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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74화 (273/328)

274화

나는, 아니 내 모습을 하고 있던 시스템이 웃었다.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 같다는 추측이 정답이었던 것처럼 그저 가만히 기다려 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너도 허락한 거다? 굳이 입 밖으로 각오를 꺼내진 않았다.

조용히 마른침을 삼키며 놈에게 한 발자국 다가갈 뿐이었다.

파란색 계산대 위로 몸을 숙여 고개를 들이미니 지금보다 앳된 얼굴의 내가 가까워졌다.

반질거리는 눈동자 속으로 비쳐 오는 나 자신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이 있었어.’

‘내가 전부 대답해 줄 거라고 확신한 모양이네?’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 여기서 쫓아냈겠지.’

매번 내가 등 떠밀리듯 현실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꽤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는데 키워드 룸을 이용해서 과거 기억으로 들어왔을 때마다였다.

뭔가를 깨닫는 순간, 자의가 아닌 타의로 쫓겨나듯 현실에 복귀했었다.

물론 그 시간으로 알아낸 게 없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약간만 시간이 추가로 주어졌다면 더 큰 사실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제 보니까 그 배후가 너였었구나. 자유자재로 능력을 쓸 수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나를 이 공간에서 쫓아내고 있지 않던 놈이었다.

적극적인 모습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화란 걸 할 의지는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시스템은 내 말에 기묘하단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너, 내 얼굴로 그런 짓 좀 하지 말래. 이유준이나 서도경이 할 법한 행동들을 하니 희한하기 짝이 없었다.

‘오, 똑똑해졌는데? 아니지, 원래도 머리는 괜찮았어. 근데 성격이 사람을 위축시키고 있던 거란 말이야.’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기분 나쁘니까 내 모습으로 날 부정하지 마.’

‘흠, 과연 그럴까? 신해신, 넌 정말 태생부터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해?’

‘…….’

‘너도 알고 있잖아, 네 주변의 환경이 널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

‘아니야.’

이거 원, 원래대로라면 캐물어 보는 포지션은 내 쪽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시스템에게 휘말려 버린 듯했다.

논리적으로 대꾸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만은 않았다. 도리어 점차 설득당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이 참 가엽지?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으니까 그저 숨죽이고 있던 거였잖아. 이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은 인생이다, 나는 그렇게 불쌍하지 않다. 부모도 없고, 이름도 보육원 사람들에게서야 간신히 받아 낸 삶이지만,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묵묵하게 버텨 내면 반드시 살아갈 수 있을 거다.’

‘…너,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하나같이 정곡을 찌른 부분이었다. 팬들도 그렇고, 멤버들도 그렇고, 그들에게 난 늘 조용하고 담담한 사람이었다.

원래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났는걸. 본인 성격이 이런 걸 어떡해. 항상 대답하면서도 속은 썩 편치 못했다.

사실 나도 전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맞아, 난 참고 있는 거였다.

이렇게라도 둘러대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단 말이야. 내 삶에 만족한 것처럼 포장하고 있던 것이었다.

쾅- 그 순간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시스템이 내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래, 전부 인정해. 그래야 정답에 접근할 수 있어. 이상했지? 네 인생이. 불행이란 건 손쉽게 찾아오는 일 같은데, 유달리 너에게만 더 가혹한 것 같았잖아.’

‘…맞아.’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이걸 바라면 욕심인 걸까. 결국은 그게 스스로를 좀먹어서 수긍이 빠른 신해신이란 사람을 만들었던 거야.’

‘그래.’

난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야. 욕심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있어.

남들에게 좋은 일이 발생하면 질투도 나고, 나도 저것을 가질 수 있을까 탐내 보고도 싶었어.

이제는 시스템을 떠봐서 정보를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놈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 그게 곧 정답인 것만 같아 보였다.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찌푸리니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닦달하던 시스템이 웃었다.

얄밉다기보다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회한의 미소였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으로 파란 창들이 나타났다. 경보음을 울리던 붉은 경고창들을 하나둘씩 누르며 내 곁을 감쌌다.

[띠링-]

[띠링-]

[띠링-]

[암호가 해제되었습니다.]

마지막에 나타난 창 하나를 기점으로 주변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거센 바람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무렵, 시야가 뒤집히는 느낌이 나더니 다시 눈을 떠 봤을 땐 이상한 곳에 서 있었다.

여긴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어디가 천장이고 어디가 바닥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허물어진 이상한 방 안이었다.

어색함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발을 떼었다. 그 순간 조금 떨어진 허공에서 파란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SYSOP]

…SYSOP? 이름표처럼 보이는 사각 패널이 내 눈에 띄었다. 손에 닿지 않는 위치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음성이 들렸다.

‘안녕, 신해신.’

‘…너, 시스템이야?’

‘응, 이게 내 진짜 모습이야. 뭐, 그것도 반은?’

‘…반?’

‘킥킥, 그건 나중에 알려 줄게. 아니지, 사실 너도 은연 중엔 알고 있잖아~’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다소 기계음처럼 들리는 육성이었다. 공명하듯 주변을 웅웅 울리더니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아까는 내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랬던 건가. 말투가 갑자기 장난스러워졌다.

신이 난 것처럼 SYSOP이란 이름을 단 창이 내 주변을 날아다녔다.

‘드디어 널 이곳으로 불러낼 수 있게 됐어! 아까 거긴 조금 힘들었단 말이지~ 그 녀석, 묘하게 통제하는 구석이 있었거든! 아, 이거 욕이 되려나? 뭐 어때! 내가 기분이 좋은데!’

‘사담은 됐으니까 이제 날 여기로 부른 이유 좀 알려 줄래? 아까 어그로를 끌어서 열받게 한 건 용서해 줄게.’

