”
그럼 그냥 쓰면 되지. 그걸 왜 굳이 나한테 와서……. 본가에 갔다 오겠다고 외치던 과거의 문채민이 떠올랐다.
팀의 리더에게 하는 보고 같은 건가 싶어서 고개를 끄덕인 찰나였다.
문채민이 조용히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연습실 사방에 뻗어있는 다른 녀석들의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형, 있잖아…….”
“어.”
“…나랑 놀러 가자.”
“뭐?”
“쉿, 쉿! 다른 형들 알면 난리 난단 말이야. 특히 저기 두 명…….”
문채민이 가리킨 곳에는 바닥에 드러누워 아웅다웅 팔다리를 뻗고 있는 권혜성과 윤명이 있었다. 거기서 대충 저 둘이 개입되면 복잡해질 거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그것도 나랑 놀러 가자니.
영문을 알 수 없는 막내의 땡깡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도무지 속셈이 파악되지 않았다.
“너, 본가 간다며. 그리고 저번부터 왜 이렇게 나한테 집착해.”
“본가는 캔슬. 지금 상황에서 이틀이나 노는 건 양심 없는 것 같고, 어차피 상으로 받은 거니까 하루 정도는 쓸 계획이었는데. 마침 연락이 왔거든, 정환이 녀석한테.”
“…우정환?”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우정환, 유어돌에서 권혜성 뺨치는 분위기 메이커로 유명했던 연습생이다.
저번에 데뷔하여 신인 그룹으로 나왔던 것까지는 확인했었다.
그 뒤 곧바로 크라운 게임에 들어가느라 좀처럼 신경 쓰지 못했던 바였다.
분명 거기에 내 팬이라던 멤버가 하나 있었지……. 아이돌 중에서도 그런 사람은 처음 봤던 터라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정환이, 걔가 왜?”
“자기네도 이번에 첫 활동 끝나고 휴가받았대. 우리 활동 종료할 때쯤엔 걔네가 컴백한다고 해서 타이밍이 안 맞을 것 같다고, 지금 빠르게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하던데? 그나저나 형, 혹시 우정환한테 밥 사 준다는 말 했었어? 그때 약속 지키라고 낄낄거려서…….”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
유어돌 당시 우스갯소리로 지나가는 말처럼 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걸 기억하고 발목을 붙잡으니 빠져나갈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에휴, 어차피 포상으로 받은 거. 문채민도 하루 정도는 휴식 겸 제 친구를 만나기는 해야 했다.
나도 그 녀석에겐 파이널 때부터 마음의 짐이 있던 터라 빼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니 화색이 된 문채민이 핸드폰을 챙겨 왔다.
저런 걸 보면 아직 애란 말이야. 하이사인으로 데뷔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정환과 하루종일 붙어 다녔을 녀석이니까.
오랜만에 고등학생다운 삶을 좀 살아 보라며 양보해 주기로 했다. 미래의 자신이 알면 욕을 할 만한 이야기였다.
* * *
그렇게 다시 이틀 정도가 지난 평일 아침이었다. 연습실로 향하던 멤버들과 달리 나와 문채민은 다른 곳에 목적지를 두고 움직였다.
“꺄아아아악!”
“으악!”
“나, 다음은 저거! 저거 탈래!”
요란하게 쏟아지는 비명과 돌아가는 기구들에 의해 바람이 부는 장소.
“…채민아.”
“응?”
“…왜, 하필 여기냐.”
낭만과 동화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곳은 바로 놀이동산이었다.
쓰고 있던 캡 모자를 다시 매만지며 옆에 서 있는 문채민을 바라봤다.
넉넉한 품의 후드 티와 청바지, 거기에 운동화까지. 꽁꽁 싸맨 얼굴을 제외하면 또래 고등학생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우정환과 약속을 잡았다며 씨익 웃던 놈이 기억나는데. 어디서 만날지, 뭘 할지는 자기들이 정했다던 그 말을 믿어서는 안 됐었다.
