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진 빠진다…….”
웅성거리는 소음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새하얀 벽과 깔끔한 내부, 상호명이 가득 적힌 환자복들이 보이는 이곳은 서울 중심부에 있는 한 대형 대학 병원이었다.
시스템을 만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 반응으로 멤버들 앞에서 실신했었다.
몸에 탈이 난 것 같지는 않았으나, 스케줄 가기를 만류하는 멤버들에 의해 병원에 검진을 온 상태였다.
멤버들을 데리고 떠난 오병은을 대신하여 박재민이 옆에 있었다.
밖으로 새어 나갈 소문을 막기 위해 작은 곳이면 충분하다고 일러 뒀건만…….
어찌나 신신당부를 받았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검진을 받아야 했다.
남은 건 결과를 듣는 일뿐이라며, 복도 한구석에서 대기 중이었다.
음료수를 사러 가겠다며 잠시 자리를 뜬 박재민을 기다리다가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을 매만졌다. 평일 오전이었던 탓일까 생각보단 무탈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얼굴의 반을 가린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리며 벽에 걸린 TV를 살펴봤다.
녀석들, 지금쯤 녹화하고 있겠지. 리더로서 활동기 초반부에 민폐를 끼친 것이 미안할 따름이었다.
“뭐, 동행하고 싶어도 못 했겠지만 말이야.”
사실 이건 내 의사가 아닌 멤버들의 의견이었다.
문채민과 윤명 그리고 권혜성이 먼저 떠난 방 안에서의 일이었다.
침대에 앉아 있다가 이정원과 이유준에게서 눈빛 공격을 받았다.
강태오 도와줘… 멀찍이 떨어져 있는 녀석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지만 딱히 소용은 없었다.
도리어 한 번쯤은 당해 봐야 한다며 잔소리 섞인 핍박만 더 들어야 했다.
‘형은, 당해도 싸.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가만 보니까 저놈은 내가 코로 줄줄 피를 흘리는 것도 본 경험이 있는 녀석이었다. 손을 내밀 사람을 잘못 골랐다며 가볍게 고개를 내저어야만 했다.
그때, 이유준에게서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으나 머리가 아프단 느낌이 강했다.
‘형, 제발 좀…….’
‘어, 어?’
‘솔직하게 말해 주면 안 되는 거야?’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렇게 흐르는 거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이유준의 모습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우, 우냐? 설마…….
눈물을 흘리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이유준은 오늘 일로 크게 놀란 것 같았다.
하긴, 내가 엎어졌을 때 받아 준 것이 얘라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나는 말할 대상을 계속 잘못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한 마음에 안절부절 이유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 미안. 병원 꼭 가 볼게.’
덩치가 큰 놈이라 팔이 닿을까 했더니 손이 닿기 쉽게 몸을 숙여 줬다.
‘…진짜지? 오늘 받을 수 있는 검사는 다 받고 와야 하는 거야?’
‘어, 어…….’
내 대답을 들은 이유준이 그제야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평소처럼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단 무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기서 내가 한 방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 날 속였어?’
‘화난 건 진심이야. 형은 항상 우리 생각만 하잖아. 정작 자기 몸은 챙기지도 않고.’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좀 깨달으라고 하는 얘기야. 제발 남들 생각하는 만큼 본인도 챙겨. 우리, 그룹 아니었어?’
이유준의 말에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강태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자기는 관련이 없는 척 발을 빼고 있었으면서. 이유준의 말이 정답이라는 것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낀 자세에서 터벅터벅 발걸음을 돌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유준과 말이 없는 이정원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더니 침대 위에 떡하니 제 팔을 올려 몸을 숙인 채 경고했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예전에 그 일 다 얘기할 거야.’
‘…야!’
‘예전에 그 일? 강태오, 너. 뭐 알고 있지.’
이건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사태였다. 데뷔 쇼케이스 때 겪은 사건이라 지금은 꽤 지난 일이었지만 말이다.
