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지금 매니저도 없이 여기를 혼자 온 거야? 기상천외한 인간이란 건 알았지만, 이런 건 또 처음 보는 듯했다.
“그 차는 뭐예요.”
“지인 차. 내 차는 너무 눈에 띄어서. 아, 나 보험 들었다?”
“예.”
뭐가 됐든 무사히 도착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던 무렵이었다.
조수석 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지지만 않았다면 무사히 넘어갔을 텐데.
“해신 씨, 왜 난 안 반겨 줘요?”
“…어? 왜 여기에.”
지원겸의 옆쪽에서 몸을 내미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여기서 볼 일이 없을거라고만 생각했던 김환준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조합이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2인의 등장에 넋이 나갔다.
그런 나를 보던 지원겸이 잠시 낄낄 웃음을 내뱉었다.
그것도 오래가진 못해서 자신을 밀고 나온 김환준의 어깨를 때리고 큰 소리로 호통쳤다.
“아, 붙지 마, 더러우니까!”
“나 살면서 그런 소리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 내가 더러워요, 해신 씨?”
“아니, 더럽고 자시고, 왜 여기…….”
당황하여 허리를 숙인 내 앞에 선글라스를 벗어 든 지원겸이 고개를 내밀었다.
슬쩍 주변 눈치를 보며 눈을 굴리는 것이 아주 낮고 은밀한 목소리였다.
“내가 정보를 어디서 구했겠냐? 으이구, 우리 제자님, 은근히 헛똑똑이에요~”
“네?”
그러고 보니까 지원겸이 오늘 여기에 온 것은 MXP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문자 메시지로도 우리라고 다수를 칭했었는데.
내가 시스템에게 정신이 팔려 있긴 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미 온 사람을 다시 돌아가라며 내쫓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열쇠는 저기가 쥐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난처했다.
찡그려지는 미간을 매만진 채 허리를 세우고 일단 주차부터 하라며 미리 봐 둔 자리로 안내하려던 찰나였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차 세우시면 돼요. 경비실에는 미리 말해 뒀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오케이, 저기 말하는 거지? 야, 김환준. 똑바로 앉아. 이러다가 사고 나면 전부 네 탓이니까.”
“네, 네. 참 까칠해. 나도 지원겸, 너랑 같은 차 타는 게 썩 즐겁지만은 않았는데.”
“아, 그럼 네 차 타고 따로 오시던가요~ 누굴 운전기사 취급해? 손 안 올라가는 걸로 감사하게 여겨라. 내가 인성이 조금만 모났으면 너랑 난 지금 법정 싸움 중이었어.”
“왜 피해자가 나라고 생각하지?”
“그거 지금 선빵 치겠다는 말이냐?”
디레스트가 MXP에서 나온 이후, 전보다 악감정은 줄어든 것 같지만. 여전히 사이가 좋다고는 하지 못할 두 명의 선배가 보였다.
보다 못해 내가 뜯어말리자 그제야 지원겸이 액셀 위에 발을 올렸다.
“됐으니까 빨리 주차나 하세요. …이렇게 요란하게 왔으면서 안 들킨 게 용하네.”
“어쭈? 너 스승님 편을 들어 주지는 못할망정. 지금 누구 편을 들… 야!”
그때, 길어지려는 지원겸의 대화에 팔을 뻗은 김환준이 창을 올렸다. 그 사이로 미안하다는 듯 능글맞은 웃음을 선보이며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 덕분에 여기서 더 안 싸우는 거니까. 나도 숙소에 들여보내 줘야 해요? 나 혼자 여기 있는 것도 난감하잖아. 하이사인 숙소 건물 지하 주차장에 김환준 혼자 있으면 무슨 소문이 나겠어요?”
협박이군, 하여간에 사람이 참 일관되게 삐딱한 것 같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지원겸도 어이가 없었는지, 아니면 더는 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는지. 천천히 차량을 몰았다.
그렇게 나보다 먼저 앞서 나가는 중형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뺨을 꼬집었다.
“아.”
묵직하게 와닿는 통증을 보아 꿈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더 암담하게 느껴졌다.
“…애들, 몇 시에 퇴근한다고 했더라.”