어쩐지 불길하더라. 이른 아침 댓바람부터 편한 옷을 고르라기에 찜찜했다. 이런 속셈이 있을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근래 다시 와 보고 싶었는걸. 여기 새로운 놀이 기구 나왔다고 했단 말이야.”
“애냐… 아, 너 애 맞지.”
“형도 좀 놀 줄 알아야 해. 무슨 연습 벌레야? 오늘은 보장받은 휴가 날이라고. 아침에 혜성이 형이 길길이 날뛰던 거 되게 웃겼는데.”
이곳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기뻤는지 문채민은 제법 들떠 있었다.
뭐, 괜찮겠지.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놈을 보자 만류할 수가 없었다.
매니지먼트실에서도 내가 붙는다고 하니 소란만 피우지 말라며 허락을 해 줬다고 했다.
저기요… 얼결에 애 셋의 보호자가 되어 놀이동산을 즐기게 생긴 참이라고 할 수 있다.
아, 애가 왜 셋이냐고 하면 그건…….
“여~ 문!”
“아, 왜 이렇게 늦었어. 네가 불렀잖아!”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그렇게까지 인사할 필요는 없는데. 그, 허리 들어요…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잖아요…….”
우정환네 그룹, 인터너에서 내 팬이라고 지칭하던 녀석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탁지윤이라고 했나. 이름만으론 검색이 힘들 것 같다며 성을 붙여서 활동하게 됐다고 하던 자기소개가 떠올랐다.
홀수로 놀기엔 애매할 것 같다며 한 명을 더 데리고 오려는데, 자기 멤버 중에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애가 있다며 괜찮겠냐는 질문을 받았었다.
나야 어차피 보호자 노릇을 해야 할 게 분명하니까. 또 이 판에서 인맥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게 나쁘진 않았던 터라 흔쾌히 허락해 줬던 과거였다.
그런데 몰랐지, 우정환네 그룹 평균 나이가 이렇게까지 어릴 줄은.
우정환과 동갑이라며 꾸벅꾸벅 인사하는 탁지윤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놀이 기구 타러 와서 부탁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재밌게 놀다 가요.”
“네, 네……!”
영락없이 보모 신세구만. 팀 내에서 애 셋을 맡으며 늘 피곤에 찌들어 있던 강태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미안하다, 강태오. 우리가 너에게 너무 많은 짐을 맡겨 놨었구나.
회개해 봤자 이미 많이 늦은 순간이었다. 오늘은 이 셋과 동행해야 하는 팔자였으니 말이다.
한숨을 푹 쉬며 입구를 막아서고 있는 놈들을 끌어당겼다. 아까부터 여기에만 있으니까 묘하게 시선이 느껴졌던 바였다.
미리 언질 좀 해 놔야지. 잘못하다간 저기 저놈들의 몫까지 내가 덤터기를 쓰게 생긴 참이었다.
그래서 우정환의 어깨를 낚아챈 뒤 조언했다.
“정환아? 형이 미리 당부 좀 해 놓을게.”
“에이~ 여기까지 와서 설교야? 아, 문채민! 해신이 형, 하나도 안 바뀌었잖아! 똑같아!”
“너, 미쳤냐? 여기서 형 이름 크게 부르지 마.”
“엇차, 맞다. 하하, 형, 마이 미스테이크~”
“하아.”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일단 우정환을 비롯하여 탁지윤과 문채민을 모두 챙겨 사람이 적은 구석으로 이동했다.
“다들 놀러 와서 기쁜 건 알겠는데. 오늘은 최대한 문제 없이 놀다가 가야 하거든? …솔직히 말하자면 난 회사에서 여길 보내 준 것만으로도 용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
“그건 형이랑 채민이나 그렇겠지. 우린 이제 신인이라서 그 정도 인지도가 없어. 막말로 모자만 쓰고 있어도 크게 알아보는 사람들은 없을걸? 그치, 지윤아.”
