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83화 (282/328)

283화

간단한 방송 녹화가 종료된 이후였다. 다음 스케줄을 가기 위해 대기실의 뒷정리를 했다.

스태프들이 짐을 챙기는 사이, 화장실이라도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옆에 앉아 있던 권혜성이 벌떡 일어나 나를 따라붙었다.

“너, 뭐 해.”

“지금은 내가 담당이니까!”

작게 경례하는 손짓까지 하며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권혜성을 확인하자 머리가 아팠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며칠 전 지원겸과 김환준이 우리 숙소를 방문한 날의 일이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숙소로 불러들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귀신같은 촉을 지닌 이정원에 의해 모든 사실이 밝혀졌었다.

추궁하는 놈을 보아 쉽게 빼 주려는 것 같지는 않았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멤버들에겐 김환준과 지원겸의 정체를 밝혔다.

그 둘과 나눈 이야기는 다소 위험한 경계에 걸쳐져 있었다.

아이돌이라고 하기에는 거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치열한 싸움이 될 것이었기에, 나는 멤버들에게는 이를 딱히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당사자들의 이름에 대해선 말해 주면서도 그 둘이 찾아온 연유와 직접으로 나눴던 주제에 대한 건 감췄다.

다들 눈치가 빨라서 온전히 내 말을 믿어 주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병문안, 그게 끝 맞아?’

‘내가 봐도 좀 수상한데. 단순히 안부 때문에 우리 숙소까지 왔다고? 그 두 분이?’

이정원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문채민, 넌 누구 편이야. 윤명과 권혜성 사이에 끼어서 의아한 점이 있다는 듯 손을 들며 질문하는 막내에 속이 쓰라렸다.

그래 봤자 우리가 나눈 대화까지 알 도리는 없었다. 찔리는 양심은 무시하고 시치미를 뚝 떼기로 다짐했다. 얘네를 위한 일이었다.

‘후배가 아프면 와 줄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우리가 이거 말고 또 무슨 얘기를 나누는데.’

등 뒤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윤명의 어깨 너머로 보이던 강태오가 이쪽을 안쓰럽게 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을 정도로 힘에 겨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강태오가 구원 타자로 나서 줬다.

굳이 따지자면 본인도 궁금한 것 같았지만. 적당히 하고 넘어가 주라는 주의가 강한 놈이었다.

‘아픈 사람 붙잡고 너무 몰아세우는 거 아니야?’

‘아, 맞다! 형 오늘 아팠지!’

‘…권혜성, 바보. 태오 형한테 넘어가냐.’

예리하긴 하나, 이런 데에서는 무른 감이 있던 권혜성이 가장 먼저 내 편으로 돌아섰다.

그 옆에 있던 윤명은 타박하면서도 이유준과 이정원을 향해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저 둘처럼 몰아붙이는 타입은 아닌 조용히 걱정해 주는 타입이기 때문이었는데.

살살하라는 의미였는지 이유준의 어깨에 턱을 올린 윤명이 멍한 얼굴로 여기를 쳐다봤다.

‘위험한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굳이 오늘 캐물을 필요가 있을까…….’

‘윤명, 넌 쟤가 하는 짓을 보고도 그 말이 나오냐. 김환준이라잖아. 멘토님까지는 그렇다 치겠는데 거긴 속내를 알 수 없는 인간이라고.’

윤명의 말을 들은 이정원이 다소 강한 어조로 나왔다.

이유준은 딱히 대답하진 않았으나, 윤명보단 이정원의 말에 공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잘한다, 윤명. 이대로 분위기를 무산시켜. 윤명은 기본적으로 마이 페이스에 사차원 성향이 강하던 멤버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니 그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윤명도 완전한 내 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정원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영 불길한데… 놈이 저런 얼굴을 하면 항상 사달이 발생했었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내 촉이 정답이었음을 알게 됐다. 윤명이 폭탄 발언을 내뱉은 것이었다.

‘…정 찜찜하면 담당자라도 돌아가면서 붙이든가.’

‘…담당자?’