폭풍을 몰고 다니는 스승과 별로 달갑지 않은 손님의 콜라보였다.
추가로 오늘 대화해야 할 주제가 무겁기 짝이 없으니. 부디 멤버들이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이 정리되어 있었으면 했다.
* * *
“어, 여기구나? 그 하이사인이 사는 곳이.”
“성공했다? 하긴 얘네 잘나갔지~”
“무슨 소리세요. 인클루랑 디레스트는 더 좋은 곳에 살잖아요.”
숙소로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멤버들의 방은 개인 프라이버시가 있으니까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한 뒤였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거실 한구석에 서서 여기저기를 돌아보는 두 명의 선배를 살폈다.
명품 한 두 개씩은 걸치고 있으면서. 감탄하는 듯한 얼굴들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가만히 있게라도 해야지. 이거 원, 안 되겠다는 생각에 거실 소파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선글라스를 벗어 든 지원겸이 툴툴 불만을 내뱉었다.
그건 곁에 있던 김환준도 비슷해 보였다.
다들 말이 많아. MXP고 뭐고 간에 내쫓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대충 앉아 계세요. 음료수는 단 거밖에 없는데. 아니면 차 드실래요? 아 참고로 단 거는 명이 것, 차는 정원이 거예요.”
“난 단 거 싫은데. 그렇다고 이정원 거 뺏어 먹기에는 좀…….”
“커피 없어요? 정 그러면 그냥 물 줘요. 솔직히 해신 씨네 멤버라지만 이정원 씨는 나도 좀 섬뜩하거든요.”
“…네?”
“몰래 먹으면 저주받을 것 같아서요. 아… 후배님은 모르려나? 이정원 씨 눈빛 아주 살벌한 거. 옆에 비슷한 사람들 많던데? 예를 들자면 이유준 씨나 권혜성 씨… 아니다, 여긴 전체적으로 멤버들이 리더를 감싸고돌았지.”
무슨 헛소리야. 김환준의 행패에 차가운 물을 두 잔 따라 나왔다.
이것도 싫다고 하고 저것도 싫다고 하니. 대충 찬물이나 마시고 정신 차리란 의미였다.
불만을 내비칠 줄 알았던 둘이 생각 외로 순순하게 잔을 받아 들었다.
그 뒤 이어지는 내용은 그리 순순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얘기 끝나면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죽겠어. 아, 그러고 보니까 너, 몸은 좀 괜찮냐?”
“빨리도 물어봐 주시네요. 예, 괜찮습니다.”
“신해신, 너. 사람이 참 단단해졌어. 이젠 어지간해서 기로 안 밀린다?”
“많이 배웠거든요. 깨닫기도 하고.”
지원겸 당신이나 서도경, 혹은 멤버들에게서 말이야.
가장 큰 이유는 시스템과 만난 이후 깨달은 것일 수도 있었다.
원래 내가 지니고 있을 성격과 동기화가 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지원겸은 예민한 인간답게 그걸 눈치챈 듯했다.
대충 몸은 괜찮다고 이야기하다가 내가 오늘 병가로 스케줄을 쉬게 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됐는지 그 출처가 밝혀졌다.
“앞으로는 미리 좀 얘기해라. 김환준 저 새끼한테 네 얘기 듣는 것만큼 기분 더러운 일이 없거든.”
“김환준 선배님이요?”
“네, 제가 알려 줬거든요. 해신 씨 오늘 병가 내서 병원 갔다고.”
싱긋 웃고 있는 김환준이 보였다. 물잔을 내려놓으며 팔짱을 끼곤 다리를 꼬는데, 아주 자기네 집구석이구만.
속을 알 수 없는 인간답게 정보 캐치도 수준급인 듯했다.
“그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분명 회사에만 얘기했는데.”
“해신 씨, 가끔 잊는 것 같은데. 우리 같은 소속사거든요.”
“…아.”
김환준은 회사에 방문했다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직원들이 상부에 보고 하던 걸 엿듣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운이 좋게 알게 된 것 같은데.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나를 찾아온 것도 웃겼다.
…지원겸을 꼬드긴 인간이 저 사람이었군.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한 연유를 알 수 있었다.
“두 분, 오늘 스케줄 없으세요?”