“응, 팀장님이 쿨하게 보내 주셨거든요. 아, 선배님이랑 같이 간다고 들어서 그랬던 것 같기는 했어요.”
“…얘들아, 그렇게 생각해 주니까 고맙기는 한데.”
“형, 쟤한테 의사소통이란 걸 시도 하지 마. 그게 될 리가 없잖아.”
“…그래, 그냥. 조심해서, 조심해서만 놀자. 이름 크게 부르지 말고. 눈에 띄는 행동만 하지 말고. 혹시라도 쫓아 붙거나 사고가 발생할 것 같다 싶으면 바로 나가야 하니까 침착하게 형 옆에만 잘 있어. 알았지?”
들떠 보이는 탁지윤과 머리 뒤로 뒷짐을 쥔 채 휘파람을 불어대는 우정환을 보자 관자놀이가 당기는 기분이었다.
문채민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었는데. 우정환에게 시비를 걸면서도 장단을 맞춰 주는 걸 확인했다. 이렇게 되면 나는 휴식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아, 내 팔자야……. 차라리 연습실에 있는 게 더 나았겠네.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순간, 우정환이 문채민의 팔을 잡아당겨 인근의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놀이동산은 머리띠지. 야, 문챔. 콜?”
“애냐? 공룡은 내 거다. 넌 다른 거 써라.”
“어, 치사한 것도 여전하네. 그런 게 어딨냐? 인생은 선착순이다!”
“거기 안 서!”
캡과 후드 티의 모자를 쓴 채 아웅다웅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곤 녀석들을 쫓아갈 채비를 했다.
“야, 야……! 정……! 아, 맞다.”
여기 옆에 남아 있는 이 녀석만 아니었다면 바로 따라갔을 테지만 말이다.
첫 만남 때부터 묘하게 성실하단 이미지가 있는 녀석이었다. 내가 이름을 크게 부르지 말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지 한 글자를 내뱉기가 무섭게 다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나마 얘라서 다행인 건가. 우정환이 저와 같은 인물이 아닌 차분한 멤버를 데려왔다는 게 이렇게까지 안도가 될 일인가 싶었다.
손을 뻗어 어깨를 한 대 툭 쳐 주니 탁지윤이 여기를 돌아봤다. 턱에 걸린 마스크 위로 제법 예쁘장한 이목구비의 얼굴이 보였다.
“포지션이 뭐예요? 보컬?”
“아, 아니요. 댄서요!”
“그래요? 우리 팀 보컬이랑 좀 닮은 것 같아서 보컬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댄서면 춤 잘 추겠네요.”
“가, 감사합니다.”
주춤거리는 저 행동만 아니었다면 이정원과 묘하게 겹쳐 보이는 인물이었다.
우리도 그만 가 보자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팬이라고 외치던 녀석이 오버랩됐다.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 말 편하게 해요. 그냥 쟤네처럼 형이라고 불러도 되니까.”
“네? 그래도 돼요?”
“동생 하나 더 생긴 걸로 치죠. 뭐. 아, 번호 교환할래요?”
“…네, 네!”
지원겸이나 김환준하고도 반말은 하지 않으려고 들었는데. 얘는 순해 보여서 그랬는지 먼저 제안하게 됐다.
사실 나 어린애들한테 약했던 게 아닐까? 새로 찍힌 핸드폰 번호를 저장한 뒤 탁지윤을 이끌고 가게로 들어간 뒤였다.
서로 어느 머리띠를 쓰냐며 다투는 문채민과 우정환을 바라보다가 탁지윤에게도 합류해 보라며 턱짓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니 정오에 가까워진 시침이 확인된다.
평일이라서 사람이 적은 것 같기는 한데……. 부디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사실 그럴 거라는 생각은 썩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