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일단 그건 넘기기로 하고 그 뒤에 있던 다른 사람들부터 확인했다.
근래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보이던 배우 하나를 제외하면 거의 아이돌들이었다.
…아이돌 특집이라도 하려는 건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녹화에 집중하는데 사람들에게 시선이 쏠려 보이지 않던 주변 환경이 보였다.
걸려 있는 네트를 발견하고 나선 넋이 나가 있던 상태였다.
“오… 해신이 형, 괜찮겠어?”
“…안면 스파이크만 피했으면 좋겠다.”
넓은 체육관과 출연진들 등 뒤를 가로지르는 격자무늬의 대형 네트, 바닥을 굴러다니는 흰색의 커다란 볼까지.
오늘 우리가 하게 될 운동은 강하고 빠른 공이 날아다니는 종목, 바로 배구였다.
…피구라면 자신 있는데. 공을 피하기는커녕 공을 받기 위해 날아다녀야 하는 종목임을 깨닫고 난처함에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조명이 켜진 녹화장 한가운데에서 우리의 이름이 불리고 있었다.
활약도는 무슨, 몸 개그나 안 했으면 좋겠다는 다짐이 따라붙었다.
* * *
역시는 역시라고. 오늘 녹화는 시작부터 참 고됐다.
메인 MC 둘의 부름에 녹화장 가운데로 달려가는데 요란한 소개에 맞춰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니 전광판 너머로부터 오늘 방송의 포맷이 소개됐다.
“이 어마어마한 라인업과 함께 이뤄질 주제는~”
“바로바로, 이것입니다!”
[○○ 유망주 특집 – 배구]
…유망주 특집? 두 글자로 추정되는 정답에 눈을 굴리니 MC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멀리서 눈치를 살피던 탁지윤에게 발언권이 주어진 뒤였다.
“…신인?”
“저기, 지윤 씨. 나는 벌써 5년 차인데.”
“으악, 죄송합니다!”
조용하던 성미다운 답변이라고 생각하자마자 우리 옆쪽에 서 있던 다른 아이돌 하나가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이제부터 분량 싸움이구나. 자연스럽게 인터셉트한 느낌이었다.
탁지윤이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사과하자, 곁에 있던 우정환이 적당히 무마했다.
말재간이 좋던 놈다운 능숙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저희가 완전 신인이라서요! 하하! 오늘 군기 바짝 챙겨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놈을 본 권혜성이 내게 귓속말했다. 아무래도 얘 역시 돌아가는 상황을 전부 눈치챈 모양이었다.
“오, 대박 흥미진진.”
“쉿.”
그냥 별거 아닌 단순한 이야기였는데 오프닝을 진행하던 MC 중 하나가 우리 둘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분위기를 이끄는 게 너희도 여기서 한 번쯤은 재밌는 말이라도 해 보라는 뉘앙스로 비쳤다.
…딱히 할 말이 없는걸. 그것도 두 글자? 머릿속이 난리가 났다.
그 와중에 생각해둔 답변이 있었는지 권혜성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정답, 개그!”
“죄송합니다!”
권혜성의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녀석의 목덜미를 잡고 허리를 숙이게 만들었다.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멤버 같으니라고… 시작부터 진이 쭉쭉 빠졌다.
“땡! 저기, 거기 두 분, 아이돌 아니에요?”
“야, 너도 틀렸어. 이게 무슨 장학 퀴즈냐. 땡이 왜 나와, 땡이.”
다른 MC의 핀잔에 주변에선 웃음소리가 들렸다. 창피해, 부끄러워, 민망해. 이래서 얘든, 나든 끼 스탯을 올릴 수 있을까 의심이 됐다.
일단 다른 건 고사하고 방송 녹화나 무사히 종료하게 해 달라며 눈물을 머금었다.
땡을 외치던 MC 한 명이 내게 마이크를 돌렸다. 권혜성이 재밌는 말을 했으니까, 너도 한마디 해 보라는 의미 같았다.
그래서 적당히 떠오르는 단어를 불렀다. 솔직히 재미로 한 건 아니었고, 이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운동?”
그런데 권혜성은 내가 모범적인 답변을 내뱉는 걸 볼 수 없었나 보다. 옆에서 곧장 태클이 들어왔다.