너네, 한가하냐? 그 의미를 담아 질문을 던져 봤다. 이 험난한 연예계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던 인물들답게 대수롭지 않아 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하여간에, 기는 더럽게들 세요.
“나는 오프, 앨범 준비 전 기간이라 휴가 시간이거든.”
“저는 원래라면 연습이 있었는데 말이죠? 후배님이 아프다고 하니까 걱정돼서요. 정식으로 데이 오프 냈어요. 밤 연습에 합류하기로 하고, 빠져나온 거지만 말이에요.”
걱정은 무슨. 둘 다 재밌어 보이니 온 게 분명했다. 하물며 김환준은 땡땡이까지 쳤다고 하니까 할 말이 없었다.
너희 마음대로 하세요. 이제는 될 대로 돼라였다.
대충 정리가 되어 가는 분위기에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지원겸, 인클루가 당한 일이라는 게 뭔데. 김환준 네가 알게 된 MXP의 사실이 뭔데. 내가 오늘 캐물어야 할 것들이 떠올랐다.
분위기를 깔자 상황 파악이 완료된 둘이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풍겼다.
지원겸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고, 김환준은 재미있어 미치겠다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인클루, 무슨 일 있었어요?”
시작은 너야, 지원겸. 고개를 돌리자 손에서 잔을 굴리고 있던 지원겸이 다리를 뻗었다.
대충 늘어지듯 누운 몸을 보아 어느 정도 해결은 된 것 같았다.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내미는 얼굴을 보니 욕을 하기 몇 초 전 같았다. 저 사람들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된 것이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다.
“너, 컴백 준비한다고 기사도 안 봤지. 야, 난 너희 일 터지면 꼬박꼬박 찾아보는데.”
“죄송해요. 바빠서 그랬어요. 그래서 바로 만났잖아요. 저도 멘토님 걱정되죠.”
여기에는 아부가 최고였다.
“그렇게 큰 건 아니었어요. 하이사인이나 해신 씨가 겪은 일 정도는 아니고. 그냥 간단한 루머 정도?”
“죽을래? 네가 뭔데 간단한 루머래.”
“사실이잖아. 해결도 얼추 된 것 같던데.”
김환준의 대답에 지원겸이 울컥했다는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다행히 뻗는 일은 없었지만 나름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바닥에 앉아 지원겸의 바지 자락을 잡아당겼다. 됐으니까 내용이나 말해 봐. 도대체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여기 얘네 숙소니까 참는다. 재영이 녀석 열애설이 터졌어.”
“열애설이요?”
재영이라고 하면 진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인클루의 멤버였다. 지원겸의 목줄을 주로 잡을 만큼 진중한 타입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런 사람에게 열애설이 터졌다니 처음에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책임감이 없어 보이진 않았는데. 적어도 아이돌로서의 명분은 제대로 갖고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가짜지. 걔가 뭔 연애야. 걔는 퍼포먼스에 미친 놈이야. 우리 멤버라서가 아니라 그냥 독종이라고.”
지원겸의 말에 그 열애설이 루머임을 확신했다. 거기도 당한 거였구나. 의아한 부분은 하나 있었다.
지원겸 저 사람이 멤버의 열애설 정도로 당했다고 표현할 리가 없었다. 온갖 고행길은 다 걸어 본 인물이기에 저렇게 열받아 하는 게 이상했다.
결과적으론 오래가지 않아 자세한 사정을 듣게 됐다.
단순한 열애설이 아니었네. 꽤 더럽게 얽힌 치정에 가까운 스토리였다.
“걔 상대로 꼽힌 게 배우였거든? 진재영 그 자식도 다섯, 여섯은 더 많은, 제법 이름 있는 배우 말이야. 근데 문제가 뭔 줄 아냐?”
“그 배우가 이미 공개 연애 중이란 거였죠.”
“아…….”
그러니까 양다리란 뜻이네. 바람 상대가 진재영이라고 소문이 난 건가?
김환준의 이야기에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복잡할 때 엮이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앞서 나오는 규모였다.
MXP, 너희 사람 또 잘못 건드렸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일을 토대로 지원겸과 인클루가 우리 편에 서기로 다짐했단 것이었다. 잘하면 인클루네 회사까지?
이상한 동맹이 추가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