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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73화 (272/328)

273화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숙소에 돌아올 수 있었다. 몇 시간 자지 못하고 다시 기상해야 했기에 멤버 모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나 역시도 자 보겠다며 침대에 누워선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룸메이트인 이정원이 탁상 스탠드의 불을 끄고 나서야 시야가 완전한 어둠에 물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눈을 감고 기다렸을까. 낮은 숨소리를 내뱉는 이정원을 확인했다.

“…정원아?”

“…….”

이 정도면 되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떴다. 상체를 일으키곤 근처에 올려 둔 핸드폰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2:12AM. 새벽임을 알리는 숫자 아래로 아까 미처 받지 못한 연락들이 쌓여 있는 걸 발견했다.

대부분이 SNS 메신저를 통한 메시지였는데. 1위에 대한 축하 및 간단한 안부가 온 모양이었다.

그중 눈에 띄는 인물들이 있어서 슬쩍 스크롤을 내렸다.

지원겸, 김환준 …그리고 서도경. 이 셋은 아군으로서든 묘한 경계에 있는 관계로서든 눈여겨봐야 할 인물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일단 자세한 사정은 일어나서 다시 파악해 보는 걸로 하고. 생각해 뒀던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시스템을 불러냈다.

30분 안에 기억 키워드를 열어 보고 오면 괜찮겠지. 제한 시간을 걸어 놓은 뒤였다.

[키워드룸 - full gauge 100%] - 기억 키워드 전환 가능 횟수: 1회

청량: 100%

이벤트가 성공할 무렵이면 자동으로 완료된 키워드 룸을 알고 있었다.

이게 시스템의 정체와 내가 이 시기로 돌아온 이유를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장치였으니까. 오늘도 나는 이걸 열어 봐야만 했다.

“기억 키워드 열어 줘.”

[‘청량’을 기억 키워드로 전환합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장면을 보여 주려나. 그 말을 끝으로 눈앞에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 속에 몸을 맡겼다.

* * *

‘뭐지?’

기존에 몸 담그고 있던 보육원 시설을 떠올리며 들어왔던 과거 시간대였다. 눈에 썩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보곤 서둘러 주변을 살펴봤다.

길게 늘어진 매대와 줄지어 서 있는 냉장고. 과자부터 소소한 생필품 아래로 붙어 있는 가격표까지. 여기는 편의점이었다. 그것도 길거리에 제법 흔하게 보이곤 하던 프랜차이즈 매장 말이다.

물건 가격표 옆으로 보이는 로고가 뭔가 낯설지는 않은 게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어서 그랬던 건가. 영 의아했다.

내가 왜 여기로 떨어졌는지도 모른 채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협소한 공간에 비집고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나가자 바깥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어? 신해신, 너. 여기서 알바하냐? 원래 저기 사거리에 있는 편의점에서 했잖아.’

‘뭐야. 너희였구나. 옮겼어, 시간대가 애매해서.’

홀린 듯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이 서 있었다.

해당 장면으로 현재 위치에 대한 정보를 파악했다. 이 편의점은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매장이었다.

‘갑자기 확 큰 시점으로 떨어졌네.’

당시의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보육원을 퇴소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자립하고자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라에서 독립 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몇 푼 쥐여 주기는 했으나, 그걸로는 제대로 된 방 하나 구하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일찌감치 원장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돈을 모은 거였지.

아마 여기도 내가 그 목적으로 구했던 아르바이트 장소였을 것이다. 하도 여러 가지 일을 해 봐서 가물가물했던 모양이었다.

회귀한 시점에선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시기이기도 했다. 어리긴 하나 현재와 비슷한 얼굴을 한 내가 보였다.

매장 조끼를 입은 상태로 카운터 안에서 고개를 돌리다가 손님으로 온 학교 친구 놈들을 보곤 인사를 하는 중이었던 것 같았다.

‘손님이 쟤네였네.’

봐도 봐도 신기한 과거 자신의 모습에 카운터 쪽으로 가까이 다가간 참이었다. 익숙한 모교 하복을 입은 손님들의 얼굴이 보였다.

‘진짜 부지런하다니까. 안 힘들어? 하여간에 더럽게 독해요, 자식.’

‘힘들다고 하면, 니들이 월급 줄래?’

‘에엥~ 저희도 돈이 없거든요, 선생님~’

‘됐으니까 얼른 물건이나 골라라. 여기 CCTV 있어서 잡담하면 나 혼난다.’

‘예, 예~’

이제 보니까 손님으로 온 녀석들이 나와는 친한 친구들이었다. 저번에 집안 사정이 몽땅 까발려졌을 적, 인터넷에 글을 올려서 도움을 줬던 그놈들 말이다.

장난기는 넘쳐도 속은 깊은 녀석들이라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에 대해 딱히 말을 얹지 않았다.

바쁘다는 것도 알고 있어서 그랬는지 적당히 물건을 고르곤 계산한 뒤 인사를 건넸다.

‘우리 간다, 신해신!’

‘해신쓰, 내일 봐~’

‘오냐, 가라.’

문에 붙은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다시 편의점 안이 고요해졌다. 손님이 오기까지 여유가 있어서였을까, 서 있던 내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음, 오늘은 좀 한가하네.’

나는 그런 고등학생 시절의 나를 카운터 너머에서 내려다봤다. 낮은 계산대에 턱을 괸 채 마주하고 있는 이 시간이 어색하면서도 퍽 재밌게 느껴지던 무렵이었다.

