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돌고 돌아 힘겹게 도착한 숙소 안이었다. 박재민에게는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정말 혼자 있으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물론이죠. 보고만 잘 부탁드립니다. 검사 결과도 나오는 대로 바로 알려 드릴게요.”
그냥 가기에는 찜찜했는지 뒤를 돌아보는 박재민의 등을 떠밀었다.
내가 이러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원겸, 그 인간이 지금 여기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깥으로만 나돌지 않으면 된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 사람을 숙소로 불러들였다.
다른 인간도 아니고, 지원겸인데. 거실에서만 얌전히 대화를 나눈다면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무려 MXP에 대한 이야기였다.
뭔가를 알게 됐다고 했지. 멤버들을 위해서라도, 앞으로의 순탄한 아이돌 생활을 위해서라도 오늘 만남은 반드시 내게 필요했다.
그렇게 박재민이 떠난 문 앞에서 내려놓은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액정을 터치해 보니 언제 보낸 것인지 지원겸의 확인 문자가 와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라고 했지? 10분이면 도착하니까 맞춰서 내려와. 우리도 이목은 끌고 싶지 않거든.]
…우리? 거기서 잠시 의아하단 감상이 들었다. 왜 복수야? 10분이면 도착한다고 해서 오래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벽에 걸려 있는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쓰고 패스워드 키를 챙겨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떨어지는 숫자를 보니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이 떠올랐다.
멤버들에게 시달린 이후에는 병원에서 진료받느라 시스템에 대한 부분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4번째 키워드 룸을 통해서 시스템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이 틈에 정리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고등학교 시절의 과거 기억을 보여 주는 것 같더니 자연스럽게 말을 걸며 나를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시스템은 내가 궁금해하던 모든 것들을 알려 줬었다.
자신의 이름이 뭔지, 시스템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가 회귀해서 아이돌이 되어야만 했던 이유와 내게 걸려 있는 버그의 이름까지 전부 말해 줬다.
뒷부분까지는 설명하는 건 조금 꺼려하는 것 같았으나 내 인생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던 탓에 제법 많은 걸 들려줬었다.
특수 버그라…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틀어 벽면에 붙은 거울을 확인했다.
새롭게 변화한 시스템 창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신해신]
나이: 23
외모: A
보컬: A+
댄스: A-
운: B
끼: A
정보: 플레이어
[특성]
[Bug] 주어져선 안 될 행운(특수)
[Bug] 잘못된 시작(악성)
[보유 스킬]
‘올라운더 기어(S)’
보유 스킬 바로 위에 처음 보는 구간이 생성되어 있었다. ‘특성.’
시스템 관리자 제로-원-나인이 알려 줬던 버그들이었다.
“…그런데 왜 하단부에도 저게 남아 있는 거야?”
인생이 뒤틀릴 만큼 큰 악성 버그에 걸려 있었다고 말해 줬다. 그걸 자신들이 개입하여 바로잡기 위해 내게 특수 버그라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알게 된 순간 이벤트에 걸려 있는 버그는 해결이 될 거라고 봤다.
바로 저거, 시스템 하단부에 나열되어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잘한 오류들 말이다.
[Bug]
‘(호칭 공개)인과관계’ - 제거
‘(호칭 공개)당위 손실’ - 제거
‘(호칭 공개)필수 불가결’ - 제거
‘(호징 공개)오류 복구’ - 제거
‘(호칭 공개)선택한 자’ - 제거
‘(호칭 비공개)Bug’
하지만 현실로 돌아온 이후에도 여전히 냉혹했다. 저곳이 모두 건재하게 남아 있던 것이었다.
오히려 특성 구간만 새로 생성된 채 다른 의미로 강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 거야. 나는 거기서 머리가 아파옴을 느꼈다.
무슨 놈의 버그가 이렇게 많아.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걸어 다니는 바이러스 덩어리네. 우스갯소리를 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덧 B3층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려 있었다.
지원겸이 타고 올 차가 들어올 입구 쪽으로 이동하면서 알고 있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을 조금 더 추려 봤다.
이벤트에 걸린 버그가 계속 생존해 있는 이상, 저것도 결국은 내 인생과 관련이 되어 있을 거라는 가설이 들었다.
혹시 이거 그 녀석이라는 존재랑 연관되는 거 아닌가? 문득 계속 거슬리던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시스템 관리자 제로-원-나인이 입에 올렸던 제3의 인물이었다.
정확한 정체는 말해 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 속에는 그 녀석이 항상 끼어 있었다.
제로-원-나인만큼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정체가 유추되지 않아서 눈앞이 막막했다.
“인과관계, 당위 손실, 필수 불가결, 오류 복구, 선택한 자, 그럼 그다음은……?”
그래서 눈앞에 나열되어 있는 버그들을 차례대로 훑어 내렸다. 이전부터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대충 푼 것에 의의를 두고 있던 것들이었다.
이제는 저게 메인 퍼즐 조각이란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주변에 보는 눈이 없음을 확인하고 창 위로 손을 올려 이름이 오픈된 버그들의 뜻을 나열해 봤다.
