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거기까진 전부 이해하고 또 받아들인 사실이었다. 뭐, 내가 변종이라니까. 놈들을 탓해 봤자 의미가 없었다.
잠깐, 그러면 내 돈은 왜 뺏어간 거야? 거기서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지금까지 잊고 있던 부분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식은땀을 흘리는 것 같은 이름표가 보였다.
사실대로 불어라. 제로-원-나인. 뭔가 더 숨겨진 내용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까까진 휘말려서 여기 와 버렸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녀석을 탈탈 털 속셈이었다.
내 돈 내놔. 버그고 자시고 로또 당첨금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은 처우라고 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시스템도 식은땀을 흘릴 수가 있구나.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이름표 위에 도트 모양의 땀방울이 샘솟았다. 뽈뽈뽈뽈… 내 주변을 배회하는 제로-원-나인에겐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 내 속마음 다 읽었잖아. 그와 동시에 제로-원-나인이 움찔 위아래로 흔들렸다.
‘당첨금…….’
‘……!’
‘너, 거기에 대해서도 전부 알고 있지.’
‘…….’
‘당장 말해.’
솔직히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잘못된 시작이니 악성 버그니, 당첨금보다도 훨씬 무겁고 진중한 소재의 이야기는 술술 불어 놨으면서.
저 녀석들에겐 인간의 재화에 그치지 않을 부분인 돈 쪽에서 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 뭐가 더 있긴 하구나. 거기서 모든 사실을 눈치챘다.
확실히 로또 당첨금을 저당 삼아 아이돌을 시키려고 했던 것부터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과는 맞지 않았다.
인생이 어그러진 것과 아이돌 그리고 당첨금의 연관성이 뭐길래.
도망치려는 녀석을 보다 못해 팔을 뻗어 퇴로를 막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내 인생이 버그인지 뭐인지 때문에 난리가 났고, 네가 그걸 알려 주려고 날 여기로 불러들인 것까지는 이해했어. 근데 왜 로또 당첨금을 빼앗은 거야? 거기다가 아이돌을 시킨 것도 이상해. 물론 지금은 만족하고 있다지만… 원래 내가 이쪽에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길 바랐을 뿐인데.’
이런 기회가 또 있으리라곤 보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여기까지 오는 것에만 2년 가까이 걸렸다.
회귀한 후 현실을 받아들이고, 유어돌에 출연하여 오디션을 봤다. 힘겹게 7인에 들어가선 회사를 통해 별도의 데뷔 준비를 했다.
그렇게 간신히 연예계에 나오게 된 것이 벌써 언 1년이었다. 다사다난한 일들을 극복해 나가면서 시스템 녀석과 소통할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나가게 되면 다음 기억 키워드로 놈을 또 만나게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앞으로 보여 줄 장면의 방향도 유추가 되지 않는 마당에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게 되면 다른 의미로 한 치 앞이 막막했다.
그래서 더욱이 간절한 심경이었다. 내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는지 제로-원-나인이 잠시 고민하는 뉘앙스를 보였다.
‘…규정에 어긋나는데.’
‘어긋나지 않는 선까지만 말해도 좋아.’
‘하~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모두는 말 못 해 줘. 이 잠깐 때문에 신해신 너와 소통이 끊길 순 없으니까.’
‘응.’
그건 나도 바라지 않는 바였다. 규정인지 뭔지 때문에 여태까지 눈앞에 나타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나는 앞으로도 놈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는 건 썩 반갑지 않았다.
‘네가 악성 버그에 걸려서 인생이 틀어진 건 안타깝게 생각해. 그런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너의 인생에 관여할 권한이 없었어.’
‘…권한이 없었다고?’
이건 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제로-원-나인의 말에 따르자면 나는 평생을 버그에 걸려서 살아야 하는 삶이라고 했다.
‘시스템 관리자 법이 그래. 우리는 어디까지나 「태어나기 전」 인간을 관장하는 것이지, 그 이후론 모든 영역에서 손을 떼야만 해. 사실 법 문제가 아니라 그럴 능력 자체가 없어. 인간이 생명으로서 사명을 지게 되면 더 이상 우리의 힘이 통하지 않게 되거든. 그래서 신해신 네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던 거야.’
‘그거 회귀 전을 말하는 거야?’
‘회귀 전이든, 후이든. 너를 만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잖아.’
확실히 제로-원-나인은 회귀 후에도 시스템 창으로 나타난 걸 제외하면 직접적인 말 한마디를 한 적이 없었다.
대화 의사가 없는 거라고 판단했는데, 이제 보니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럼 나와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지? 여기서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능력이 닿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게 나를 회귀시켰으니까 말이다.
뭔가 나는 모르는 일이 잔뜩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너에게 특수 장치를 하나 걸었어.’
‘…혹시, 그게 로또야?’
‘너, 진짜 눈치 빠르다.’
헛웃음을 내뱉은 제로-원-나인의 위로 느낌표가 하나 떠올랐다. 놀랐다는 듯한 그래픽 표정이 나타나고 그와 동시에 정답이라는 것처럼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사실 이것도 놈에게서 들은 말을 통해 추측한 것이었다.
잘못된 시작이라는 끔찍한 이름의 버그에 걸린 놈이 로또라는 인생 최대의 행운에 당첨된 것이 이상했었다.
그 시점을 기준으로 회귀했는데. 암만 봐도 그게 열쇠잖아.
불행한 삶에서 한 줄기 빛과 같았던 당첨이 틀어진 길을 되돌리기 위한 장치였다니.
여러모로 참 기분이 묘했다.
그때 제로-원-나인에게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길게 이어진 빛은 내 머리 위에 멈춰 섰고, 이내 꾸물꾸물 글씨의 형상을 띄었다.