전부 날 이곳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장치 같았으니까 말이다.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나를 위한 일이란 건 확실해 보였다.

SYSOP도 그걸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는 느낌으로 허공을 배회했다.

‘선물을 줄게.’

‘뭐?’

‘네 머리 위를 올려다봐.’

SYSOP의 말에 천장 쪽을 살폈다. 그리고 거기서 지금까지 추측하고 있던 사실 한 가지를 확인받았다.

[Bug] 잘못된 시작(악성)

이건 바로 내가 갖고 있던 버그였다.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 아주 갓난쟁이이던 시절부터 내 삶에 문제가 있었단 것을 말이다.

아마 시스템은 키워드 룸을 통해서 이걸 알려 주고 싶어 했던 것 같았다.

금언이라도 걸린 건지 직접 나타나진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내게 이 사실을 전달해 주고자 했다.

그나저나 악성이라니, 괄호로 처진 단어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벤트 때마다 걸린 버그들은 목표치를 달성하면 사라지기라도 했는데. 이건 태어날 적부터 달고 있던 것 같았으니까. 어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이름부터 살벌하네.’

‘그렇지? 악성이라니, 관리자 인생 처음이야. 저런 걸 단 인간을 본 건.’

‘…관리자 인생?’

‘어! 나는 관리자거든! 정확히는…….’

[SYSOP]

[SYSOP 0.1.9]

‘관리자 제로-원-나인. 드디어 제대로 내 소개를 해 보네. 반가워, 신해신.’

‘어… 그래.’

쾌활한 목소리의 시스템에게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해 줬다. …얘, 권혜성을 닮았네. 지나치게 활발한 것이 상대하는 내내 기가 쪽 빨렸다.

그나저나 관리자라는 게 뭔데? 숫자가 달린 걸 보면 이 녀석 하나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아까부터 반, 반 거리는 걸 보면 다른 놈이 더 개입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냥 대뜸 물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더는 겁먹을 일도 없어 보였다.

‘관리자 제로-원-나인이랬나? 넌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아니, 그 전에 사람이긴 해?’

‘오~ 알을 깨고 나오더니 변하기 시작했네. 아주 뿌듯해! 이러면 내가 또 말을 안 해 줄 수가 없지. 나중에 그 녀석이 알면 역정을 내겠지만. …뭐, 여기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네겐 다 말해 줄래.’

웅웅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을 때렸다. 이제야 이 망할 시스템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슴에 얹혔던 체기가 쑤욱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 뒤 거기서 들은 이야기는 참 가관이었다.

회귀한 지 얼마 안 된 초반에 알게 됐다면 화를 냈을 법한 내용이 이어진 것이었다.

‘인간들은 모르는 세계가 있어. 인간을 관장하고 그들이 체계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일을 하는 곳이지. 그곳에 있는 존재들은 모두 관리자의 이름을 달고 모두가 각자 맡은 파트에서 최선을 다해 그들을 관리해. 문제가 없다면 참 좋을 텐데… 사회생활을 해 본 넌 알잖아. 어딜 가나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고, 그걸로 골머리를 썩히게 된다는 걸 말이야. 우리 관리자들에게도 그런 골칫덩어리가 하나 있었거든. 그게 바로 너도 잘 알고 있는 존재, Bug야. 그들은 늘 우리 주변을 호시탐탐 노리며 관리자들이 관리하는 인간들의 삶에 관여하려고 했어. 관리자의 눈을 피해 인간의 몸에 기생하여 그들의 삶을 방해하는 거였지. 아주 작은 불행부터 삶을 뒤틀 정도의 큰 불행까지 종류는 다양한데. 하지만 보통은 그 선까지 가지는 않아. 버그 녀석들은 기생해야 힘이 세지는 존재거든. 기생 전에는 끽해야 조무래기 정도랄까? 관리자 선에선 처분이 가능한 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신해신, 넌 아주 운이 나빴어. 처음으로 등장한 악성 버그가 네게 붙어 버렸거든. 녀석은 힘이 너무 강해서 기척을 숨긴 채로 네게 붙어 태어났어. 그리고 그걸 처음 겪은 관리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널 인간 세상에 내려다 보냈고.’

‘…….’

‘그 뒤는 너도 예상이 가지?’

‘이름이 저 따위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던 거였어…….’

그러니까 이건 그 뜻이었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바이러스에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처럼, 나 역시도 관리자들이 본 적 없는 버그에게 당해서 인생이 뒤틀렸다는 것이었다.

잘못된 시작이라니. 어쩐지 이름부터 섬뜩하다고 느꼈다.

이건 내 삶이 시작점부터 모든 게 잘못이란 소리였다.

‘하필이면 나냐…….’

‘그러게, 하필이면 너네.’

시스템은 그게 많이 미안했던 것 같았다. 천장을 뱅뱅 돌던 아까와 달리 스르륵 내 쪽으로 이동해 왔다.

다소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 녀석도 그 뒷수습 때문에 이런 짓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원래의 너라면 다정한 부모 아래에서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겠지. 지금보다 좀 더 쾌활했을 거고, 성숙하긴 하지만 이 정도로 빨리 어른이 되지 않았을 거야. 철부지처럼 친구들과 거친 언행을 주고받기도 했을 것이고, 약간은 욱하는 성격도 갖고 있었을걸.’

‘…원래의 나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미안해. 널 관리하는 담당자로서, 그리고 관리자들의 대표로 사과할게. 이미 내려간 인간의 삶에 접근하는 건 우리의 권한이 아니었어. 그래서 인생에 개입하고 싶어도 차마 그러질 못하고 널 지켜봐야만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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