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82화 (281/328)

282화

향수라고 해 봤자 냄새가 오래가지도 않을 걸 알아 크게 신경 쓰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나 보다.

항상 따라붙던 냄새니까 적응이 되었던 거군.

게다가 나가기 전에 다시 뿌렸다는 건 나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잔을 정리하러 간 사이에 새로 분사하기라도 했던 것 같았다.

진짜 도움이 안 돼요. 능글맞은 스승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걸 보고 있던 이정원이 실소를 내뱉으며 자신이 내려놓은 잔 두 개와 티백 박스를 내밀었다.

“신해신, 똑똑하면서 허술한 구석이 있어. 혼자 집에 있는 놈이 뭐 하러 컵을 두 개나 썼을까? 게다가 이거, 잘 안 쓰는 거잖아. 밖으로 빼놓으면 들킬 것 같아서 찬장에 바로 넣어 둔 것까진 좋았는데. 물기 정도는 완전히 말려 뒀어야지.”

이정원의 말대로 컵 표면에는 설거지 이후 남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굳이 안쪽까지 볼 일이 없을 테니까.

개수대에 빼 두면 그게 더 눈에 띄는 일이라고 봤던 것이었다.

이건 시스템 수준이 아니야. 거의 인공지능 로봇과 같은 멘트를 내뱉던 멤버였다.

옆에 있던 이유준은 흥미 반, 즐거움 반의 시선으로 잔을 구경하고 있었다.

팔짱을 낀 자세에서 옆으로 몸을 틀더니 내 쪽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높게 치닫는 소리가 아찔하게만 느껴졌다. 포위군. 이건 완벽한 포위 상태였다.

항복하지 않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졌다는 뜻으로 가볍게 양손을 들어 올리니 티백 박스를 주워 들은 이유준이 박스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차칵차칵 얕게 흔들리는 소리에 이유준이 피식 미소 지었다.

“정원이 형, 애초부터 해신이 형 의심하고 있었구나. 그게 아닌 이상 여기서 몇 개 빈 걸 어떻게 알아내겠어.”

“뭐? 진짜야?”

“당연하지. 네 허술한 설거지만 아니었으면 이건 찾아보지도 않았어. 아까 냉장고 열어 봤을 때 명이 음료수는 거의 그대로길래 확인해 본 거지. 손님이 뭘 사서 오지 않는 이상 뭐든 주긴 했을 거 아니야. 아니, 뭘 사서 왔다면 애초에 설거지할 일이 없었겠지. 강태오가 마시는 커피 아니면 저놈 방에 있는 희한한 음료수, 그것도 아니면 내가 마시는 차 셋 중 하나일 텐데. 네가 우리에게도 말 못 하는 비밀 손님을 숙소에 들인 걸로 모자라서 멤버들 방에까지 들어갔을 리는 없으니까. 이건 제외라고 치고, 그럼 남은 건 태오 커피 아니면 내 차? 근데, 신해신, 너. 또 놓친 거 있다.”

…이정원, 저번에 자체 콘텐츠에서 추리하는 역할을 맡아 보더니, 진짜 탐정이라도 된 것같이 말했다.

놈의 촉에 낮게 혀를 차는데 녀석에게서 알고 있냐는 물음이 던져졌다.

내가 뭘 또 놓쳤다는 거지. 아까부터 나만 모르고 있던 사실들이 너무 많았다.

체념한 자세로 이정원을 바라보자 이유준에게서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형 깨우려고 방에 들어오기 전에 멤버들 다 거실에 있었거든. 그때 강태오가 말했어.”

“‘아, 커피 다 떨어졌네.’”

“그러니까 정원이 형이 자기 티백 박스부터 확인한 거지.”

…이런. 이건 귀신같은 놈들에 이어서 귀신같은 상황이 만들어 낸 우연이었다.

내가 제로-원-나인과 씨름하는 사이에 그런 일들이 있었나 보다.

운 스탯이 안 좋은 건 여기 있는 이정원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실질적으로 최악인 사람은 나였던 모양이다.

완전히 질려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방문자들에 대해서는 말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사실 마음 한구석에선 멤버들 몰래 숙소에 사람을 들였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나갔다가 괜히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보다는 이게 나은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진행했던 거였는데.

