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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81화 (280/328)

281화

그렇게 지원겸과 김환준을 돌려보낸 이후였다. 그들이 왔다 갔다는 흔적을 지우고자 부단히 집 정리를 했다.

피검사 결과를 제외하곤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걸 보고한 뒤였으니까.

지금쯤이면 멤버들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과, 벌어질 일들을 떠올리면서 멤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덧 창밖이 깜깜해진 늦은 시간이었다.

베란다 유리 너머로 내 모습이 비쳐 오는데, 아스라이 투영되는 시스템에 시선이 옮겨졌다.

청량을 기억 키워드로 전환한 이후 새롭게 오픈된 키워드 룸이었다.

[키워드 룸 - Full gauge 100%] - 기억 키워드 전환 가능 횟수: 0회

활동적인 : 0%

이거 또 채워 봐야 할 것 같지? 다른 시스템도 시스템이었지만 키워드 룸을 통해서 얻은 힌트가 유독 남다른 감이 있었다.

단계별로 오픈할 때마다 내가 알 수 있는 정보들이 광활하단 뜻이었는데.

네 번째였나, 바로 저번에는 시스템 관리자인 제로-원-나인과도 마주할 기회가 만들어졌었다.

준비된 만남은 아니어서 완벽하게 처신하진 못했던 것 같지만, 그래도 거기서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들을 깨우칠 수 있었다.

‘활동적인’이라……. 이번에도 저걸 통한다면 다른 이야기를 더 들어 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녀석.”

그 녀석이라고 지칭된 놈을 만나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제로-원-나인에게 설명 들은 바에선 나쁜 놈은 아니란 느낌이 들긴 했지만 이상하게 저기가 핵심이라는 기분이 가시지 않고 있던 나였다.

시스템 관리자라며 모든 걸 좌지우지하던 제로-원-나인이 다소 쩔쩔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던 게 기억난다.

대면하게 된다면 일이 좀 더 수월하게 풀릴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대충 모든 각오를 다진 이후, 삐삐거리는 현관문 도어 록 소리에 몸을 틀었다.

베란다에서 훌쩍 걸어나오니 커다란 장정들이 우수수 쏟아져 들어왔다.

오늘 있었던 스케줄을 끝마치고 귀가한 멤버들이었다.

“왔어?”

“…어? 안 자고 있었네, 형……? 몸은 좀 괜찮아……?”

윤명의 안부에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윤명의 뒤쪽에서 권혜성이 뛰어들지만 않았더라면, 수고했다며 등이라도 한 번씩 더 토닥여 줬을 것이다.

“…으악!”

“혀엉~! 아픈 곳은 없다며! 매니저님한테 들었어! 도대체 아침에 왜 그랬던 거야! 걱정했잖아~!”

“쉿, 지금 시간 늦었다. 걱정시킨 건 미안해.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랬어.”

익숙한 파우더 분내와 헤어스프레이의 들쩍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놈을 추슬러 일으켜 세웠다.

오늘 스케줄은 보이는 라디오와 간단한 예능 출연이었는데.

음악 방송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던 건가 대형을 수정하느라 골머리 썩힐 일이 없었던 것에 안도했다.

지쳐 보이는 멤버들, 특히 막내즈인 문채민과 윤명에겐 서둘러 씻고 쉬라는 말을 전했다.

몸조리 잘하라며 스쳐 지나가는 놈들을 보다가 뒤따라 들어온 녀석들을 확인했다.

그중 하나는 아까부터 나와 권혜성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이유준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싹 훑어내리는 것이 예전부터 느낀 점이었지만 참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이유준, 너. 내 말 안 믿는 거지.”

“아니, 그건 아닌데. 컨디션이라는 게 잠깐 사이에 안 좋아질 수도 있는 거잖아? 혜성이 받아 드는 거 보면 괜찮은 것 같네. 다행이다.”

이유준은 내게 훌쩍 다가와 어깨를 두 번 토닥이며 느슨한 미소를 지었다.

이유준의 뒤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강태오가 조언해 주지 않았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만한 능청스러움이었다.

