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하이사인의 두 번째 정규 앨범의 컴백이 찾아왔다. 가장 먼저 오픈된 것은 바로 뮤직비디오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공식 계정을 클릭했다.
권혜성이 센터라는 사실을 안 한다은에게선 쉴새 없이 연락이 오고 있었다.
까만 화면이 가로로 갈라지며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하이사인의 뮤직비디오에서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을 줄이야. 생소한 기분이었다.
하늘색과 분홍색으로 키치한 분위기를 뽐내는 그룹 로고가 등장했다. 퍼즐 조각처럼 흩어진 로고는 곧 새로운 글자로 재편성됐다.
[Rail heart]
둥둥- 낮은 드럼 소리와 동시에 오락실에서나 들었던 효과음들이 이어졌다.
팝 알앤비 장르에 허스키한 보컬이 아주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하나둘씩 쌓여 가는 전자음이 발랄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삥뽕거리는 장난스러운 사운드에 맞춰 커다란 인형 뽑기 부스가 나타났다.
어두침침한 오락실 안, 흰빛을 뿜어내는 유리 부스 위로 이마를 박고 있는 권혜성이 비쳤다.
- Oh- oh- oh- oh-
왜 너만 모를까 이런 내 마음
줄지어 서 있는 저 Heart가 안 보이니
다소 익숙한 오락실 배경 속, 주변의 모든 색상을 빨아들인 것 같은 차림의 권혜성이 눈에 띄었다.
민트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맞춰 연한 노란빛의 비니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뽑기에 실패했는지 떨어지는 하트 모양의 쿠션을 보며 입에 있던 막대 사탕을 뽑아냈다.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은 권혜성이 넉넉한 품의 후드 티를 뒤적였다. 주머니 가득 손을 밀어 넣고서는 남아 있는 동전을 확인하며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권혜성의 어깨를 건드렸다.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에 맞춰 고개를 든 권혜성의 앞에는 인자한 얼굴의 이유준이 서 있었다.
새까만 머리를 엷은 갈색으로 물들인 모습이었다. 차분하던 평소보다 활발한 느낌이 들어서 신기해 하던 찰나였다.
의아해하는 권혜성에게 이유준이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 이제는 숨기지 않는 내 진심이야
이유준이 낮지만 안정적인 목소리로 포인트 파트를 불렀다. 가리킨 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 한 대가 자리해 있었다.
현실감 넘치는 오락실 배경 속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게임 부스였다.
권혜성이 하고 있던 것과 같은 인형 뽑기 기계이긴 했으나 핑크빛에 파스텔 컬러로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외관이 남달랐다.
마른침을 삼킨 권혜성은 어느덧 기계 앞에 서 있었다.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 뉘앙스를 보이자 인형 뽑기 측면으로부터 낯익은 얼굴 하나가 더 등장했다.
- 처음에는 무서워서 도망쳤는데
쌓여 가는 감정에 난 포기했어
그건 머리를 가닥 가닥을 밝게 물들인 강태오였다. 패치가 가득 붙은 얇은 점퍼 차림으로 인형 뽑기 부스의 측면의 유리를 긁어 댔다.
강태오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권혜성이 주춤 발을 물렸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선 뒤에야 인형 뽑기 부스 윗면에 적혀 있는 문구를 발견한 듯했다.
[Rail heart]
당신의 사랑을 뽑아 보세요!
어쩌면 마법 같은 일이 발생할지도?
누가 봐도 수상한 내용이었지만 그걸 본 권혜성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몬색의 비니를 쓴 민트색 뒤통수가 인형 뽑기 부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권혜성의 결심을 확인한 이유준이 강태오와 작게 시선을 교환했다.
씨익 입꼬리가 올라간 이유준과 시큰둥하게 눈을 내리깐 강태오의 맞은 편에서 쪼그려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한달음에 달려와 인형 뽑기 기계 앞에서 동전을 넣으려는 권혜성의 손목을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는 권혜성의 맞은편으로 연한 핑크색 머리를 한 신해신이 윙크했다.
달그락, 지이잉- 손에 힘이 빠져 기계에 동전이 들어간 뒤였다.
- 두근두근 비트에 맞춰
마음을 움직이는 1픽셀의 Pink
신해신의 파트와 동시에 인형 뽑기 기계가 분홍색 연기를 내뿜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권혜성을 앞에 두고 세 남자는 태연한 모습을 유지했다.