허락받지 않은 일이라 영 찜찜했다.

그래서 모두 씻고 나오면 설명을 해 주겠다며 놈들의 등을 떠밀었다.

내일부턴 나도 스케줄에 합류해야 했으니까. 일찍 이야기를 끝내고 쉬자며 달래는 상황이었다.

타협한 건지 아니면 준비를 끝마치고 몰아붙일 생각인 건지 내게 등을 떠밀린 이정원과 이유준이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니네가 이긴 것 같지?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했다.

물론 얘기는 해 줄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 여기에 방문했던 인물들에 대한 것이 전부였다.

내가 미쳤냐? 너네한테 그 위험한 계획을 알려 주고.

그런 큰 사건에 휘말리는 건 나 하나로 족했다.

무사히 마무리되지 않는 이상, 놈들에겐 절대로 비밀인 사항이었다.

* * *

씻고 나온 멤버들이 거실에 모두 모여 앉았다.

자정도 훌쩍 넘어서 원래 같으면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는데.

이정원과 이유준의 단호한 부름에 수건을 머리에 얹은 권혜성이 질문했다.

“뭔데, 갑자기?”

“…해신이 형, 우리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게 아니면 정원이 형 얼굴이 저럴 리가…….”

“나도 명이 형 말에 동감. 유준이 형, 웃는 거 대박 무서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실직고해. 저기는 빠져나가기 힘든 거 알잖아.”

막내인 문채민에게까지 이런 말을 듣자 착잡했다.

이제 보니까 저기 저 세 녀석도 내가 뭔가를 했다고 장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강태오는 듣지 않아도 얼추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거실에 나온 이후 줄곧 나만을 바라봤다.

정확하게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그새 들키냐는 의미의 시선 같았다.

뜨끔, 미안함에 고개를 숙인 채 눈만 들어서 주변을 훑어봤다.

제로-원-나인, 너 듣고 있냐? 박스 상점에 시간을 되돌리는 아이템 같은 건 없는 거야?

말할 생각은 있었으나 난처하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던 이정원이 질문했다.

다리를 꼬고 앉은 것이 참 한결같이 기가 강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누가 온 건데?”

“누가 와? 어디에? 지금?”

“…권혜성, 멍청아. 정원이 형 말을 뭐로 들었냐……. 저건 해신이 형이 우리가 없는 사이에 누구랑 만났었다는 이야기잖아.”

“형이? …숙소에서? 해신이 형이? 뭐야?!”

윤명과 권혜성의 대화에 아찔함을 느꼈다.

야, 거기서 그렇게 서두를 시작하면 어떡해. 안 그래도 미안한 상태였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준이 형, 저게 무슨 소리야? 해신이 형이 누굴 만나. 오늘 병원 갔다가 계속 숙소에서 쉬고 있었다며.”

“어~ 그러긴 한 것 같은데. 중간에 깜짝 손님이 들른 모양이야. 운도 나쁘지. 그걸 정원이 형한테 걸려서. 아, 그렇다고 해서 너무 형 나쁘게 생각하진 마. 채민이 너도 알잖아. 형 성격상 또 혼자 덤터기 쓰려고 한 게 뻔하니까. 이성 같은 불건전한 문제일 리는 없고…….”

“이성?! …그렇지. 해신이 형이 그럴 리가 없지.”

“권혜성, 저건 착하다고 해야 해. 아니면 수긍을 잘한다고 해야 해…….”

“윤명, 너. 너는 해신이 형 안 믿냐?”

“…당연히 믿지. 형들도 걱정되니까 꼬치꼬치 캐묻는 거 아니야. 여기서 숙소에 사람을 들인 걸로 신경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그렇지, 형들……?”

멤버들의 대화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고맙기는 한데 말이야…….

다들 나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했다. 숙소에 사람을 들인 게 가장 큰 문제 아니니.

얘네도 착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사람을 잘 믿는다고 해야 하는 건지.

기가 강하다는 걸 제외하니 지나치게 무른 놈들이었다.

