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80화 (279/328)

280화

그렇게 다소 거북한 근래 사정들을 듣게 됐다. 얼추 정리도 된 것 같으니 슬슬 본론을 꺼내 보기로 결심했다.

텅 비어 버린 유리잔을 바라보다가 먼저 지원겸에게 질문을 던졌다. MXP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래서, 받게 된 정보란 게 뭔데요? 공유해 주신다면서요.”

“아, 맞다. 나 그거 얘기해 주러 온 거였지.”

“참고로 지원겸이 아니라 내가 알아낸 건데.”

“넌 좀 조용히 있어라.”

중간에 실랑이가 있긴 했지만 제법 진지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꼬고 있던 다리를 푼 지원겸이 허리를 숙여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느긋하게 웃고 있던 김환준은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고 있었다.

“야, 신해신. 너도 걔네가 악습 이어 오는 거 싫었지.”

“네? 네, 당연하죠.”

우리가 가장 큰 피해자인데.

인클루도 그렇고, 디레스트도 그렇고 MXP와 연관된 순간부터 원치 않은 고행길을 걸어와야만 했다.

뜻하지 않은 루머에 이어서 여론을 이용한 매장식 수법. 자기네의 눈에 거슬리거나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미련 없이 치우려고 드는 중대형 기업의 횡포였다.

원래 이렇게 큰 회사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히 회귀 전 기억을 떠올려 보면 이상한 점이 존재했다. 과거 업계 선배들에게 들었던 소문 중 하나였었다.

‘MXP가 중소였어요?’

‘아, 신해신, 넌 이것도 모르겠구나. 지금 일은 아니고 꽤 오래전이지. 한 13년은 된 듯?’

‘고원 레코드 때 일 말하는 거죠, 선배? 음… 그럼 그 정도 됐겠네요.’

쉬는 시간에 우연히 듣게 된 대화였다.

그때 당시에도 아이돌 오디션 관련 프로그램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일부 출연자가 MXP 산하에서 나온 보이그룹의 노래를 커버하게 됐었다.

노래부터가 해외 유명 작곡가의 자본을 끌어서 만든 하이 퀄리티의 음반이었고, 이걸로 형평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내부에선 잡음이 들렸다.

그러다가 MXP와 같은 엔터 기업들에 관련된 부분까지 대화가 흘러갔다.

아무리 효과가 좋은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지만 대기업이나 대중들이 잘 아는 4개의 소속사에선 연습생을 내보내지 않았다.

이런저런 소문들을 나누다가 MXP의 연식에 대해 듣게 됐었다.

그때 당시에는 제법 이름발을 날리고 있던 회사여서 중소였다는 사실이 의아하기만 했다.

알고 보니 뒤에는 많은 사정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원 레코드요?’

‘어, 거기 원래 이름, 괜찮은 그룹을 낸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자금줄이 좀 생겼었나 봐. 이름 갈고 여기저기에 자기네 애들 내보더라고.’

‘프로모션 엄청 돌렸어. 솔직히 너도 알잖아, 이 판, 홍보가 얼마나 크게 좌지우지하는지. 사재기까진 아니더라도 SNS랑 와이튜브 광고 같은 플모 왕창 돌리면 결국 그게 유행이 되기도 하는 법이거든.’

‘아…….’

선배들이 하는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쉽게 말하자면 MXP는 돈으로 큰 기업이란 뜻이었다.

중소에서는 기적이라고 불리는 아이돌이 나오지 않는 이상, 그 규모를 유지하는 게 보통의 일이었다.

중소의 기적이 나온다고 했어도, 그건 그 사람들의 능력이지, 회사의 재능이라고 보기엔 힘들었으니까 말이다.

해당 그룹이 소년, 또는 소녀 가장이 되는 케이스가 부지기수였었다.

결국 뺑뺑이를 돌리다가 통상 계약 기간인 7년을 넘어가면 그룹이 와해되며 중소기업은 계속 중소로 새로운 그룹을 런칭하는 게 우리가 잘 아는 회사의 구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MXP는 그 행보가 독특하니 선배에서 후배로, 이야기가 계속 전해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돈으로 큰 기업이라… 고개를 들어 올려 보다가 김환준과 눈이 마주쳤다.

디레스트, MXP가 어느 정도 크고 난 다음에 런칭이 된 그룹. 여기가 고원 레코드 때 데뷔했다면 중소의 기적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 나온 그룹이었기에 그 능력치를 자기들이 갖고 있던 것보다는 하향으로 인정받았었다.