잠깐 기절한 걸로도 이 난리를 피우는 멤버들인데. 피를 봤다고 이야기하면 녀석들의 과보호가 훨씬 심해질 게 분명했다.
아니, 그다음부터는 뭐든 사사건건 개입하려고 들겠지.
시스템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일을 행하고 있는 내게는 자유가 무조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강태오의 입이 잘못 열리면 모든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반드시 그것만큼은 발설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절박한 심경에 침대 위에 올라가 있는 강태오의 손을 꾹 잡아 눌렀다.
입을 다문 채로 고개를 젓자 평소와 달리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강태오가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약속해. 이유준이 말한 것처럼 제대로 검사받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얘기하겠다고.’
‘그럴게.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대답을 들은 강태오는 본론이 끝났다는 듯한 뉘앙스로 다시 몸을 바로 세웠다.
‘그 일이 뭔데. 넌 뭘 알고 있는 거야.’
‘약속했으니까 지금은 말 안 해. 더 캐묻지 마라.’
이유준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으면서도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때, 어디선가 팔이 뻗어져 나왔다. 아까부터 조용히 있던 이정원이었다.
양손을 들어선 침대에 앉아 있는 내 어깨를 꽉 쥐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살벌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 내가 널 못 알아봐서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지금도 충분히 의심하고 있어. 아니, 사실은 확신에 가까워. 그런데 그걸 내 입으로 먼저 꺼내고 있지 않았던 건, 네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서였어.’
‘이정원, 너…….’
이정원의 이야기는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다. 메모리 서칭 엔진. 과거 이정원과 만났던 그때 당시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집요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더니, 얼마 가지 않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던 이정원이 떠올랐다.
내가 아니라고 잡아떼어 놈도 지친 거라고 보고 있었는데. 지금 하는 말을 들어 보니 포기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도리어 놈은 그때의 일에 대해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와 만났던 기억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인 듯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모르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제대로 된 기억을 갖고 있었던 건 이정원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강태오나 이유준은 모르고 있는 부분이란 뜻이었다.
그걸 여기서 발설한다는 건 놈들에게 들켜도 상관없냐는 협박과 같은 거였다.
공포도 이런 공포가 없네. 심지어 저기 서 있는 멤버 중 한 명인 강태오도 위험 분자에 속해 있었다.
강태오 역시 과거에 나를 본 것 같다고 말을 해 준 전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이정원보단 훨씬 흐리고 연약한 기억이라 본인이 착각했다고 넘긴 것 같긴 했지.
그래도 내가 묻어 둔 비밀들이 칼이 되어 나를 위협한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하나도 버거운데, 셋이라니. 그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병원!’
‘…….’
‘병원, 다녀올게! 그, 그리고 비밀도 안 만들게. …이번에 그랬던 건 진짜 나도 몰라. 피곤했었나 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검사받고 올 테니까. …제발 좀 나가 주면 안 되냐.’
구차하더라도 당시의 내겐 이게 최선이었다. 이정원의 소맷자락을 붙잡아 어깨에 올라간 손을 내리니 나와 눈을 마주친 이정원이 졌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약속 꼭 지켜. 박 매니저님한테 부탁해 놓을 거야. 신해신 다른 데로 세는지 안 세는지 확인해 달라고.’
‘…너, 진짜 사람 못 믿는다. 알았다니까. 병원 가서 인증 샷도 남길게. 그럼 됐지?’
‘정원이 형은 안 그러는 척, 해신이 형한테 잘 져 주네. 형, 나도 같이 확인할 거야. 난 안 봐줘.’
‘아, 제발… 알겠으니까 다 나가.’
이유준의 마지막 당부까지 들은 이후론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제발 늦기 전에 스케줄부터 가 달라며 빌고 나서야 한숨을 내쉰 강태오를 시작으로 놈들이 떠났다.
그렇게 모든 검진을 끝낸 뒤 핸드폰으로 사진 하나를 발송해 줬다.
