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69화 (268/328)

269화

“아, 지쳤다…….”

휘이잉, 멀찍이서 굉음을 내며 움직이는 놀이 기구를 보곤 고개를 숙였다.

쓰고 있던 모자가 펄럭일 정도로 강한 바람이 이는데, 저기에 탑승하고 있는 녀석들은 괜찮은 건지, 여러모로 신기했다.

오후 2시, 평일이었던 탓일까 생각보다 인파가 많아 보이지는 않던 놀이동산이다.

애 셋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다가 애들이 놀이기구를 타러 사라져서 아주 잠깐의 여유가 주어졌다.

멀미가 나서 쉬겠다는 문채민을 데리고 벤치에 앉아 있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음료수를 사러 간다며 사라진 녀석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들킨 건 아니겠지?”

괜히 혼자 보냈나. 스낵 코너가 먼 곳에 있던 건 아니었던 터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던 과거 자신이 미워진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으니 따라가 볼 것을 그랬다며 후회하고 있었다.

놀이 기구를 타러 간 우정환과 탁지윤에게도 여기에 있겠다고 말을 해 놨었지.

이거 원, 꼼짝없이 여기서 흩어진 놈들을 기다려야 할 팔자다.

고민하면 머리만 아프니 그냥 내려놓기로 했던 참이었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한 구석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는 창 하나를 발견했다.

“이놈의 시스템…….”

근래 바빠서 제대로 돌아볼 겨를이 없던 시스템 창이었다. 이번 컴백에 이벤트가 걸려 있었으니 여러모로 다시 확인해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채민이 녀석이 오기 전까지 이거라도 점검해 볼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눈앞의 글자들을 읽어 내렸다.

반투명한 홀로그램에 수놓아진 글자들이 머릿속에 박혀 들었다.

[이벤트 발생]

‘활동은 화려하게’ - 부속 이벤트

초동으로 밀리언 셀러를 달성하세요.

실패 시: 잔고 ‘0’원 + 파산

밀리언 셀러라. 초동 100만이 걸린 조건에서 잠시 두통이 이는 듯했다.

이벤트에는 실패라는 게 없던 터라 그럭저럭 무사히 넘어간 전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계약 기간이 한시적으로 걸려 있던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자 다르게 느껴졌다.

벌써 2년 반 중 1년이 훌쩍 지나가 있던 상태였으니까.

1년 반이 채 남지 않은 하이사인의 운명을 떠올리곤 반드시 이번 타이틀로 해당 이벤트를 끝내자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도대체 1군이란 게 뭐야. 시스템이 걸었던 최종 목표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설마 대상?”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것. 우선은 그게 가장 유력한 후보라고 볼 수 있었다.

현재로서 주어진 시간은 내년 연말 시상식까지인가. 유어돌에서 명시했던 기간인 2년 반으로 계산해 보자 아슬아슬하게 그 시기와 맞아떨어졌다.

뭐, 이게 정확한 것도 아니잖아. 일단은 유추 정도에 그친 일이었다.

다른 의미로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이건 시스템 때문도, 저당 잡혀 있는 내 재산 때문도 아니었다.

내년 연말. 하이사인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는 멤버들과 이별이 두려워졌다.

진짜 끝인 거야? 이벤트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각자 소속사로 돌아가서 새로운 그룹으로 나온 놈들을 마주해야 하는 거야?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거기서 문득 현타가 밀려들었다. 손을 들어 이마를 헤집고 나서야 내가 지금 헛웃음을 내뱉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어지간히도 아쉬운 모양인데. 파산에 대한 사실을 잊었을 만치 지금 이 활동에 진심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를 정도로 아이돌이라는 직업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가능한 지금이 오래 가기를 바라던 중이었다. 미련 맞은 성정 때문에 욕심을 부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그 여파가 생각보다 크게 다가오자 머리가 새하얘진다.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을 들으면서도 지긋이 눈을 내리감았다.

