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제로-원-나인 보고 있냐. 이게 정말 맞는 거야?
제대로 녹화에 들어간 이후였다. 배구용 신발로 갈아 신고 기초 동작부터 배우는 시간이 이어졌다.
배구라면 공을 상대방 네트에 넣는 게 끝이라고 알고 있던 나였다.
스파이크는 뭐고, 토스는 또 뭔데. 삐거덕거리는 관절에 자세를 잡아 주고 있던 원성아 선수에게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
“야, 성아야, 표정 관리, 표정 관리.”
“아, 아하하.”
“이야~ 선수분들도 여기는 무섭나 보네?”
…우리 팬덤을 말하는 건가? 이건 순전히 내 잘못이었기에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미안하다며 고개를 들지 못하자 옆에서 낄낄 웃고 있던 권혜성이 날아오는 공에 맞고 엎어졌다.
“푸학…! 해신이 형, 운동 못하는 거 다 들켰……! 으억!”
“아, 혜성이 형, 거기 있었어?”
난장판이다. 보다 못한 MC 둘이 먼저 시범을 보이게 됐다.
나이는 있었지만 오랜 프로그램 경험 덕분인지 우리 중에선 가장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권혜성이 박수를 치자 울컥한 MC 한 명이 소리쳤다.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 선배님, 진짜 잘 하신다!”
“너희는 경로 우대도 모르냐! 아니, 진탁아! 운동 유망주 특집이라며! 유망주가 우리였어?”
그렇게 간단한 기초 정보를 깨우치고 미니 게임에 들어갔다.
본미션이 아닌 이벤트성이라서 살살해 주겠다는 선수들이 몸을 풀었다.
반대편 네트에 서서 공을 올려 보라고 손짓하는데, 그렇게 작지 않던 내가 봐도 키가 큰 사람들에 시선이 내리깔렸다.
물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던 MC 한 명에게 쫄지 말라는 원성을 들었지만 말이다.
“갑니다~.”
“아, 쟤 벌써 맥아리 없어…….”
“저희 형은 저게 매력이거든요.”
“너희, 아이돌 아니냐?”
저기, 다 들리거든요. 슬쩍 공을 올리며 탁지윤을 쳐다봤다.
그나마 오늘 나온 게스트들 중에선 선수들의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던 인물 중 하나였다.
탁지윤이 가볍게 공을 넘기자 슬렁슬렁 몸을 움직인 박현선 선수가 손목을 꺾었다.
분명 힘을 푼다고 풀었는데 강하게 내리꽂히는 공에 눈동자가 떨렸다.
“읏샤!”
“권혜성, 나이스!”
“오~ 제법 하시는데요?”
우연이었는지 실력이었는지 권혜성이 그 공을 블로킹했다.
손바닥에 맞고 튕겨 나갔으나 나름의 성장이 보인 장면이었다.
그렇게 몇 번 공을 주고받으니 선수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제 어느 정도는 지식이 쌓였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초능력 획득 미션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제작진의 말에 맞춰 MC 둘이 출연진들을 긁어모았다.
“얘들아, 이리 와라.”
“네, 네~”
“어우, 나 얘네 불안해. 어떡하지, 형?”
“…일단 해 봐.”
“자, 우선, 저기, 저 아저씨 보이지?”
“저, 저기요… 저 PD인데요.”
몰래 속삭이는 것치곤 지나치게 목소리가 컸다.
마치 유치원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 줬다.
결론만 따지자면 저 양반이 아주 치사한 인간이지만, 얼굴에서 훤히 거짓말이 보이니 눈치껏 뭐가 좋은지 알아채란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PD님 표정을 보면 뭐가 당첨이고 뭐가 꽝인 능력인지 알 수 있다는 거죠?”
“그래, 신해신, 너 말이 좀 통한다! 배구는 영 아니지만, 마음에 들었어!”
“저 형은 오늘만 살아, 집 인터넷도 끊었대.”
어깨 위에 올라간 팔을 보다가 PD의 표정을 살폈다.
이거라면 내 특기지. 배구는 못해도 사람 보는 걸로는 이골이 난 상태였다.
그런 날 잘 알고 있던 권혜성이 히죽히죽 미소 지었다.
우리 둘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PD로부터 항의가 이어졌다.
