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85화 (284/328)

285화

결과적으론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를 통해 캐릭터 선정을 마무리 지었다.

“승부는 승부. 이제 그만 인정해라.”

“…당했어, 잊고 있었다. 신해신, 가위바위보 잘하는 거.”

가위를 낸 이정원이 분하다는 듯 땅을 노려봤다.

올라운더 기어(S)로 통합되어 혹시나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가위바위보의 신 스킬이 건재했던 모양이다.

위풍당당하게 피터팬 역할을 차지하고, 경연곡을 정했다.

우리가 부르려는 노래는 유어돌 시즌 2의 MC이자 이제는 한솥밥을 먹게 된 배우 고우림의 대표 출연작 ‘사랑은 벚나무 아래에서’의 OST였다.

1라운드에서 승리하면 최종 결승까지 2곡, 총 3곡의 노래를 불러야만 했는데.

‘사랑은 벚나무 아래에서’와 그 후속 완전판인 ‘겨울나무 아래에서 당신을 기다려요’의 OST가 딱 3곡이 되었다.

우리가 한참 활동하던 시기에 ‘겨울나무 아래에서 당신을 기다려요’로 온갖 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고우림을 생각하면 좋은 콜라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파트를 나누고, 보컬을 연습하면서 이정원과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번에 그 일들은 묻어 두기로 한 것인지, 다시 온순해진 놈을 보며 일단은 스탯 업데이트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었다.

스케줄을 보내며 찾아온 대망의 녹화 날, 비밀리에 이정원과 방송국으로 출근하여 옷을 갈아입었다.

체형을 알 수 없도록 만든 두툼한 인형 옷을 건네받고 화려하게 꾸며진 탈까지 쓰니, 드디어 출연에 대한 실감이 났다.

평소보다 좁아진 시야에 뒤뚱뒤뚱 몸을 돌리다가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리본을 단 인형 탈을 쓴 이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눈 마주친 거 맞겠지? 서로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응원하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피터팬과 웬디! 준비해 주세요!”

스태프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이정원과 손이 맞부딪쳤다.

하이 파이브라고 하기엔 다소 푹신한 감촉에 둘 모두 낄낄 웃음을 내뱉었다.

“실수하면 너한테 궁금했던 거 다 물어볼 거야.”

“너야말로, 실수하면 나 잡으려고 할 때마다 전력으로 도망갈 거야.”

장난기가 섞인 멘트를 끝으로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이제부턴 노래할 때가 아닌 이상 모두 음성이 변조될 예정이었기에, 말을 아꼈다.

복도를 지나가면서부터 찍는 카메라에는 마치 그 캐릭터가 된 것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우리가 누구인지 밝혀지기 전까지는 감쪽같이 숨길 예정이었으니까. 원피스의 양 끝을 잡고 사뿐사뿐 걷는 웬디의 모습에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이정원. 오냐, 신해신. 겉만 봐선 네버랜드로 떠나는 동화 속 캐릭터였겠지만.

내용물들은 우승에 대한 투지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 * *

“엄마, 또 그거 봐?”

“응~ 난 이게 좋더라.”

주말 저녁, 예능으로 시끄러운 시간대. 가족들이 모여 있던 거실에서였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엄마가 TV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이거 끝나면 조용히 보든가 해야지, 아쉬운 마음에 근처를 서성이다가 소파 한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나는 가왕, 꽤 오래전에 일회성 판으로 나와서 인기몰이 했던 프로그램이었다.

찾아보던 예전과 달리 근래에는 나 역시도 관심이 멀어졌던 프로그램이지만 말이다.

“어? 오늘 인원이 좀 많네?”

그런데 오늘은 보이는 화면에 인파가 좀 많다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MC를 제외하고 2명이 무대 위에 올라가 있어야 했는데.

쌍쌍이 지어진 4명의 캐릭터가 무대 위를 어지럽게 노닐었다.

이상하다는 내 반응에 엄마는 프로그램 로고가 적힌 화면의 상단 우측을 가리켰다.

“오늘 스페셜 판이래.”

“…페어 편? 뭐야? 둘씩 나오는 거야?”

“응, 그런가 본데.”

