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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76화 (275/328)

276화

‘녀석이 알기 전에 아주 약간만 힌트를 던져 줄게. 네가 악성 버그를 통해서 잃은 것에는 「사랑」이 있어.’

‘사랑?’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야. 인간적인 사랑, 네가 받고 자랐어야 할 사랑. 근데 너는 모든 게 뒤틀리면서 그 사랑의 수치가 너무도 적었어. 그래서 우린 네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미션을 주고자 했어. 그게 바로…….’

‘…아이돌이었던 거구나.’

‘그래. 대중들만큼 사랑의 수치가 높은 대상은 없었으니까. 그보다 더 큰 힘은 가족, 그중에서도 부모에게 있지만 넌…….’

‘…괜찮아. 더 말 안 해도 돼.’

거기서 모든 일들의 시초에 대해 알게 됐다. 제로-원-나인은 어떻게든 내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주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처음엔 그 녀석이 반대해서 많이 힘들었는데. 이젠 누구보다 만족하는 것 같으니까 다행이야.’

‘…그 녀석?’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나오는 존재 하나가 거슬렸다. 도대체 그건 또 누구야. 눈치를 살피자 제로-원-나인이 말을 끌었다.

‘흐, 흐음… 거기까진 좀…….’

제로-원-나인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이미 알려 줘선 안 될 선까지 말을 했다며 이 이상은 무리라고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조금만 더 풀어 봐.

제로-원-나인의 뒤꽁무니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악성 버그가 사라질지도 확실하지 않다며…….’

‘…….’

‘그럼 난 개고생만 하는 거일 수도 있잖아. 아, 물론 너나 그 녀석이라는 놈의 노력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해. 내가 운이 나빴던 케이스였다며. 관리자 측에서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거였잖아. 고마워.’

‘…하여간에 영악하기는. 내가 잠시 잊고 있었어, 이런 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뭐?’

적당히 아부성 발언을 하며 놈의 뒤를 한참 따라다녔다. 침묵이 길어지는 걸 보아 어느 정도 수가 통하는 것 같았는데.

우뚝 제자리에 멈춰선 제로-원-나인이 영문 모를 헛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주변을 돌아봤다. 영문이 적힌 패널이 좌우로 움직이는 수준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스르륵 제로-원-나인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내 삐삐거리는 작은 알림음이 들리며 제로-원-나인이 변했다.

이건 아까 봤던 홀로그램 창이었다. 사이즈는 훨씬 작았지만 커서가 깜빡거리는 것이 동일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타각거리는 타자 소리와 함께 홀로그램 창 위로 무언의 글자가 적혀졌다.

…힌트를 주려는 건가? 아무래도 정공법이 통한 모양이었다.

‘…진짜 비밀이야. 아직 네가 알 단계는 아니란 말이야.’

‘응, 약속. 입 꾹 다물고 있을게.’

사실 말할 사람도 없지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제로-원-나인을 바라봤다.

「원래대로라면 우리 시스템 관리자들은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못해. 너의 인생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특수한 상황이 겹쳤기 때문이었어.」

‘…특수한 상황?’

「쉿, 쉿! 들키면 잔소리로 안 끝날 거라고. 하여간에 담당자는 나인데… 이거 원, 완전히 전세가 역전됐잖아.」

대충 흘러가는 내용을 보아 들키면 안 된다는 존재가 바로 제로-원-나인이 말하던 그 녀석이란 놈 같았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 아니지, 시스템이길래. 거기서 호기심이 샘솟았다.

일단은 좀 더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하려던 찰나였다.

「내가 너와 만날 수 있었던 건 거래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 거래가 뭐냐면…….」

길게 늘어지는 문구를 확인하는데, 갑자기 삐익- 하고 귀를 때리는 이명이 들리고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이게 뭐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제로-원-나인이 허둥지둥 변신했다.

홀로그램 창에서 다시 원래의 시스템 관리자 넘버가 적힌 패널로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다급하게 머리 위를 빙빙 날아다니며 소리쳤다.

‘으악, 들켰다! 이런……!’

‘뭐가 들켰다는… 윽…….’

놈을 향해 현재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려고 했다. 고개를 들자마자 밀려드는 두통에 자동으로 한쪽 무릎이 굽혀졌다.

내 위에서 제로-원-나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신해신… 미안해, 이제 더 이상 얘기해 주지 못할 것 같아. 조금 더 알려 주고 싶었는데. 그 녀석이 찾아왔어.’

‘그 녀석이 도대체 누군데!’

전신의 힘이 빠지며 탈력감이 밀려들었다. 남아 있던 힘을 끌어모아 한마디를 외치자 공중으로 높게 치솟은 제로-원-나인이 불투명해졌다.

놀란 마음을 추스릴 새도 없이 제로-원-나인 뒤에 있던 벽이 일렁거렸다.

당황하여 발밑을 내려다보자 우윳빛으로 빛나던 공간이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언젠가 너도 그 녀석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될 거야. 그때까지 그리 많이 남지 않았어. 녀석은 네 주변에 있어…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그 말을 끝으로 제로-원-나인의 형체가 사라졌다.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마지막 목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나는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하는 거지? 공포도 잠시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그때였다.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음성이 들린 것 말이다.

‘이만 돌아가, 어서!’

이명이 들리는 귓가가 아닌 뇌 속에서 공명하는 목소리였다. 네가 혹시 그 녀석이야? 물어보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 제로-원-나인이 아니구나. 아무래도 그 녀석이라는 놈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시스템 주제에 지나치게 활발하던 녀석과 달리 다소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모두가 널 찾고 있어! …조금만 더 힘내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약간은 다정해진 것 같은 조언이 이어졌다.