“형, 양심 없다.”
하긴, 권혜성은 달리기를 제외한 나의 운동 능력치를 알고 있던 멤버였다. 이건 나도 오버였다며 정정하자 MC에게서 리액션이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양심적으로 무르겠습니다.”
“…해신 씨, 운동 못해?”
“소신 발언할게요. 저 해신이 형이랑 친한데, 저 형, 운동은 영 아니에요. 아, 달리기 빼고!”
“아니, 얼마나 못하면 다른 그룹까지 소문이 다 나 있어! 김PD! 우리 운동하는 예능이잖아! 도대체 뭔데!”
우정환에게서도 이때다 싶은 멘트가 이어졌다. 유어돌 때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던 놈답게 치고 빠지기가 참 능숙했다.
그렇게 시작부터 운동 못하는 애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 조합이 되어 오프닝을 찍었다.
전광판에 정답을 떠오른 뒤에는 모두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운동 유망주 특집 – 배구]
“어?”
정답이네. PD가 내 말이 정답이라고 알려줬다. 진짜 운동이라고? 믿기지 않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제작진 측으로부터 여러 내용들을 전달받았다.
“아~ 만능은 아니고, 한 종목씩 잘하는 게 있는 사람들이다 이거지?”
미리 준비해 온 영상인지 스크린 위로 뜬 출연진들의 모습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게스트들 중 가장 늦게 데뷔했던 인터너의 탁지윤과 우정환은 소속사 내에서 찍은 자체 콘텐츠 장면을 보여 줬다.
우선 우정환은 오락적인 방면에서 점수를 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저 자식, 유어돌 때도 어지간한 게임에는 다 센스가 있던 게 기억났다.
탁지윤은 조용한 성격과 달리 발군의 운동 신경을 갖고 있었나 보다. 제 키보다 조금 낮은 뜀틀을 훌쩍 뛰어넘는 모습에 그만 입이 떡 벌어졌다.
“…우와, 윤명만큼 하나? 정환이네, 아전체 나오면 장난 아니겠는데.”
권혜성의 말에는 나도 백번 공감하는 바였다. 문득 다른 스케줄에 가 있을 멤버 몇이 떠올랐다.
운동 유망주 하면 우리 팀에도 대표적인 녀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윤명이나 이정원 그 둘을 부르지 않은 거지. 하이사인에선 팬덤 모두가 아는 만능 스포츠맨 둘이었다.
어지간한 건 다 잘했으니까 여기 나와서도 훨훨 날아다녔을 게 자명했었다.
이정원이야 나는 가왕 출연 때문에 고사했다 치겠는데, 윤명 쪽이 영 이상하게 느껴졌다.
권혜성과 동갑내기에 케미도 좋았던 터라 나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의심이었다.
얼마 안 가 확인한 VCR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권혜성 때문이었군.
아전체 때 여러 종목에 나가 활약하던 혜성이 놈의 영상을 봤다. 하이라이트던 달리기부터 개인 종목에 응원까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니며 눈도장을 찍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제작진에겐 만능 스포츠맨이 그룹당 하나였으면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모든 이야기의 앞 뒤가 맞았다.
그 뒤에 이어진 내 영상은 꽤 심플한 느낌이었다. 달리기, 오직 달리기 하나만으로 캐스팅이 된 것이었다.
아전체 마지막 우승 영상을 넘기자, 동일 방송사의 프로그램인 ‘쉬지 말고 달려라’의 장면도 나왔다.
아, 내가 좀 잘 뛰긴 했지. 기존 패널들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어그로를 끌며 뛰어다니던 모습이 잡혀 나왔다.
근데 그럼 뭐 하냐고요. 오늘은 배구인데. 다른 이들의 영상을 확인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영 찜찜했다.
불길한 예감이 정답이었다는 것처럼 왼편에서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오늘의 특별 게스트! ◇◇모터스 소속 원성아 선수, □□은행 소속 박현선 선수를 모십니다!”
길쭉한 팔다리와, 아이돌인 우리를 훨씬 웃도는 신장. 오늘 녹화의 주인공이자 멘토가 되어 줄 배구 선수들이었다.
프로들이 멘토로 나와서 함께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뒤 미션이 하드한 편이라 걱정이 앞섰다.