- [Bug] 인과관계: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 1회 획득 코인 10코인 → 5코인 하향 [제거]
- [Bug] 당위 손실: ‘당연한 것을 받지 못했다.’: 스페셜 스킬 트리 잠금 → 사용 불가능 [제거]
- [Bug] 필수 불가결: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길’: 스타 코인 스탯 해금 지불 코인 변동 1,000코인 → 5,000코인 [제거]
- [Bug] 오류 복구: ‘잘못된 것을 되돌리는 방법’: 랜덤 스탯 3가지 동결(스타 코인 스탯 해금 적용 불가능) → 외모 댄스 운 [제거]
- [Bug] 선택한 자: ‘선택은 자신의 몫’: 코인 캐기 시스템 정지 → 사용 불가능 [제거]
지원겸이 도착하기까지는 대략 5분 정도 남은 시간이었다. 주차장 입구 기둥 뒤에 서서 추리를 시작했다.
인과관계,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 여기서부터가 첫 번째 퍼즐 조각이었다.
“혹시 이게 ‘잘못된 시작’을 말하는 건가?”
제로-원-나인이 알려 줬던 회귀에 대한 이유를 떠올리자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시스템 관리자들도 어떻게 하지 못할 악성 버그에 걸렸었다고 이야기했다.
그걸 보다 못한 시스템 측에서 개입하고자 특수 버그를 꾸려 나를 회귀시켰다고 설명들은 게 떠올랐다.
“…이거였구나, 인과관계.”
시스템과 나의 인과관계. 시스템과 버그의 인과관계. 이것 말고는 정답이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오류 하나가 해결됨에 만족감을 느끼며 두 번째 줄을 읽던 순간이었다.
“그럼 자동으로 저건 내 삶을 말하는 거겠네.”
당위 손실, 시스템은 내게 당연한 것을 받지 못했다고 말해 줬다. 누가 동일 인물 아니랄까 봐, 실제로 만난 제로-원-나인도 나를 안타깝게 여긴 듯했다.
“받지 못한 거라…….”
그건 아마도 평범한 인생이었겠지. 내가 살면서 받아야 할 사랑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게 부모, 자식 간의 연대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내가 받지 못했다는 것의 가장 큰 이슈는 ‘부모’라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걸 이제는 팬들과 대중들의 사랑으로 치환하는 거였구나.”
생각보다 무덤덤해서 스스로도 놀란 점이었다. 뭐, 이제 와 신파를 찍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한 열셋? 언저리까지는 부모님이란 존재가 궁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라고 내가 사는 세상은 남들보다 더 척박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주어진 현실을 살아가기도 벅차 잊어버렸었다.
어차피 내겐 없는 부분이라며 떠올리지 않고, 넘겨 버린 것이었는데. 그들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다른 이들이 충족해 주고 있었다니. 어쩌면 그렇게 박복한 삶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도리어 운이 좋았지.”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으니.
간혹 가다 보이는 악플에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들 이상으로 내겐 많은 팬이 있었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에 진심이 된 가장 큰 이유라고 본다.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 악성 버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눈을 돌려 다시 글을 읽었다.
필수 불가결,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저당금, 아니지, 내게는 사죄한다는 의미의 사례금과 더불어 아이돌로서의 신해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금 이 시기를 이겨 내야 했다.
단순히 버티는 걸로는 안 되고 승기를 가져와야만 하는 싸움이었다.
그걸 위한 유일한 길이 바로 오류 복구, 잘못된 것을 되돌리는 방법이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제로-원-나인도 그렇고 그 녀석이라고 불리는 존재도 그렇고. 내게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 주기 위해 특수 버그를 심었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이게 아니면 방법이 없었던 거냐. 오류투성이이던 신해신이란 존재에 새로운 오류를 심어 탈출구를 만들어 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두 개인데… 아닌가? 그 뒤로도 더 있나?
실소를 내뱉으며 하단부의 내용을 살폈다.
현재 호칭이 오픈되지 않은 비공개 버그 하나 위로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의 버그가 눈에 띄었다.
“선택한 자라…….”
이건 어디에 끼워 봐도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부터가 제로-원-나인이 입을 다문 구석이라는 건데.
선택은 자신의 몫. 내 의지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설명했던 위와 달리 책임 전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내가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기억이 있나? 하도 머리를 썼더니 이제는 어디까지가 내 기억인지조차 헷갈렸다.
“일단 남아 있는 버그들을 열어 보고 다섯 번째부터 연결하자.”
결국 이 해답은 더 뒤의 버그들이 갖고 있을 거란 판단을 내렸다.
열리지 않은 여섯 번째와 어쩌면 더 뒤에 있을 일곱 번째 그리고 여덟 번째.
이걸 해결해서 내가 모르는 것들과 그 녀석이라는 존재를 밝혀내기로 다짐했다.
물론 악성 버그와 저당금도 속 시원하게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방해하는 존재들부터 치운다. …MXP.
집요하게 앞길을 방해해 오던 존재를 떠올린 무렵이었다.
빵- 길게 이어지는 클락션 소리에 기둥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어두컴컴한 지하 주창 내부, 덜컹거리는 차량의 바퀴 소리와 함께 긴 빛줄기가 쏟아졌다.
저건 흔히 볼 수 있는 중형차였다. 전면을 제외하곤 어찌나 선팅을 짙게 했는지 창 안의 광경은 전혀 엿볼 수가 없었다.
아파트 주민인가 싶어서 몸을 뒤로 물리려고 하는데, 눈앞에서 멈춘 차량이 지잉, 창문을 내렸다.
“여, 왜 이렇게 빨리 나와 있었냐?”
“…멘토님?”
그 안에 타고 있던 것은 내가 기다리고 있던 지원겸이었다. 운전석에 팔을 걸친 채로 선글라스를 내리는 꼴이 위풍당당해서 어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