“욕심부려 볼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 같았다. 이벤트의 성공 유무를 떠나서 욕심을 부려 보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걸 다른 곳도 아니고, 놀이동산에서 떠올리냐. 어이가 없었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오히려 바쁜 현실에서 벗어나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조금은 상쾌해진 기분으로 차분하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우선, 이벤트를 성공하고. 다음 챕터로 넘어가자.”

어찌 됐든 시스템엔 끝이 존재할 게 분명했다. 무사히 파산을 막고, 모든 저당금을 돌려받는 것, 이게 1차 목표였다.

추가로 정해진 계약이 종료되기 전에 이 그룹의 명맥을 이을 방법을 찾기로 했다.

멤버들의 의견도 필요하니 녀석들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하는, 아주 바쁜 스케줄이었다.

무던하게 살고 현실에 안주하던 과거의 신해신은 없어진 건가?

스태프 시절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법한 무모한 도전에 머쓱함이 밀려들었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로 봐야 할 것 같은데. 시스템이 여러모로 사람을 바꿔 놓은 모양이다.

아직 이룬 바는 없었지만, 갈피를 잡은 것만으로도 한결 산뜻해진 기분이었다.

미션이든, 이벤트든, 아이템이든, 이용해 줄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 주마.

시스템이 알았다면 열받아 할 만한 생각을 하고 허공을 바라봤다.

“형~!”

“어? 왔냐.”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문채민을 발견했다. 한 곳만 다녀온 게 아니었는지 이것저것 많이도 사 온 모습이었다.

다소 버거워 보이는 몰골에 문채민에게 다가가 짐을 나눠 들었다.

푹 눌러쓴 모자와 턱에 걸린 마스크 사이에서 신이 나 보이는 얼굴이 보였다.

“어디까지 다녀온 거야. 길 잃은 줄 알았잖아.”

“형, 이거 좋아할 것 같아서.”

츄러스를 내미는 문채민을 보다가 피식 미소 지었다. 새로 튀겨져 나온 것을 받아 왔는지 기름을 먹은 종이를 보다가 그대로 고맙다며 츄러스를 받았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으니 지쳤다는 듯이 문채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 뭔가 미션이라도 성공한 기분이야.”

“갑자기 뭔…….”

“왜, 우리 데뷔한 이래로 이런 곳에 올 일은 없었잖아. 사실 나도 반신반의했거든? 들켜서 놀지도 못하고 나가는 게 아닌가 하고~ 근데 생각보다 잘 보내고 있으니까 신기해. 무엇보다…….”

잠시 숨을 고른 문채민이 내 쪽을 돌아보곤 브이자를 그리며 이야기했다.

“형이 좀 홀가분해 보인단 말이지. 음… 이거 비밀이라고 하긴 했는데.”

“했는데?”

아무래도 문채민은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낮게 속삭였다.

“형들한테는 말하면 안 돼? 내가 알려 줬다는 거. …오늘 이거, 형들이 부탁했던 거야. 포상 휴가 때 해신이 형, 데리고 가서 아무 생각도 못 하게 움직이다 오라고.”

“뭐?”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문채민이 칭하고 있는 저 형들이라는 건 멤버들이 분명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우리가 어디를 가는지 일절 모르고 있었다는 얼굴로 인사를 했었다.

특히 권혜성과 윤명, 그 두 녀석은 자기들 빼고 재밌는 곳에 가냐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었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사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대화에 미간이 찡그려졌다.

“형들이 부탁했다니까. 정원이 형, 유준이 형, 태오 형, 혜성이 형, 명이 형. 다섯이서 짠 것처럼 말했어. 형, 대표님 만나러 회사 갔던 날에 거실에서 얘기했었거든. 슬슬 포상 휴가 쓸까 하는데 어디 갈지 고민된다고. 그랬더니 그날 형들이 차례대로 나한테 찾아오더라.”

“…….”

“시작은 혜성이 형이랑 명이 형이었던 것 같은데. 해신이 형, 휴가 안 쓸 거 뻔한데 나보고 억지로 끌고서라도 바람 쐬고 오라고 하는 거야. 믿어져? 그 형들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나도 처음엔 꿈꾸는 줄 알았다니까~ 근데 꿈이 아니더라고.”