“형, 설마 걔 믿는 거 아니지? 방심시키는 거야. 이러고 불시에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아까 정원이 형이랑 얘기하는 거 들었거든.”

“이런, 들켰네.”

“야.”

이유준은 오병은에게 전달받은 결과만으로 성이 차지 않았나 보다.

쉬는 날이 되면 이정원을 대동하고 의료 투어라도 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강태오의 방해 아닌 방해로 모든 작전이 무산됐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이유준을 보다가 강태오에게는 고맙다며 손을 들었다.

시큰둥한 얼굴로 방에 들어가면서도 내 손에 하이 파이브를 하는 걸 보니 쟤도 참 어지간히 사람이 무른 듯했다.

짝하고 울리는 소리 너머로 강태오가 안부를 물어봤다. 대답은 듣기나 한 건지 빠르게 제 방으로 들어갔지만 말이다.

“몸은?”

“들은 대로, 완전 괜찮ㅇ……. 내 말은 다 듣고 가는 거지?”

툭, 하고 반쯤 닫히다 만 문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걱정하는 방식까지 모두 개성적인 멤버들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왜 한 놈이 조용하지. 이상한 기운에 주변을 휘휘 돌아봤다.

문채민과 윤명은 먼저 씻으러 들어갔고. 권혜성은 칭얼거리다가 그 둘을 쫓아가듯 사라졌었다.

강태오는 방금 방에 들어갔으니 열외.

남은 거라곤 아까부터 눈앞에서 싱글거리고 있는 이유준인데. …이정원은?

이유준과 강태오의 뒤에서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멤버가 떠올랐다. 불길함에 이유준을 바라보자 턱짓으로 부엌 언저리를 가리켰다.

“…이정원, 너. 뭐 하냐?”

“아, 신해신. 몸은 괜찮다고? 오 팀장님한테 전달받긴 했는데 영 미심쩍어서. 아까 태오 녀석한테 다 들었지? 너 이번 활동 끝나고 휴가받으면 나랑 같이 종합 병원 좀 다녀오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더 받아 봐. 원래 검사 같은 건 여러 번 해 봐야 하는 법이니까.”

아침에 출근하며 입었던 복장을 제외하곤 무대 위에서 볼 법한 화사한 메이크업과 단정한 세팅을 하고 있던 이정원이었다.

내게 말을 걸려다가 달려드는 멤버들을 확인하곤 먼저 부엌 쪽으로 들어온 듯한데.

이유준과 강태오의 넉살 아닌 넉살을 들었으면서도 개입하지 않고 뭔가를 분주히 하고 있었다.

“건강 검진도 일 년에 한 번 하는데 활동 종료 후에 하는 거면 간격이 너무 짧지 않냐. 다들 리더에 대한 신뢰가 없어.”

“리더라는 사람이 너무 미스터리해서요~ 이렇게라도 신경 써야 스스로를 돌아보니까 어쩔 수 없어. 다 네 업보야. 그건 너도 잘 알지?”

일단 적당히 대꾸하면서 아일랜드 식탁 너머로 놈을 살폈다. 찬장을 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띄는데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등골을 스쳐 지나갔다.

“…그나저나, 너 뭐 하냐?”

“글쎄다.”

부지런히 찬장을 열어 확인하던 이정원이 이쪽으로 눈을 굴린 순간. 여길 보곤 피식 웃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설마, 얘 그새 숙소에 누가 왔다 갔다는 걸 눈치챈 거야? 말도 안 돼.

지원겸과 김환준이 자기네 숙소로 돌아간 것은 벌써 세 시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는 사람들에겐 병가로 스케줄을 빠진 터라 외부 노출이 불가능하다고 거절을 한 뒤였지.

집에 마땅히 대접할 것도 없고, 대접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물 한 잔과 차 몇 잔. 음료수 약간을 내어 준 것이 오늘 내가 했던 일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흔적이라면 남은 게 이상할 텐데. 지인의 차를 빌려 타고 온 지원겸과 김환준에 이어 사생도 무사히 따돌린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바깥으로 새어 나갈 일은 만무하다고 봐야만 한 것이다.

박재민도 회사로 돌려보낸 뒤라 비밀 회동을 아는 건 아무도 없을 텐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흐음.”