‘명이 형, 그거 지금 해신이 형을 감시하자는 거 아니야?’

‘…감시까진 아니고. …어, 음. …비슷한가?’

‘…….’

너넨 무슨 당사자 앞에서 감시를 논하니. 나는 할 말을 잃고 멤버들을 쳐다봤다.

문채민의 질문에 고민하는 듯한 뉘앙스를 보이던 윤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할 말을 잃은 강태오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놈들을 쳐다봤다. 포기하지 마, 강태오. 네가 아니면 이 이단아들 사이에서 누가 날 구해 줘.

하지만 강태오도 더 이상 귀찮은 일에 연관이 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그 담당자인지 뭔지에서 제외해.’

저 혼자만 빠져나가겠다는 발언을 당당하게 내뱉었다. 당했다는 생각에 이마를 짚으니 까랑까랑한 권혜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할래! 나, 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데?’

‘혜성아, 너 그러다가 해신이 형한테 미움받는다.’

‘…그런 거야?’

이유준의 만류에도 권혜성은 마냥 지금 이 상황이 신나 보였다.

이유준도 뜯어말리는 척을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즐기는 쪽에 가까웠다. 찡그린 미간 너머로 실실 웃고 있는 얼굴을 발견하여 배신감에 휩싸였다.

아까부터 말이 없던 이정원은 흘러가는 상황이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내가 이 이상 입을 열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던 멤버답게, 다른 방식으로 조이자고 다짐한 듯했다.

이래도 네가 입을 안 열어? 한마디로 이거였다. 머리를 쓸 줄 아는 멤버가 가장 고통스러운 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아직 여기는 안 돼. 성공일지 실패일지 확률이 확실치 않은 위험한 게임이었다.

아군이라고 할지언정 이런 사실은 최소한의 인원만이 알아야 했다. 혹시 모르잖아? 나중에 일이 커졌을 경우, 멤버들만은 무사히 건져 낼 수 있을지.

조금 더 확실해지기 전까진 얘네에게 이 사실을 밝히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그 담당자인지 뭔지… 하여간에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될 것 같긴 했지만.

아무튼 그 둘과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내가 버티고 서자 이정원이 팔짱꼈다. 물러서 주려는 건가? 기대도 잠시, 이정원이 이유준을 바라보며 실소를 내뱉었다.

저 불길한 웃음은 바로 그것이었다. 실행시켜. 아무래도 이정원은 윤명의 의견을 수용할 생각이었나 보다.

‘윤명, 그거 자세히 좀 얘기해 봐.’

‘…자세히 말할 것도 없는데.’

‘명아, 해신이 형한테 순서대로 눈을 붙이자는 얘기였지?’

‘…굳이 따지면 비슷하려나. …근데, 나… 농담한 건데…….’

윤명은 장난을 치려고 내뱉었던 말이 진짜로 실행되려는 걸 보며 당황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서, 마이 페이스답게 자신은 상관없다는 어투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이다.

이걸 보며 가장 괴로워하고 있던 것은 나와 강태오였다. 나는 당사자로서, 강태오는 그 이상한 일로부터 자신이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는 걸 체감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난 빼 달라고 했ㄷ…….’

‘기각.’

‘이유준, 넌 왜 그렇게 사람이 삐딱하냐.’

‘재밌어 보이잖아. 그리고 우린 한 팀이니까. 공동 집단답게 같이해야지.’

어깨에 윤명을 매달고 있던 이유준이 상쾌하게 웃었다. 저놈, 저거…….

말로는 재밌다며 실실거리는데 사실은 약간 화가 났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는 내가 또 뭔가를 저지를 것 같아서 걱정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저번에 한번 싸웠던 일 때문이었을까. 이유준은 어지간한 일에는 대놓고 화를 내려 하지 않았었다. 방법을 바꿨다는 듯이 살살 꼬드겨 회유하는 수법을 쓰려고 했다.

그래서 윤명의 말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압박하면 지친 내가 술술 불 테니까. 그를 노리고 하는 게 분명했다.