물론 우리는 뒤에 서 있는 MC 둘을 믿고 있었다.
“저기, 하이사인 두 분 눈빛이 수상한데요.”
“예? 저희가 뭘 어쨌다고…….”
“배구하는 아이돌입니다! 저희 착해요!”
“와~ 얘네를 이렇게 쓰네. 형, 원래 자기 입으로 착하다고 하는 사람 중에서 진짜 착한 놈은 없지 않…….”
“쉿, 일단 우리 편이다. 공격은 삼가.”
초능력 획득 미션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연습 장면을 보며 난이도를 조정한 모양인데.
기다란 식탁 위로 놓인 페트병 여러 개에 고개를 돌렸다.
안에 들어 있는 쪽지들을 보아 저게 그 초능력인지 뭔지 하는 효과같았다.
곱게 접혀 있는 쪽지들에 원성아 선수와 박현선 선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역시 어디에 어떤 게 들어가 있을지 몰라 고민이 길어졌다.
아, PD 표정을 확인하라고 했었지.
먼저 나갈 사람을 고르던 찰나 나 홀로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메라들 사이에 앉아서 작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인물, PD였다.
첫 타자로 탁지윤이 등판한 걸 확인한 뒤에 곧바로 식탁에 올라간 페트병들을 훑어봤다.
…저거구만. 탁지윤이 쓰러트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 거기서 힌트를 하나 발견했다.
사람은 자고로 강한 상대가 나오면 지키고 싶은 것부터 확인하게 되는 법.
공을 막 던지려던 탁지윤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윤아! 멈춰!”
“어, 어?”
“뭐야, 너 왜 그래?”
“몇 번 페트병 노릴지 정했어요?”
“아니, 그냥 뽑고 싶은 거 뽑으라고 했는데…….”
MC들과 출연진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물론 제작진도 여기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지윤아, 확실하진 않은데. …너 저거 쓰러트려 볼래?”
“8번?”
가장 오른쪽 구석에 세워져 있던 페트병이었다.
정확하게 맞히지 않는 이상 쓰러트릴 확률이 떨어져서 탁지윤에겐 의외의 말처럼 들렸던 것 같았다.
가운데를 노리고 있던 것 같긴 하지만. 지금의 내가 보기엔 저게 정답이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는 듯 MC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PD가 앉아 있었다.
“…어? 맞나 본데?”
“네?”
“저기, 저 아저씨. 내가 말했잖아, 얼굴에서 훤~히 티가 난다고. 야, 혜성아, 너희 형이 8번 노리라고 하자마자 쟤 식은땀 흘린다.”
“진짜요?!”
“너희 형 뭐냐? 신해신, 너 이거 어떻게 알아냈어? 8번에 뭐가 있을 거란 걸.”
“저기요! 8번도 그냥 능력이거든요!”
“…정답이네. 야, 진짜 어떻게 알아냈냐?”
허둥거리는 피디와 흥미진진하단 얼굴로 바라보는 출연진들 그리고 사연이 궁금한 지 고개를 돌린 탁지윤에 의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서도경이나 김환준, 지원겸 같은 인간들을 상대하던 나로서는 너무도 손쉬운 상황이었다.
“지윤이가 저희 중에서 에이스잖아요. 잘하는 애가 나오면 PD님이 지키고 싶은 것부터 보실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지윤이로 확정되자마자 PD님부터 봤는데. …PD님, 8번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오른쪽에서 시선이 안 떨어지시더라고요.”
“…….”
PD가 망했다는 얼굴을 해서 작가에게 등짝을 맞았다.
“이야, 맞나 봐. 박 작가 화낸다! 야! 신해신, 한 건 했다? 지윤아, 8번이다. 무조건 8번!”
“네……!”
그렇게 탁지윤이 들고 있던 공이 허공을 날아올랐다. 목표물을 맞추기 위한 스파이크라 파워가 세지는 않았지만, 우리 중에선 명실상부한 에이스였기에 안정적으로 페트병을 쓰러트렸다.
“8번~!”
“…망했다.”
“으휴, 이 양반아.”
제작진에게서 침울한 타박이 이어지든 말든, 출연진 쪽은 잔치가 벌어져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게임에선 가장 효과가 좋은 초능력을 획득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서둘러 쪽지를 꺼내서 읽어 보는데, 그걸 확인한 MC 하나가 비실비실 웃었다.