점점 더 죄인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태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피곤하단 얼굴로 뭐든 상관없으니까 꾸미고 있는 일이나 말해 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도대체 누군데, 여기 왔다는 사람.”

“강태오, 정확히는 사람‘들’이야.”

“…사람들? 몇 명이 온 거야? 아니, 그게 중점이 아니지. 도대체 몇 사람이랑 뭘 꾸미는 거야?”

이유준이 알려 준 정보를 들은 강태오의 눈썹이 휘어졌다.

협탁 위로 턱을 괸 얼굴이 불만스럽단 느낌으로 변했다.

“…두 명입니다.”

할 말이 없는 나로서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름을 말해야 하나.

말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 인간들을 밝혔을 때 멤버들에게서 나올 잔소리와 호통이 조금 두려웠다.

“그래, 두 명. 유리잔이 두 개였으니까 두 명이겠지. 이름 대. 우리도 알고 있는 사람이지? 네가 얘네랑 안면도 없는 인간을 턱턱 숙소로 들였을 리는 없잖아.”

결과적으론 이정원의 취조에 못 이겨서 몽땅 불어야 했지만 말이다.

지원겸, 김환준, 미안. 나중에 이정원이 노려보는 건 알아서 피해라.

달라붙어서 열리지 않던 입을 떼어 냈다.

그리곤 사그라들어 가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그 둘의 이름을 내뱉었다.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연기도 가미되어 있었다. …무조건 병문안으로 끝내자. 거기서 더 가 봤자 아이돌 활동 같은 안건들이 내가 말 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멘토님.”

“…멘토님? …멘토님이면. …지원겸 선배님?”

“엥? 거기서 선배님이 왜 나와?”

권혜성과 문채민의 물음에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왜 나오긴, 그 사람이 왔으니까 나오는 거지.

나머지 하나의 이름을 꺼내기도 전에 일부 멤버들에게선 놀랐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물론 이정원이나 이유준 같은 놈들도 존재했지만 말이다.

“오케이, 거긴 그럴 줄 알았어. 선배님, 안 그러는 척 우리랑 자주 연관되니까.”

“해신이 형, 유어돌 때부터 꽤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 우리는 모르는 일도 종종 알고 있는 것 같고.”

“…거기라니. 형.”

문채민의 태클에는 꿈쩍도 하지 않은 둘이 다시 나를 쳐다봤다.

이건 나머지 한 명이 누구냐는 시선이었다.

…여기 꺼내면 진짜 죽는 거 아니야? 예전보단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디레스트, 특히 김환준이라면 질색하고 보는 이정원이 떠올랐다.

이유준은 티를 내진 않았으나 시커먼 웃음을 흘리곤 하던 것이 성에 차지는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더듬더듬 기어들어나는 목소리로 김환준의 이름을 꺼냈다.

사실 ‘김’까지만 꺼냈을 때도 그냥 지원겸이 인클루의 멤버를 데리고 온 걸로 거짓말할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주저 없이 내뱉은 이름 석 자가 멤버들에게 모두 공개됐다.

“…김환준, 선배님…….”

“…….”

“…….”

“……?”

그 뒤에는 무서운 침묵이 뒤를 따랐다. 모두 못 들었나? 내 목소리가 작아서 못 들은 것 같다며 녀석들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큰 소리가 나온 것은 권혜성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였다.

머리 위에 얹은 수건을 양손으로 잡아당긴 권혜성이 대뜸 소리를 질렀다.

“김환주운~?! 김환준? 그 디레스트? 아, 아니지. 이제는 같은 소속사 선배님인가. …그래도, 김환준?!”

뒤를 이어 문채민도 놀랐다는 얼굴로 옆에 있던 윤명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 사람이 왜 여길 와? 아니, 그 전에 김환준 선배님, 지원겸 선배님이랑은 사이가 안 좋지 않았나? 아니지… 잠깐, 형이랑도 좀 투닥거렸잖아. 형이 경계하는 걸 봤었는데? 이게 뭐야? 무슨 일이야?!”

“켁… 켁……. 문채민, 이거 놔…….”

문채민이 잡아당긴 옷에 목이 졸려서 문채민을 때리는 윤명까지. 아주 대환장 파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