분명 회귀 전에는 MXP에 남아 있었지. 지금은 이적하여 메이터스 소속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디레스트 멤버 전원 모두 재계약에 성공하여 MXP의 대표 아이돌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MXP에서 지저분하게 구는 걸 감수하고서까지 나올 이유가 없었던 건가?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치열한 공방을 치렀던 김환준을 떠올리면 내가 아는 미래와 현재는 많이 바뀌어 있는 상황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아뇨, 그냥, 뭔가 각오했나 싶어서요.”

“네?”

그룹 이름까지 빼앗기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온 걸 보니, 저기도 내부 약점을 이용하여 딜을 걸었던 것 같은데.

내가 스태프일 적 김환준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거기서 버티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뭐, 일단 그건 뒷전으로 넘긴다 치고. 진지한 얼굴로 물어 오던 지원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지간한 일에는 돌진하던 공격형 인간이 웬일로 머뭇거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게 이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거 너무 맨몸 부딪치기 같기는 하거든? 만약 싸움 걸었다가 우리가 지면 여기 손해 장난 아닐 거야.”

“됐으니까 그냥 얘기해 주세요.”

아무래도 지원겸은 내가 거리를 두기 바라는 마음과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둘 모두가 공존해 있었나 보다.

내가 확고한 의사를 보이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마음을 먹었는지 입을 열었다.

“걔네, 뒤가 구린 것 같더라고. 크라운 게임 때부터 느끼곤 있었는데. 여기저기 뿌려 놓은 돈줄들이 많아.”

“업계 관계자들 말하는 거죠?”

“네, 대충 제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열 명은 우습게 넘어가니까요. 완전 윗선까진 아니고, 중간에서 중상위 정도에 있는 사람들이랑 연이 많이 있을 거예요. 참고로 공영보단 케이블에 넓게 분포되어 있고요.”

“머리 쓴 거지 뭐, 근래 음방 제외하면 돌판은 케이블이 강세였잖아.”

거기까지는 나도 대충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제2, 또 제3의 한동준 같은 인물이 없으리라곤 보기 힘들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간단한 사항으로 고민을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더 있군. 그와 동시에 김환준이 제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그 안에는 수첩 하나를 찍은 이미지가 올라와 있었다.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가장 끝부분에 적힌 스펠링과 숫자들이 한눈에 봐도 수상쩍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자 김환준의 입으로부터 꽤 무거운 발언이 나왔다.

“이건 내가 알고 있는 MXP랑 관련이 있을 업계 사람 리스트. 일명 장부라고 하죠. 전부는 아니고 한 3분의 2 정도는 될 거예요.”

“어디서 났어요, 이런 걸?”

깜짝 놀라서 김환준을 쳐다봤다. 지원겸은 어이가 없었는지 실소를 내뱉고 있었다.

“쟤, 내 생각을 뛰어넘는 미친놈이라니까. MXP에서 메이터스로 넘어간다고 했을 때부터 제정신은 아니구나 싶었는데… 저거, 용기 수준이 아니야. 그냥 간덩어리가 부어 있어.”

여기는 먼저 알았던 것 같은데, 여전히 놀라운 모양이었다.

“내가 멤버들을 데리고 메이터스로 어떻게 왔다고 생각한 거예요? 거기가 우리 발목 붙잡고 늘어질 건 뻔하잖아요. 그래서 나도 거기 있을 때 이런저런 대책을 많이 구해 놨죠.”

“야, 어렵게 말하지 마. 괜히 있어 보이는 척하기는. 저거, MXP에 있을 때 지 사람 남겨 놨대.”

“예?”

“MXP 안에 김환준이랑 이야기가 오가는 사람이 있다고. 그것도 중간보다 윗자리에.”

“하하, 형선이 형이 고생 좀 하고 있죠.”

김환준을 비롯하여 디레스트의 데뷔를 도와준 매니저가 있다고 했다.

김환준이 데뷔조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연예계에 발을 담근 시기가 비슷해서 아주 두터운 친분이 있다고 했다.

현재는 디레스트를 성공시킨 업적으로 MXP 내부 보이 그룹 라인의 매니지먼트 팀 실장을 맡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자신들이 MXP에서 메이터스로 이적하려던 순간,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라는 부연 설명이 따라붙었다.

“그럼 그분이 자료를 넘겨 주고 있던 거예요?”

“네.”