찬장을 열고 여기저기를 뒤적이던 이정원이었다.

뭔가를 발견했다는 얼굴로 가만히 위를 올려다봤다. 손을 뻗어 물건을 꺼내 드는데, 이정원이 집어 들은 것들을 보고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저건 대화를 나누다가 목이 탄다는 지원겸과 김환준의 성화에 부엌을 뒤져 내어 준 이정원의 차 티백 박스였다.

꽤 대용량을 사다 놓고 마시는 놈인지라 몇 개 빠지는 걸로는 눈치 못 챌 줄 알았더니.

기가 막히게 내가 가져간 종류의 티백 박스만을 꺼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반대 손에는 유리잔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지원겸과 김환준이 마시고 난 잔을 설거지하여 다시 넣어 둔 것들이었다.

할 말을 잃은 상태로 이정원을 바라보고 있자 뭔가 재밌는 걸 캐치한 모양인지 이유준이 뒤로 바짝 붙어왔다.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아일랜드 식탁을 짚고는 이정원을 향해 뭔가 걸린 게 있냐며 질문했다.

“정원이 형, 숙소 들어오자마자 눈빛이 달라지더니. 그거였어?”

“어, 신해신, 네가 혼자만 있는데 얌전히 있을 리가 없지. 누구야? 네 성격에 문제가 될 만한 인물은 아니겠고. 뭐 또 뒤에서 일 꾸미고 있는 거지? 거기 연관된 인간들이겠네.”

시스템보다 더 시스템 같은 인간들이 내 옆에 있었던 듯했다.

이정원의 물음에 전신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안 거지? 아니, 그 전에 저 정도 흔적으로 손님이 왔었다는 걸 눈치챌 수가 있나.

이유준의 말에 따르면 이정원은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지원겸과 김환준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했다.

하긴, 의심이 들어야 찬장이든 뭐든 뒤져 볼 생각을 했을 테니까 말이다.

내 뒤처리는 완벽했기에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감상이 들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 너, 어떻게 알았냐?”

저런 상태의 이정원에게는 둘러대 봤자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물며 옆에는 이유준도 있잖아. 이씨 둘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이실직고하고 마음 편해지자. 오늘 말하지 않으면 활동 기간 내내 시달릴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냥 허심탄회한 심경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정원은 들고 있던 잔 두 개와 티백이 든 박스를 우리가 기대선 아일랜드 식탁 위로 올려놨다.

맞은편에서 비슷한 자세로 나를 보는 이정원을 보다가 부담스러움에 주춤 뒤로 물러섰다.

“향수 냄새.”

“뭐?”

“숙소 들어오니까 향수 냄새가 났다고. 많이 빠져서 흐릿하긴 했지만, 잔향은 남아 있었어.”

“향수 냄새?”

이정원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킁킁 주변 냄새를 맡았다.

아무것도 맡아지지 않는데. 멤버들에게서 나는 화장품 냄새와 들쩍지근한 스프레이 냄새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물며 향수라고 한다면 다른 멤버들의 것일 수도 있었다. 도대체 이정원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너희한테서 나는 화장품 냄새가 더 강한데. 그리고 향수라고 하면 태오나 유준이 얘 거일 수도 있잖아.”

“형, 강태오는 머스크만 뿌려. 나도 우디한 거나 플로럴만 쓰지.”

“머스크? 우디, 플로럴?”

“하여간에 아이돌치곤 지나치게 관심이 없다니까. 너는 같이 있으니까 코가 익숙해진 모양인데. 숙소 들어오자마자 파우더 냄새 같은 게 났거든. 베이스 노트 향수인데 네가 숙소에 남아 있으면서 메이크업을 했을 리도 없잖아. 그래서 누가 왔다 갔나 싶었지. 그나저나 아무리 휘발됐다지만 이 정도로 남은 것 보면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분사했나 보다?”

아, 그러고 보니까… 지원겸에게서 맡은 보송보송한 냄새가 떠올랐다.

평소에도 향수 같은 걸 꾸준히 뿌리고 다녔지. 화려한 인상에 맞춰서 그만큼 요란한 구석이 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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