이제 보니까 나는 가왕 측에서 새로운 개편용 이벤트를 펼치려던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하나에서 둘로 늘어난 거 아닌가. 여전히 시큰둥했던 나로선 큰 감명이 없었다.

둘 중 선공이 정해지고, 첫 번째 무대가 진행됐다.

헨젤과 그레텔, 아까 곁에 있던 애들은 피터팬과 웬디였으니까. 동화를 주제로 싸움이라도 붙이려는 것 같았다.

흥얼흥얼 귀에 익은 노래를 들으며 친구에게 온 톡을 확인했다.

정소윤 [은비야, 애들 연말 무대 하겠지? 방청 갈 거야?]

함께 하이사인을 파고 있던 소윤이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당연히 가야지, 같은 아이돌, 같은 멤버를 최애로 두고 있던 우리였다.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아서 꽤 신나는 덕질을 하고 있었다.

활동이 끝나면 후에 있을 공연들과 시상식 리스트를 확인한 뒤, 소윤이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던 찰나였다.

“…응? 이 노래는…….”

다소 귀에 익은 발라드의 인트로에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연애편지(사랑은 벚나무 아래에서 ‘OST’)] - 피터팬&웬디

이건 몇 년 전 대히트했던 드라마 ‘사랑은 벚나무 아래에서’의 첫 OST였다.

…주연이 고우림이었지? 애들이 출연했던 유어돌 시즌2의 MC이자 이제는 메이터스에서 한솥밥 먹는 배우로 있던 남자 하나가 떠올랐다.

풋풋한 학생을 연기해서 상대 배우와 간질간질한 호흡을 자랑한 드라마였었다.

그때 당시에는 봄 냄새 물씬 나는 달달한 분위기가 인터넷에서 크게 화제에 올랐었다.

게다가 오픈 엔딩으로 끝나는 첫 번째 작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그 후속인 완전판의 ‘겨울나무 아래에서 당신을 기다려요’가 제작되었다.

학생 시절을 다루던 1편과 달리 성인이 된 이후의 나날과 과거의 회상을 번갈아 전개한 드라마가 애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았다.

들쩍지근한 내용과 달리 씁쓸한 엔딩을 맞이한 전작에 이어 아슬아슬한 느낌을 내면서 꽉 닫힌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드라마에 몰입하여 끝까지 본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그나저나 이 노래 꽤, 어려웠던 걸로 기억했다.

미디엄 템포의 살랑살랑한 사랑 노래치고 음역대가 높았으니. 기교가 없이 불러야 하는 곡인 만큼 잘 부르는 태가 나기 어려워서 하드한 노래였다.

덕분에 저 피터팬과 웬디라는 출연진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겠지만 용기가 가상한 인물들이란 평이 나왔다.

엄마와는 가벼운 장난을 치며 화면을 돌아보려던 순간이었다.

“저기 쟤네, 키가 큰 걸 보면 남자애들 같은데~ 은비, 너는 어때?”

“음, 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배우인가? 고우림 나온 거 아니야?”

“어머, 그럴 수도 있겠네.”

화음으로 시작하는 두 사람의 하모니에 엄마도 나도 몸이 굳었다.

[피터팬&웬디]

일과가 되었어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을 빼앗아 가는 너

다정한 미성과 허스키하지만 달달한 목소리가 부드러운 조합이었다.

둘 다 남자였구나. 아니, 그걸 떠나서 시작부터 봄 냄새가 물씬 풍겼다.

[피터팬]

웃고 있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울고 있으면 나도 슬퍼져

왜인지 알 수 없어

패널들의 반응만 봐도 상당한 실력자임이 확실했다. 반했다는 듯이 제 뺨에 손을 올린 개그우먼이 황홀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진짜 잘 부르는데? 피터팬 탈을 쓴 남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고저의 변화가 심하지는 않으나 전체적으로 높은 음역대였다,

불안정한 구석 하나 없이 탄탄한 발성이 귀를 사로잡았다.

거기에 왠지 모르게 마음까지 가는 것 같으니, 짝사랑하는 이의 절절한 심경을 잘 표현했다.