내부 스파이잖아. 미친 거 아니야? 아이돌들이 하라는 활동은 안 하고 산업 스파이와 기업의 암투를 조장하고 있었다.

나도 다양한 뒤처리를 해 봤다지만, 김환준까지 이런 짓을 하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원래는 같이 메이터스로 옮기려고 했는데. 그러면 너무 눈에 띄어서 그쪽이 거기에 남기로 했다네. 오히려 그게 MXP한텐 신뢰를 준 모양이야. 딱 매니저랑 아이돌의 관계로 회사가 바뀌면서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처럼 보인 거지.”

“형선이 형, 곧 업계를 뜰 거라고 했거든요. 다른 일을 하려고 한다기에 지금이 적격이라고 생각해서요.”

그래서 갖고 있던 장부의 사진을 넘겨받은 모양이었다. 김환준도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고 했었는데, 이젠 증거까지 갖춰진 상황이었다.

“여기 보면 끝에 스펠링이랑 숫자가 하나씩 적혀 있죠? 이게 방송사와 건네진 금액대라고 말하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음, 한동준도 있네요? 그 옆에 적힌 ‘N(0.5)’ 이건 엔넷 소속의 이 사람이 5천만 원가량을 받았단 뜻이고요.”

많이도 받았네. 한동준의 이름이 적힌 구간을 살펴봤다. 엔필름의 산하에 들어가 있는 사람치곤 대담무쌍하기 짝이 없는 선택을 한 인간이었다.

이런 식으로 업계 관계자들을 포섭해서 자기네가 우위를 차지했던 거였구나.

이걸 우리가 입수한 이상 여기서도 저기를 칠 준비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잖아, 김환준.”

“그렇긴 하지.”

“또 뭐가 있어요?”

“음, 그건 저쪽에서?”

이번엔 지원겸이 손을 들어 올렸다. 언제 챙겨 쓴 것일까, 벗어든 선글라스를 코끝에 걸친 모습이었다.

껄렁한 자세로 고개를 까딱이더니 주머니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휙, 위로 던져서 다시 주고받은 물체에 나는 그만 두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녹음기?”

저건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유어돌이 종료된 이후, 지원겸을 찾아갔을 무렵, 멘토의 정이라며 내게 선물해 주려던 소형 녹음기였다.

마침 내가 같은 물건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지원겸과의 대화를 녹음한 걸 빌미 삼아서 한 편처럼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물건이 다시 튀어나오니 어안이 벙벙했다.

“중요한 건 물건이 아니지, 안에 담긴 내용이지.”

플레이 버튼이 눌린 녹음기가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치지직하는 노이즈와 동시에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편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지원겸? 아무래도 통화하던 중에 녹음을 한 모양이다.

- …그러니까, 법 쪽에서 걸리는 문제가 많다고?

- 네, 얘네 탈세 털면 장난 아니겠는데요? 세금을 이렇게 아껴서 어디다 쓰나 했더니, 형이 말하는 것처럼 업계 관계자들한테 뿌렸나 봐요. 우와~ 블랙 유통이네. 회사 설립 초창기랑 현재가 다른 것도 기업에 로비를 좀 했나 본데, 거기서 얻은 자금줄로 빨판식 확장을 한 것 같더라고요. 얘네 완전 생태계 교란종인데요? 자리 잡고 나서부턴 경쟁하는 쪽들을 잡아먹고 성장한 거잖아요. 이걸 뭐라 해야 하지? …황소개구리?

- 그 표현 딱이야,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은 게 그런 이미지잖아. 근데 현물 증거는 없냐? 이야기론 뭔들 못 해.

- 어우, 형, 저 여기도 간신히 알아냈어요. 그리고 형은 아이돌이잖아요. 왜 저기에 껴요. 원래 저런 애들은 법으로 못 건드려요. 옆에 로펌이 떡하니 있을 텐데. 어디지? 와, 예선에서 맡고 있네… 이거 빡센데요? 저기면 걸리더라도 벌금이나 좀 받고, 아니면 꼬리 자르기 엔딩이죠. 몇 놈 털어 주고~ 본체는 빠져나가고~

이 사람이 예전부터 지원겸에게 들었던 소식통이었다. 여기까지 알아낸 걸로도 지원겸은 위험한 수위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나서기로 했다.

우선은 녹음 파일의 정지 버튼을 눌러 소리부터 껐다. 둘에겐 긴히 할 이야기가 있던 참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린 아이돌이니까 아이돌의 방식으로 처리하면 되는 거였다. 머리가 팽팽 굴러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