애들을 달래고자 약속했었던 병원 방문 인증 샷을 보낸 것이었다.
멤버들이 들어가 있는 단체 대화방에 이미지를 올렸는데도 숫자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아직 한참 녹화 중인가 보군. 쉬는 시간이나 되어서야 볼 수 있을 테니까 잠깐의 여유가 생긴 참이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음료수를 사 온 박재민과도 합류했다.
목을 축이고 벽에 붙인 전광판을 바라보는데, 거기에 내 이름이 떠올랐다.
[신해신]
턱에 걸린 마스크를 다시 끌어 올리며 박재민과 함께 들어간 진료실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에겐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크게 이상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만, 환자분의 경우에는 위 쪽에서 염증이 약간 발견됐어요. 뭐, 이정도야 직장인 분들에게도 곧잘 있곤 하는 경미한 위염이라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입니다. 커피 줄이시고, 잠 푹 주무시고. 아,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란 것도 잘 알고 계시죠? 피검사 결과는 내일 오전 중 문자 메시지로 발송될 예정이니 확인해 보시고 문제가 있다고 하면 병원에 다시 방문해 주세요.”
“네.”
예상대로 현재 나는 나쁘지 않은 몸 상태였다. …봐, 갈 필요 없다니까. 이야기해 줄 대상을 잃은 말이 혀끝에 맴돌았다.
의사에게선 잔소리 비슷한 조언 몇 가지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건 남들도 듣는 기본 상식 같은 거였다.
운동해라, 햇볕 쬐라, 종합 검진 받았을 정도면 어디 이상 증세가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 꾸준히 검사받아라, 아프면 참지 말고 병원에 꼭 방문하고, 위염 증세가 악화 되지 않게 잘 관리하라.
알겠다며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박재민에게서 이만 나가 보자는 신호를 받았다. 아이돌을 잘 모르는 나이대의 의사가 담당인 게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시 병원 복도로 나온 이후였다. 머쓱한 얼굴로 박재민에겐 동행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별게 아니었는데, 고생시킨 게 되어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아침에 얼마나 놀랐는 줄 아세요? 쓰러지시다니… 아무튼 보고는 제가 올리겠습니다. 멤버분들 놀라셨을 테니까 그쪽에는 해신 씨가 직접 얘기해 주세요.”
“네.”
박재민의 안내하에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이제야 좀 안심하겠다며 밴에 올라타려던 무렵이었다.
지이잉- 길게 이어지는 핸드폰 진동에 고개를 기울였다. 벌써 녹화가 끝났나? 이상함을 느끼며 액정을 확인했다.
“출발합니다.”
“네? 네.”
박재민의 질문에도 어영부영 대답한 채 읽은 메시지였다.
[지 말만 하는 인간]
…지원겸? 이건 지원겸의 연락이었다. 크라운 게임 이후로는 각자 컴백이다 뭐다 해서 바빠 한동안 보지 못했던 준 아군이었다.
[신해신, 너 아프다며? 병원 다녀왔냐. 하여간에 그러니까 몸 좀 그만 막 쓰랬지. 내가 너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 아무튼 심각한 거 아니면 얼굴 좀 볼래? 심각한 거면 병문안을 가고.]
이건 또 어디서 들은 거야? 소식도 참 빠른 사람인 듯했다.
분명 내부에선 외부로 유출하지 않기 위해 쉬쉬하고 있었을 텐데.
…멤버들인가? 용의자를 추려 봤으나 딱히 이렇다 할 사람이 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보이는 내용에 입이 떡 벌어졌다.
[MXP가 이번엔 우리 쪽을 건드려서. 내가 정보를 좀 받은 게 있거든. 너한테도 공유해 줄게.]
아무래도 이건 가 봐야 할 사항 같았다.
아파서 스케줄도 쉬는 마당에 바깥으로 도는 건 안 될 일이겠지.
지원겸에게는 우리 숙소의 주소를 찍어 보내 줬다. 다른 곳으로 새지 않았으니까. 변명할 거리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