‘신해신, 마지막 기회까지 차 버린 건 너야. 오늘부터 신해신은 혼자 두지 않는다. 특히, 스케줄 갔을 때, 방송국에서 남이랑 접촉하는 것 보면 바로 보고해. 담당은 돌아가면서, 쉬는 시간은 한 타임을 기준으로 보자.’

‘야, 내가 무슨 범죄ㅈ…….’

‘형이 먼저 숨겼잖아. 내가 보기엔 이건 형 잘못이 커.’

문채민의 팩트 공격에 나도 더는 할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에는 우스갯소리로 꺼낸 압박식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정원을 비롯하여 멤버들은 진짜로 이 허무맹랑한 짓을 실행했다.

나는 정말로 며칠째 멤버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다.

감시라고 하기에는 조금 귀엽나? 영화라도 보고 온 것인지 내 뒤에 따라붙은 권혜성이 귀 위로 손을 올렸다.

빠르게 고개를 돌리면서 주변을 살펴보는데, 그를 확인한 윤명이 바보 같다는 얼굴로 낮게 혀를 찼다.

“…어디 가서 쟤랑 같은 그룹이라고 말 안 해야지.”

“명이 형, 그건 굳이 말 안 해도 다 알아.”

문채민의 단호한 말을 들으며 복도로 나가는 문 앞에 섰다.

“…혜성아. 너, 진짜 그러고 나 쫓아올 거냐.”

“임무 수행 중에는 말 걸지 마.”

아무래도 권혜성은 보디가드가 나오는 영화를 봤던 것 같았다.

그거 설마 무전기를 표현한 거야? 왜 귀 위에 손을 올리고 있나 했더니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것이었다.

다소 방정맞은 보디가드의 등장에 뒤통수를 긁적였다.

멀찍이 서서 우리를 지켜보던 이정원은 지금 이 광경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지만 말이다.

“잘하네. 그렇게 다음 스케줄 이동 전까진 계속 부탁해.”

“롸져!”

개인 짐 가방을 든 이유준이 한 술을 더 떴다. 제대로 보고나 말을 하지.

결국 정말로 나는 이 역할극에 심취한 멤버를 데리고 화장실까지 가야만 했다.

* * *

“…다른 건 다 그렇다 치고. 화장실은 나 혼자 들어가면 안 될까?”

화장실의 입구가 보였다. 아무래도 이건 좀……. 진지한 표정으로 주변을 휘휘 돌아보던 녀석이 내 말에 어리바리한 표정을 지었다.

“에?”

“너도 그렇잖아. 그냥 여기 있어. 금방 나올 테니까. 그 정도는 상관없지?”

“하지만 정원이 형이…….”

“화장실도 쫓아 들어가래?”

“…아니?”

“이 앞에 있으면 누가 들어가는지 다 보일 것 아니야. 그거면 충분하지 않냐.”

“…그런가.”

얘가 쫓아와서 다행이야. 본인도 여기까지 들어오는 건 아니다 싶었는지 내 말에 홀린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는 여기에 세워 두는 것도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는 대기실로 돌아갈 것 같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했다.

“그럼 나 여기 있을게!”

권혜성을 두고 간신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괜찮겠지? 혜성아, 미안하다. 내가 여기로 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놈들, 나한테서 눈을 떼지 않으니까 도저히 시스템을 확인할 수가 없잖아.”

눈앞으로 보이는 파란 창에 시선을 돌렸다. 그래, 나는 오늘 시스템을 점검해 볼 속셈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주변 물건을 집는 척 손을 움직이며 했을 일이었다.

그런데 근 며칠간은 어딜 가도 시선이 따라붙으니, 곁에는 담당자라 칭하는 멤버까지 착하고 달라붙어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아주 잠깐이라도 멤버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었다.

내가 누군가와 접촉만 하지 않는다면 안도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몰랐겠지, 사람이 아니더라도 무형의 존재가 내 곁에 존재한다는 것을.

가늘게 뜬 눈으로 시스템을 불렀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이벤트 버그를 해결하며 다시 쌓이기 시작한 코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