“안녕하세요. ◇◇모터스, 원성아입니다.”
“□□은행 윙스파이커 박현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다른 출연진들 역시 비슷한 심경이었던 것 같았다. 인터너를 제외하고도 음악 방송에서 오고 가며 얼굴을 마주하곤 했던 선배 아이돌 그룹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럼 오늘 배울 종목도 알았고, 선수들도 모셨으니까. 자! 최종 미션을 확인해 봐야겠죠?”
교육 이념에서 끝나면 좋았을 것을… ‘온 동네 예능 잔치’에는 항상 마지막에 미션이 존재했다.
대체로 배웠던 것을 사용하여 뭔가를 이뤄 내는 것이었다.
제발, 제발, 왠지 가운데에서 웃고 있는 선수 둘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저기서 지면 벌칙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운동만으로도 벅찬 하루에 벌칙까지라… 벌써 눈앞이 다 캄캄했다.
“오늘의 미션 공개합니다~!”
[최종 미션 – 원성아, 박현선을 이겨라!]
“엑?!”
“…저게 가능해요?”
“스톱!”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날을 세워 T자를 그리자 옆에 있던 권혜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PD에게 항의했다.
“선수님들을 어떻게 이겨요! 이겼으면 저 태릉에 있었어요!”
“푸핫!”
어이는 없지만 여기에는 나도 공감하고 있던 바였다. 절박한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한마디를 얹었다.
“전 달리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데요. 저기, 선수님들, 배구에서 달리기가 중요한가요.”
“볼을 쫓아가는 스피드가 있는 건 좋은 일이죠.”
“…근데 그 볼을 쫓아가는 동체 시력이 별로면요.”
“…어, 음……. 현선아, 패스.”
“아, 왜, 나야.”
비관적인 말에 원성아 선수가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아무튼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그걸 정리하고자 MC 둘이 진압에 나섰다. 물론 여기도 미션에 함께 투입되는 데다가 실패하면 페널티까지 있었기에 난처하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 김진탁, 추하다. 애들 데려와서 뭐 하는 거냐.”
“형, 맨날 게스트 분들 핑계만 대고…….”
“내 나이가 쉰이야! 근데 저번 벌칙에서 뭐 시켰어! 매운 거 먹고 눈물 콧물 다 짜내고! 우리 애가 나보고 저기서 뭐 하녜!”
아무튼 저기도 흥분한 것 같았다. PD는 그렇게 어려운 조건이 아니라며 나름의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건 댁 생각이고요… 일단 을의 입장이었기에 무슨 얘기인가 자세히 들어 보기로 했다.
“오늘 미션은 ‘원성아 선수, 박현선 선수를 이겨라!’입니다… 만, 어떻게 국대 두 분을 이깁니까? 저희가 다 페널티를 준비해 놨죠. 우선 게스트 여러분들과 MC 두분은 선수분들게 오늘 하루 트레이닝을 받을 예정입니다. 각종 미션과 게임을 통해 여러 장치를 얻어 낼 예정인데, 그걸로 최종 미션인 스폐셜 게임, 초능력 배구를 진행하겠습니다.”
“…초능력 배구요?”
난데없는 단어에 모두가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자세히 들어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조합이었다.
“우선 경기는 게스트 여러분과 MC 두분이 한 팀 그리고 원성아 선수와 박현선 선수가 한 팀 입니다. 출연진 측은 20점, 선수 두 분은 30점을 획득하는 시점에서 승리하실 수가 있습니다. 초능력은 출연진만 쓸 수 있는데, 온갖 기상천외한 능력들이 다 나올 예정으로, 이건 이따가 미션을 통해 다시 하나씩 알려 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소 추잡한 경기가 될 거란 이야기였다. 1VS5도 아니고 이건 뭐 거의 2VS10의 싸움이었다. 하물며 10점이란 점수 차이까지 존재했다.
다년간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MC 둘은 할 만한 승부라며 모두를 부추겼다.
“야, 얘들아, 이거 희망이 있다!”
“…정말요?”
“아~ 너, 되게 사람 못 믿는구나.”
“아이고, 저는 믿죠, 믿고 말고요.”
탁지윤과 우정환의 상반된 반응을 구경하며 본격적인 녹화에 들어갔다.
나는 권혜성과는 눈을 마주치기가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