[Bug] 주어져선 안 될 행운(특수)
‘버그……?’
새롭게 생긴 문구는 버그였다. ‘잘못된 시작(악성)’과 달리 금빛으로 물들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새빨갛게 빛나는 ‘잘못된 시작(악성)’과 나란히 놓인 또 다른 버그에 머리가 복잡했다.
특수는 또 뭔데. 이제 버그라면 지긋지긋할 노릇이었다.
‘지긋지긋해도 어쩔 수 없어. 저게 너의 인생을 풀어 줄 유일한 구멍이었으니까.’
‘자세히 좀 말해 봐. 보여 주는 걸로는 하나도 이해가 안 되잖아.’
‘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내게 또 다른 난제를 안겨 준 제로-원-나인이 말을 길게 끌었다.
고민하는 느낌으로 머리 위를 빙빙 날아다니더니 이내 내 얼굴 바로 앞에 멈춰서서 커다란 홀로그램 창으로 변했다.
나타난 화면에는 흰색의 커서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얼마 안 가서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긴 문구가 나열됐다.
도형과 화살표의 연속을 보아 이건 관계도였다.
‘설명해 줄게. 자, 여기 이게 바로 너야.’
홀로그램 창 가운데에 그려져 있던 인간의 형상이었다. 깜빡거리는 빛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자 내 이름이 떠올랐다.
[신해신]
‘그리고 너에겐 악성 버그가 걸려 있어.’
빨갛게 떠오르는 x자 표시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여기까진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원래라면 계속 이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겠지. 쳇바퀴처럼 구르고, 또 구르고, 첫 단추가 잘못 꿰인 상태로 다시 반복해야 했을 거야.’
‘…반복?’
내 말에 제로-원-나인이 낮게 웃었다. 여기까지는 말해 줄 의향이 없었던 걸까. 다시금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는 그걸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어. 그래서 직접 관여하기로 했지. 하지만 아까 말했잖아? 우리의 힘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인간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 결국 찾아낸 방법이 바로 이거야.’
제로-원-나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빨간 x자 표시 위로 금색의 o자 표시가 생겼다. x와 o가 공존하는 인간의 형상에 마음 한구석이 복잡해졌다.
‘특수 버그, 이건 외부로부터 들어온 버그가 아니야. 우리 관리자들이 만들어 낸 버그지.’
‘…너희가 만들었다고? 이걸?’
‘응, 연구부터 생성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 너에게 해가 되면 안 될 테니까 각고의 테스트를 거쳐서 내려보낸 결과물이야.’
‘그럼 내게 버그를 하나 더 걸리게 했다는 소리잖아.’
‘엇, 너 지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이건 말만 버그지, 그런 나쁜 게 아니야!’
제로-원-나인이 서둘러서 설명을 덧붙였다.
나 나쁜 생각 안 했는데. 로또와 당첨된 것에 이어 이름부터가 잘못된 시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느낌의 버그였다.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내젓자 안도했다는 듯한 제로-원-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어져선 안 될 행운, 이게 바로 신해신 네 저당금의 정체야. 우리가 힘을 써서 네게 행운을 선사했어. 관리자로서의 미안함이기도 하고 또 너의 인생에 개입하기 위한 발판이었지.’
‘발판?’
‘응, 관리자가 왜 인간이 태어나면 더 이상 연관되지 못하는 줄 알아? 그건 바로 관리자와 인간 사이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이야. 이미 끊어진 길은 다시 복구할 수가 없어. 그래서 네게 새로운 길을 만들었어. 그게 바로 너에게 준 특수 버그야. 관리자의 힘이 닿는 순간, 너도 더 이상 평범한 인간만은 아닌 게 될 테니까.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네게 능력이 통하게 만드는 방식이지. 그것도 초반에는 불안정해서 말 한번 제대로 걸지 못했지만 말이야. 이벤트를 여는 게 최선이었는데, 네가 잘해 준 덕분에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게 됐어. 도움이 될 만한 능력들을 하나씩 오픈하며 너에게 접근을 했던 거야.’
‘…박스 상점, 프리미엄 아이템, 키워드 룸, 스폐셜 스킬 트리 통합? 히든 보상?’
‘맞아, 전부 그런 것들이지.’
제로-원-나인 측에선 내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든 연관이 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럼 악성 버그를 해결하면, 로또 당첨금도 사라지는 건가? 이미 반환된 돈이 있었기에 의아했다.
곧바로 제로-원-나인이 궁금해하던 사실을 정정해 줬다.
‘사라지지 않아. 그건 온전히 너의 몫인걸. 우리가 쓰고자 했던 건 버그라는 매개체일 뿐이야. 거기서 얻어낸 보상은 전부 현실과 관계가 있어. 그러니까 그 돈은 모두 네 거야. 네 삶을 뒤틀었는데 이 정도는 보상도 뭣도 아니지.’
‘그럼 이벤트 종료 시에는 악성 버그와 특수 버그만 사라지는 거야?’
‘특수 버그는 사라져. 하지만 악성 버그의 유무는 아직 모르겠어……. 우리도 최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있는데, 확신은 하지 못한 단계거든.’
일단 최악은 아닌 상황이었다. 이벤트를 무사히 성공하면 로또 당첨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확실친 않지만 악성 버그도 건드려 볼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대충 정리되는 사항들에 마지막으로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어떻게 보면 모든 일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아이돌이었던 거야?’
‘흐음~ 너 묘하게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 하긴 그 모습만 봐도…….’
여기에는 내가 아직 알아선 안 되는 사실들이 걸쳐져 있었나 보다. 콧소리를 내던 제로-원-나인이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