제작진을 향해 펼쳐 든 쪽지, 그곳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초능력, 순간 이동! 상대 팀의 적 한 명을 30초간 코트 밖으로 순간 이동 시킬 수 있다. 능력 제한은 5분에 1번, 총 4회!”
“헉, 대박, 이거 지금 두 분 중에 한 분을 바깥으로 보내 놓을 수 있다는 거죠?”
권혜성의 말이 정확했다. 둘이라면 모를까 하나라면 우리끼리 어떻게 점수를 만들어 볼 수가 있었다.
20점을 다 채우진 못하더라도 몇 점 정도는 가능하겠지.
축제의 분위기인 출연진들 너머로 제작진에게서 다음 미션을 건네받았다.
매 미션마다 여러 가지 초능력을 준비해 놨다고 하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가장 좋은 것만 뽑아 간다면 우승이 그렇게 힘겨울 것 같지는 않았다.
* * *
다음은 아까보다 작아진 캔이 등장했다.
테이블과 물건이 놓여 있는 간격도 그대로였으나 월등히 작아진 대상에 제작진이 품은 독기를 눈치챘다.
다음 순서로는 누구를 내보낼까, 말이 오가는 사이에 PD는 작가로부터 한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예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해신아, 네가 보기엔 다음은 뭐냐.”
MC로부터 내게 자문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배구로는 영 실력을 보이진 못했지만, 이쪽 방면으론 신뢰를 단단히 쌓은 듯했다.
흐음, 저런 케이스는 얼굴이 가장 확실하긴 한데.
팔짱을 끼며 턱을 괴자 작가로부터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 이어졌다.
머리를 좀 써 볼까나. 내게 붙어 있는 MC에겐 작은 부탁을 해 놓은 뒤였다.
“…지금 선수 호명 해 봐도 될까요?”
“어? 그래~ 한번 해 봐.”
“혜성아, 네가 나가라. 아, 그전에 잠깐만.”
“나? 응.”
우선 권혜성을 불러냈다. 그러고는 녀석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내 얘기를 들은 권혜성이 고개를 끄덕이곤 경기장에 섰다.
다른 출연진들은 아무것도 모르겠는지 연신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래서, 뭔데.”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권혜성의 이름이 불림과 동시에 어깨를 움찔 떨던 PD의 뒷모습을 봤다.
저런 사람은 마음이 조급하면 실수를 하는 법이거든.
대뜸 손가락을 들어서 식탁을 가리켰다. 이게 포인트 동작이었다.
“어? 저기?”
“응.”
“알았어! 그럼 해 본다?”
“어? 뭐야? 뭔데?”
우정환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권혜성이 공을 들어 올리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카메라도, 작가도, 같은 편인 출연진들도 어디를 노리는지 모르는 채로 스파이크를 날리려던 와중이었다.
…됐다.
“혜성아, 멈춰!”
“오케이!”
등을 보이고 있던 PD가 식탁 쪽을 바라보는 걸 확인했다. 가장 먼저 눈이 꽂히던 부분, 4번, 이번엔 4번이 정답이었다.
“권혜성, 4번.”
“롸져~”
“…엥? 이게 뭐야?”
뭐긴 뭔가요. 페이크죠. 다른 게스트의 물음에 가볍게 미소 지었다. 권혜성의 볼이 4번 캔을 쓰러트리는 걸 확인했다.
“…해신이 형, 지금 사기 친 거야?”
“아직 안 했잖아. 사기는 아니고, 편법을 좀 쓴 거지.”
전달도 없이 진행되는 공격에 PD를 단속할 작가도 저지한 뒤였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그 작전명에 맞춰서 모두가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야기했다.
귀가 얇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지키고 싶은 걸 돌아보게 되는 법이었으니까 말이다.
이건 권혜성이 공을 던지겠다고 미끼를 푼 이후라 안도하며 몸을 돌릴 PD를 예상한 것이었다.
그 뒤 일은 가장 먼저 쳐다보는 캔을 확인하면 되는 것뿐이었다.
척하면 척이라고. 권혜성과 나는 이런 일이라면 아주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고 있었다.
끼 스탯과는 상관없는 것 같지만, 우리의 전문 분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