…근데 왜 이렇게 귀에 익지? 마이크를 입에 대는 제스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피터팬&웬디]

(아주 오래 고민했어)

“어휴, 목소리 조합이 너무 예쁘다.”

엄마가 절로 감탄을 내뱉을 정도로 예쁜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남녀가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음에도 적절한 파트 분배가 가슴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웬디]

아 망했다 내가 널 (-널)

그러니까 혹시 널 (-널)

어느 날 깨달은 작은 감정 조각

펼쳐 보곤 그만 놀라 뒤를 돌아 눈을 감아

노래에 맞춰 고개를 돌리는 시늉을 한 웬디의 재롱에 피터팬이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앞으로 밀고 뒤로 당기는 복잡한 리듬에도 흔들림 없이 노래하는 웬디가 대단했다.

그런 감상은 모두가 같았던 모양이었다. 중간에 나온 가수 일부가 가수인 것 같다며 대화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사이에 피터팬과 웬디가 서로를 돌아보며 손을 뻗었다.

다소 딱딱하게 노래만 부르던 헨젤과 그레텔보단 사이가 좋아 보인다는 감상이 들었다.

[피터팬&웬디]

(어떡해 큰일이야)

[피터팬]

이제 내가 할 건 하나뿐

용기 없는 내겐 이게 최고의 걸음

쓰다 만 편지를 서랍 속에

고이 접어 넣어

진짜 익숙한데? 둘의 화음부터 시작하여 다시 이어진 피터팬의 파트까지.

한 명이라면 모를까, 둘 모두가 귀에 너무도 익은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웬디]

오늘 밤은 네게 고백할래

이젠 그만 알아주길 바라

…이렇게 들쩍지근한 노래를, 그것도 이렇게 둘의 조합으로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애매하지만. 머릿속으로 낯이 익은, 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 둘이 스쳐 지나갔다.

[피터팬]

하지만 사실 몰라주길 바라

이런 내 마음을 너는 알까

마음속에 묻어 둔

작은 비밀

1절과 2절 중 한 구간만 진행하는 미션의 룰에 맞춰 하이라이트에 들어간 부분이 나왔다.

빨라진 피아노 반주와 길게 연결되는 바이올린 소리에 소름이 돋아 핸드폰을 내려놓고 양팔을 벅벅 긁었다.

사이로 파고드는 탁기 어린 보이스에 귀가 간질거렸다. 꽤 긴 호흡임에도 숨이 찬 게 느껴지지 않아서 감탄만 나왔다.

…진짜 착각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지만.

만약 이 둘이 내가 생각한 그 사람들이 맞다면, 이건 큰 사건이 될 만한 일이었다.

벌써 자막에선 둘의 노래에 대해 온갖 주접 멘트를 걸고 있었으니까. 강력한 우승 후보라는 이야기였다.

[피터팬&웬디]

나만의 사랑 방식

연애편지

전달하지 못한

나의 비밀 편지

하이라이트에 치달으며 높게 쌓인 고음에 웬디가 길게 음을 내뱉었다.

그 중간에서 메인 멜로디를 채운 피터팬이 웬디의 음에 맞춰 살짝 기교를 부렸다.

[피터팬]

아마도 나는 널 (-널)

[웬디]

그러니까 내가 널 (-널)

…애들이 맞아. 화면에 비친 피터팬과 웬디의 클로즈업에 조용히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어째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둘이 내가 아는 그 사람들이란 확신을 한 이후였다.

“…해신이랑 정원이다.”

“응?”

해신아, 정원아. 피터팬과 웬디는 하이사인의 신해신과 이정원이 분명했다.

안정적이면서도 허스키하고 감성이 가득찬 목소리의 신해신과 미성이 돋보이지만, 힘이 있는 탄탄한 실력이 이정원. 아이돌이라서 그 편견으로 대중들은 잘 모르고 있는 실력이었다.

[피터팬&웬디]

좋아하는 거야

연이어 이어지는 피아노 반주와 동시에 봐야 할 프로그램이 있었다는 것도 까먹었다.

그저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며 마지막 음을 내뱉는 신해신과 이정원을 보며 손뼉을 쳤다.

소윤이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이후 일과였다.

영문을 몰라 하는 엄마에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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