‘흐음, 1년 반이라…….’

핸드폰을 보고 있던 고등학생 때의 내가 뭔가를 계산하는 느낌으로 손가락을 접었다.

뭘 보고 있길래 저러는 건가 싶어서 액정을 살피니, 통장 잔고로 보이는 숫자와 함께 은행의 애플리케이션이 열려 있었다.

‘방학 때 풀타임으로 근무 뛰면 안 되진 않겠네. 거기에 지원금이 얼마랬더라…….’

아무래도 독립할 시기가 그리 멀지 않았던 무렵이었나 보다. 과거의 나는 앞으로 먹고 살길을 알아보고 있었다.

법으로 스무 살이 넘으면 독립해야만 했지. 1년 반 전이라고 하는 걸 보아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 것 같았다.

당시에는 스스로가 제법 어른처럼 느껴지곤 했었는데. 다시 보니까 애는 애였다는 감상이 이어졌다.

‘고생하네. 조금만 더 힘내라, 과거의 나.’

대학에 갈 마음이 없었던 터라 알바에 집중했었다. 뭐, 그걸 제외하면 적당한 성적과 교우 관계를 유지하던 평범한 학창 시절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스무 살 무렵에는 무사히 목표했던 돈을 모아서 보육원에서도 독립했다.

그때부터는 풀타임 근무든 뭐든, 자유롭게 일하며 바쁜 인생을 살았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년 정도 보내다가 들어간 곳이 스태프 자리였다.

업계 처우가 빡세긴 했지만 버티기만 하면 제법 오래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지.

어린 자신도 그 길을 걸을 거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도 못 해낼 건 없으니까. 힘을 내보라며 어린 자신에게 응원의 말을 던져 줬다.

그때 스르륵, 카운터에 앉아 있던 내 머리 위로 이상한 변화가 감지됐다.

[Bug] △※◇▷○□…….

저건 이전에 본 과거 기억에서 알게 된 버그의 존재였다. 저번에는 물음표에서 도형으로 변하던 걸 목격했었는데.

운이 좋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된 문구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반쯤은 기대되는 마음으로, 또 반쯤은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길 한참이었다.

[Bug] 잘ㅁ…….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순식간에 나타난 빨간색 경고문들이 내 주위를 감싸 안았다. 시스템의 방해에 깜짝 놀라서 카운터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경고문 너머로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뭐야, 기억 키워드 제대로 쓰고 들어왔잖아!’

억울한 기분으로 허공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알게 됐는데. 추측하고 있던 내용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방해받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던 찰나, 흐릿한 시야 너머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

‘…….’

그건 바로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자신이었다.

메모리 서칭 엔진을 사용하여 어린 이정원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가 흘렀다.

혹시 너도 내가 보여? 깜짝 놀라선 헛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묘하게 그때 당시와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됐다. 놀란 모습을 보이던 과거의 이정원과 달리 내가 너무도 차분하게 시선을 던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 간이 큰 녀석도 나를 보고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었는데. 놈의 반이 안 되는 담력을 지닌 내가 이리도 담담하다니 수상했다.

하물며 다른 이도 아니고 나 자신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떤 마음이 들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이 이 상황이 기묘하게만 느껴졌다.

주춤, 빨간 경고문에 둘러싸여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계산대 맞은편에 놓여 있던 매대와 부딪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앉아 있던 내가 눈을 깜빡이곤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뭐야… 너.’

‘뭐긴 뭐야. 너잖아, 신해신.’

기억 키워드를 사용하면 이곳 사람들은 날 볼 수 없는 거 아니었어?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른 일들이 벌어지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태평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덤덤한 목소리로 전해 주는 내용까지 하나같이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누가 그래, 과거 사람들이 널 못 본다고.’

‘너…….’

내 마음을 읽은 거구나. 과거의 자신과 이런 식으로 대화하고 있는 현실이 믿겨 지지 않았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말하지도 않은 사실까지 전부 알아낸 것처럼 보였다.

‘당연하지, 나는 너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데. 네가 나라고?’

말도 안 돼. 사람이 너무 놀라면 도리어 침착해진다고 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이제는 이성적인 판단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너, 시스템이지.’

‘어라? 벌써 알아챘어? 음… 완전히는 아니고, 반은 정답이야.’

역시, 내 질문에 대답한 내가, 아니, 시스템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재밌다는 듯이 씨익 웃는데 거기서 한숨이 쏟아졌다.

미친놈 아니야? 일단 나는 저런 식으로 빙글빙글 웃지 않았다. 게다가 저 능청스러운 태도… 살면서 한 번도 취한 적 없는 행동이었다.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낸 이후론 살짝 어이가 없었다.

우선 나는 저 녀석에게 아주 궁금한 것이 많이 있었다. 질문으로 따지자면 밤새야 할 수준이었다.

그래서 쫓겨나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내고자 계획했다.

‘신해신, 많이 성장했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조용히 물러섰을 것 같은데.’

‘조용히 하지.’

물론 상대방이 만만치 않기는 했지만 말이다. 내 속마음도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물러날 구석이 없었다.

하물며 이건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보상이었잖아. 길고 팽팽한 기 싸움 속에서 눈앞이 경고문을 밀어냈다.

나는 지금부터 내 모습을 한 시스템과 진솔한 대화를 나눠 볼 작정이었다. 가늠하고 있던 점들에 대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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