얼마 가지 않아 오색찬란한 빛이 쏟아지며 어두컴컴하던 오락실의 배경이 변화했다.
스르륵, 솜사탕 같은 바닥과 벽면이 사방을 물들였다.
까맣고 하얗고 회색의 철통같던 게임들도 모두 뒤바뀐 이후였다. 하늘색, 노란색, 초록색, 분홍색, 현실에선 보기 힘들 법한 알록달록한 게임기들이 가득한 장면이었다.
벽 한가득 붙은 키치한 포스터와 사방에 걸려 있는 레트로한 장난감들은 마치 별세계인 것 같은 광경을 만들고 있었다.
어리둥절해하여 고개를 휘휘 젓는 권혜성의 손목을 낯선 인물이 잡아끌었다.
- 그게 모이고 모여 커다란 Heart가 됐을 땐
얼굴이 빨개져 펑 하고 불타올라
본래의 진한 고동색의 머리로 돌아간 윤명이었다. 한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멜빵을 다시 끌어 올리곤 얼떨떨하단 표정을 짓고 있는 권혜성을 메인 스테이지로 데려왔다.
‘Rail heart’라고 적힌 커다란 간판이 머리 위에 달린 곳이었다.
이지 리스닝 하기 좋은 미디엄 템포의 비트와 함께 오락 기기에서 나올 법한 멜로디가 입혀져 발랄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 타이틀 곡의 싸비 부분이었다.
멤버들 사이에서 주황색 헤어밴드를 한 이정원과 펌을 해 다소 곱슬거리는 머리 스타일의 문채민이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대형을 이룬 상태에서 후크 송으로 이루어진 파트를 불렀다. 기차놀이를 하듯 줄지어 선 자세로 간단하지만 유쾌해 보이는 안무를 추고 있었다.
- Rail heart oh- rail heart
Love me like that
Rail heart oh oh- 너도 알잖아
- 이건 Rail heart oh- rail heart
사랑이 쏟아져 내려 이어진 우리만의 Rail heart
- 감정이 줄지어 밀려 들어와
설렘이 겹치고 겹쳐 핑크빛으로 물들어
싸비 부분이 종료되자 얼떨결에 춤을 춘 권혜성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바로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문채민이 안 되겠다는 얼굴로 낮게 혀를 찼다.
권혜성까지 다가간 문채민은 등에 무언가를 메고 있었다. 손을 뻗어 주섬주섬 들어 올린 그것은 가방에 달려 있던 장난감 총이었다.
길게 이어진 호스를 정리하곤 한 손엔 총을, 다른 한 손엔 권혜성의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비장하게 몸을 돌려 어딘가로 달려 나갔다.
다른 멤버들은 각자 제스처를 취하며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신해신을 마지막으로 다시 배경이 변화했다.
정신을 차린 권혜성의 앞에 나타난 건 거대한 유리 부스였다. 문채민이 준 소형 장난감 총을 들고선 주변을 휘휘 돌아봤다.
푹신한 쿠션과 인형, 들쩍지근한 소품에 사방이 꽉 막혀 있는 상태였다. 언제 올라간 건지 한쪽 구석에 쌓인 인형의 탑 가장 윗부분에서 맑은 미성의 노랫소리가 이어졌다.
거기에 앉아 있던 것은 신해신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던 이정원이었다. 권혜성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파트를 한 구절씩 이어 불렀다.
- 네가 알아주길 기다리며 쌓인 그 마음이
어느새 나를 가득 뒤덮었어
- 온 세상이 Colorful해 난 그럼 또 깜짝 놀라
신해신과 이정원의 위로 대형 집게가 레일을 따라 움직였다. 권혜성과 멤버들이 들어와 있는 이곳은 바로 인형 뽑기 부스 안이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완료된 권혜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덜그럭거리던 집게에는 바구니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 속에서 몸을 구기고 있던 윤명이 권혜성을 향해 작게 혀를 내밀었다.
- 게임처럼 삭제하고 싶어도
Reset이 되지 않아 어쩔 줄 몰라 나
이건 내 욕심일까
윤명의 파트가 지나감과 동시에 권혜성의 뒤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어깨와 고개 사이로 스친 그것은 그대로 권혜성의 앞에 있던 유리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황급히 뒤를 돈 권혜성의 앞으로 권혜성이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디자인의 장난감 총을 든 강태오가 고개를 기울였다.