권혜성, 윤명……. 안 그러는 척 의외로 어른스러운 구석이 존재하던 녀석들이었다.

평소엔 아웅다웅하기 바빠 보여도 눈치가 빨라서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던 놈들이었다.

그런 둘이 문채민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니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다 컸구나. 물론 내가 키운 녀석들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태오 형도 되게 웃겼는데. 혜성이 형이랑 명이 형 나가자마자 주변 확인하고 들어오더니 조용히 이걸 주더라고.”

타이밍에 맞춰 문채민이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카드 한 장이었다.

“카드잖아.”

“응, 카드지. 태오 형 신용카드.”

하단부에는 영문으로 강태오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었다. 문채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태오 형 답지? 이걸로 형이랑 맛있는 것 사 먹고 오랬어. 형한테는 부모님한테 용돈 받았다고 둘러대랬는데. 그게 어디 통할 말이냐고요. 참고로 이 간식, 전부 태오 형 카드로 산 거야. 형이 준 돈은 그대로 주머니에 있습니다~ 이따가 돌려줄게.”

강태오, 이 녀석도 참 한결같았다. 과묵한 것 같으면서도 뒤에선 배려가 끊이질 않던 인물이었다.

말로 표현하는 방식에 서툴렀던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는지. 엉뚱한 방식으로 접근하곤 했던 게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게 유준이 형이랑 정원이 형. 유준이 형은 찾아왔다고 하기도 뭐하다. 나랑 같은 방 쓰니까. 정원이 형이 와서 말하더라고. 형, 데리고 아주 정신없는 곳에 가래. 친절하게 예시까지 들어 주던데? 놀이동산, 백화점, 정 안 되겠으면 형제자매 많은 우리 집 본가에라도 끌고 가라고 했어.”

“이정원 이 자식… 들키면 어쩌자고.”

“그것도 얘기했다니까? 진짜 귀신같네… 형이랑 나면 들킬 일은 없을 것 같다더라. 들키더라도 알아서 수습 할 게 분명하다고 끌고 나가래. 여기까지만 들으면 정원이 형이 정원이 형 한 것 같잖아.”

문채민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부탁을 한 거야?

이정원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멤버였다.

“형, 크라운 게임에서 자기 때문에 너무 고생이 많았대, 그래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런 날이 필요할 것 같았대.”

“아.”

“솔직히 형은 쉬라고 해도 가만히 쉬는 타입이 아니잖아. 숙소에 있어 봤자 멤버들이니 그룹이니 머리만 아파할 게 분명하다고. 차라리 밖으로 끌고 나가서 바람을 쐬게 해야 한다던데. 뭐라고 했더라… ‘신해신, 걔는 혼자 두면 쉬지 못하는 타입이야. 정신적으로라도 리프레시가 되는 시간을 만들어 줘야 해. 아예 생각이란 걸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상에서 잠시 멀어져야겠지.’ 대충 이런 뉘앙스였지…….”

이정원을 따라 하는 것인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은 문채민이 목소리를 깔았다. 그 모습에 비슷한 것 같다며 우스갯소리로 박수를 쳐 줬다.

그런데 문채민은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팔다리를 쭉 뻗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유준이 형, 형 많이 걱정해. 내가 보기엔 형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건 유준이 형이거든. 형이 처음 만난 멤버도 유준이 형이었지? 우리는 모르는 뭔가를 형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캐묻지 않는 걸 보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닐까 싶더라.”

이유준… 분명 회귀 후 가장 처음 만난 멤버였다.

근래 이정원에게 밀려 집요한 모습은 덜 보이는 것 같았는데.

그게 나를 배려하고자 묵인하고 있었단 건 처음 알았다.

이정원이 공격적으로 나서서 걱정하는 타입이었다면 이유준은 암묵적으로 곁에서 지켜보는 스타일이었나 보다.

멤버들의 속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다들 안 그러는 척 하이사인이란 그룹을 소중하게 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녀석들도 나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렇다면…….

들뜨는 기분을 누르며 다시 한번 강하게 다짐했다.

지금 이 현실, 모두 내가 가져야겠다. 이제는 욕심을 숨기지 않기로 결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