왠지 익숙한데… 그 감상을 끝으로 발밑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흰색의 공간에 균열이 생긴 것이었다. 갈라진 벽 너머는 온통 새까만 어둠이 가득했다.

두려움도 잠깐이라고 어느덧 몸이 바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렇게 눈앞으로 밀려드는 암흑에 몸을 맡겼다.

* * *

“…신! …해신!”

“…….”

“야! 신해신!”

“…어?!”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흔들리는 몸에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부스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눈앞으로 여러 명의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흐린 정신에 넋을 놓자 곁에 서 있던 놈 중 하나가 울먹거렸다.

“혀엉……!”

“…권혜성?”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건지 말끔한 복장을 하고 있던 권혜성이었다. 내 부름에 냅다 침대 위로 몸을 날려 엎어지듯 나를 끌어안았다.

영문을 몰라 하는 나를 앞에 두고 날카롭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목에 수건을 건 게 누가 봐도 씻다가 뛰쳐나온 듯한 몰골의 이정원이었다.

“정원아, 이게 무슨 일이냐.”

“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안 좋다고 말을 하든가.”

“몸?”

이정원의 역정을 참 오랜만에 봤다. 직진하는 경향이 있긴 했어도 이렇게 대놓고 화를 낸 적은 없었기에 신기하단 감상이 앞섰다.

잠이 덜 깨서 그랬던 것일까.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머리맡에 서 있던 다른 인물 둘이 몸을 바로 세웠다.

하나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구기고 있던 이유준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야 안도하겠다는 얼굴로 뒷머리를 벅벅 긁어 대는 강태오였다.

강태오는 피곤하다는 듯 콧잔등을 누르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제일 침착한 놈답게 설명부터 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형, 쓰러졌었어.”

“…뭐?”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스케줄이 종료되고 잠이 든 이정원을 확인한 뒤 천천히 열어 봤던 키워드 룸이었다.

현실로 돌아와 봤자 시간 차이가 크지 않아서 종료된 이후 잠들 계획을 짜 놨었다.

그런데 내가 쓰러졌다니. 중간의 공백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까 왜 밝지? 멤버들 너머로 보이는 창가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너, 내가 깨웠었어. 스케줄 때문에 나가 보자고. 비몽사몽한 것이 말도 없고, 상태가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분명 거실까진 스스로 걸어서 나갔다고.”

“…내가 나갔다고?”

이정원의 신경질 섞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내 반응을 확인한 윤명이 멍한 얼굴로 제 입가를 틀어 막았다.

“…해신이 형, 기억 못 하나 봐.”

“형, 죽지 마!”

“아, 혜성이 형은 왜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해!”

문채민의 외침에 번쩍 정신이 차려졌다. 나 몽유병인가? 이전에 키워드 룸을 사용했던 것과 너무도 다른 사태의 연속이었다.

“형, 거실로 나오더니 그대로 픽하고 쓰려졌어. 그나마 근처에 유준이 형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바닥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니까.”

“이유준이?”

“…하.”

이어지는 문채민의 설명에 이유준 쪽을 돌아봤다. 놈은 지쳤다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제로-원-나인. 너, 밖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은 안 했잖아.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었다.

시스템 관리자와 만났던 탓일까. 시간의 흐름에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중간에 의식이 있었던 건? 추측하거니와 그 하얀 공간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일단 무마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스케줄은 어떻게 됐지. 모두 출근 준비를 하고 있던 걸 보면 아직 늦지는 않은 듯했다.

“시간은? 나가 봐야지.”

“…하, 됐다. 119 부르려다가 말았어. 신해신, 넌 오늘 병원부터 가 봐. 이미 팀장님들한테도 얘기 다 들어갔거든.”

“어?”

“해신이 형은 오늘 휴가. 기사화되거나 일이 커지는 건 형이 싫어할 것 같아서, 우선은 가벼운 병가 정도로만 얘기해 놨어. 대표님 승인도 떨어졌고, 오늘은 얌전히 병원 가서 진료 받은 뒤 보고하고 푹 쉬래. 아, 동행은 박 매니저님이 해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혼자 갈 생각은 하지 말고. 우리 단체 스케줄은 오 팀장님이 가 주신다고 확정까지 난 뒤야. 이제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늦었나 보군. 허리에 매달린 권혜성을 추슬러 일으켜 세웠다. 윤명에게 인계하듯 떠넘기자 놈을 받아 든 윤명이 권혜성을 내팽겨쳤다.

“악!”

“권혜성, 넌, 무겁게 환자한테 무슨 짓이야…….”

“형들은 그만 좀 해. 해신이 형, 형은 푹 쉬고 무슨 문제였는지 알게 되면 꼭 알려 줘야 해?”

영락없이 휴가가 생긴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윤명, 권혜성, 문채민. 너희 먼저 나가서 준비하고 있어.”

“치사하다! 나도 해신이 형 옆에 있을래!”

“씁.”

“…알겠어, 나가면 되잖아. 나가면.”

“형들은?”

“우리도 금방 나갈게.”

이정원의 정리하에 막내 삼인방이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남은 건 이정원과 이유준 그리고 강태오 셋이었다.

침대에서 멀리 떨어져 서 있는 강태오를 제외하고 이유준과 이정원에게서 매서운 눈빛이 쏟아져 나왔다.

야, 너희 스케줄 안 가냐? 병원에 가는 것보다 얘네를 처리하는 일이 더 두려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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