새삼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번 벽을 겨누고선 방아쇠 위에 얹어져 있던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 전달하기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너에게 내 사랑이
배달됐으면 좋겠어
Ping pong babe
픽- 탁- 총에서 쏘아진 건 총알이 아닌 작은 하트 모양의 구슬이었다. 권혜성을 구경하던 이유준이 벽면에 붙은 문구를 가리켰다.
[Rail heart]
당신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면?
하트를 갖고 탈출하세요!
이게 무슨 뜻이냐는 듯 놀랐다는 얼굴을 해 보인 권혜성이었다. 그런 권혜성의 앞에 홀로그램 창 하나가 띄워졌다.
거기엔 단발머리를 한 여자의 실루엣이 나와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 배경이 퍽 낯익었다.
거긴 바로 권혜성이 있었던 어두침침한 오락실이었다. ‘Rail heart’라고 적힌 인형 뽑기 부스 앞에 서서 권혜성이 봤던 것과는 다른 내용의 문구를 읽었다.
[Rail heart]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뽑아 주세요.
문구를 확인함과 동시에 권혜성의 머리 위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신해신과 이정원이 던져준 하트 모양의 쿠션이었다.
뽑기 부스 안에 있는 장난감 중 유일한 빨간색이었는데. 그걸 받은 권혜성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얼굴로 쿠션을 품에 안았다.
뒤에선 비장한 표정으로 가방에 달린 총을 뽑아 벽에 겨눈 문채민이 등장하고 있었다. 피식 웃은 이유준을 대동하고선 나란히 서서 랩을 했다.
- 오락기를 아무리 눌러 봐도 내 사랑은 일방통행
너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지루하고
또 두근거려 그러니까 어서 나를 원해 줘
- 언제나 너를 기다리며
작은 상자 속에서 마음을 원하고 있어
버튼만 누르면 뽑히는 사랑이니
준비가 되면 뒤돌아봐 Girl
언젠가는 네게 내가 가득하길 바라
이유준과 문채민 그리고 강태오가 겨눈 벽면으로 하트 모양 구슬이 쏘아졌다. 어느 순간 합류한 권혜성도 장난감 총을 장전하고 있었다.
개구진 미소가 권혜성의 얼굴 위로 올라온 타이밍이었다. 2절의 싸비가 시작됨과 동시에 레트로풍의 전자음이 깔렸다.
인형의 탑에서 뛰어내린 신해신과 이정원은 멤버들 사이로 합류했다. 윤명 역시 뽑기 기계에 걸려 있던 줄에 매달려 아래로 내려온 뒤였다.
- 두근두근 비트에 맞춰
마음을 움직이는 1픽셀의 Pink
- 그게 모이고 모여 커다란 Heart가 됐을 땐
얼굴이 빨개져 펑 하고 불타올라
- Rail heart oh- rail heart
Love me like that
Rail heart oh oh- 너도 알잖아
- 이건 Rail heart oh- rail heart
사랑이 쏟아져 내려 이어진 우리만의 Rail heart
돌아가며 파트를 부르고 춤을 춘 멤버들 너머로 금이 가기 시작한 유리 벽이 보였다. 싸비 마지막 구절에서 총을 겨눈 권혜성을 끝으로 사방에서 핑크빛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흰빛이 주변을 감싸 안은 뒤였다. 원래의 어둡고 컴컴한 오락실에 선 권혜성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홀로그램 화면 속에서 봤던 단발머리의 여자였다. 뒷모습을 보인 여자를 발견한 권혜성이 활짝 미소 지었다.
- 그 사랑이 이루어질 땐 우리의 레일이 온 세상을 정복할 거야
세상을 한 바퀴 뱅 돌아
Rail heart 그렇게 이어진 우리의 감정
손에는 인형 뽑기 부스에서 발견한 하트 쿠션을 든 상태였다.
그렇게 뿅뿅거리는 효과음과 함께 ‘Rail heart’의 뮤직비디오가 종료됐다.
색다른 장르의 노래에 팬덤 사이에선 근 화제가 된 이후였다.
근래 있었던 사건들과 더불어 대중적으로 듣기 좋은 멜로디의 노래가 흥행을 불러일으켰다. 하이사인의 최고 전성기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