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그렇게 권혜성과는 몇 번이나 다양한 수법을 써 가며 방송 분량을 챙겼다.
처음에는 영 뻣뻣하게 구는 것 같더니, 이런 쪽에서 머리를 쓸 줄 알았냐며 메인 MC들에게 칭찬을 받았을 정도였다.
PD도 권혜성과의 케미를 비롯하여 ‘쉬지 말고 달려라’에서 보인 지능적인 면모를 높게 사, 나를 부른 것 같았는데…….
내가 지나치게 잘 빠져나가자 당황했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제법 길게 이어진 녹화의 중후반부에 돌입했을 무렵이었다.
정말 마지막 메인 미션인 선수들과의 경기를 앞두고 출연진 측에서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키야~ 이렇게 여유롭기는 또 처음이네.”
“저희 지금 좋은 상황인 거예요?”
우정환의 질문에 MC 중 한 명이 제작진 측을 가리켰다.
“저기 저 아저씨 지금 얼굴 보이지? 야 야, 봐라, 쟤네 지금 긴급회의 들어갔다.”
아무래도 우리가 상당히 유리한 고점을 차지했던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능력이길래 그러는 거지. 나와 권혜성은 그냥 좋은 걸 뽑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제작진 측에서 팔로 T자를 그리며 다급한 모습으로 대화 나누는 걸 보니, 우리가 큰일을 해내긴 해낸 모양이었다.
얼떨떨하게 권혜성이 서 있던 곳을 바라봤다.
다른 MC 한 명에게 잘했다며 무한 쓰다듬을 받고 있던 권혜성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형, 우리 되게 잘했나 봐! 선배님이 이런 날 되게 드물다고, 오늘은 마음이 편하다고 하셨어!”
“…그래?”
“야, 해신아, 혜성아. 너희가 진짜 큰 거 해냈다. 저 양반, 내가 티는 잘 난다고 했어도 한두 번만 당황하고 빠져나간단 말이야? 근데 오늘은 제대로 물 먹인 것 같아. 거~ 이제 와서 능력 바꾸는 치사한 수는 안 쓰지? 애들이 보고 있어! 부끄러운 줄 알아!”
“아, 아니에요! 저희 그런 짓은 안 했ㅇ…….”
“으이구~.”
MC 한 명이 제작진을 향해 얼른 능력이나 내놓으라며 닦달했다.
제작진 측에서도 아니라고 해명은 했지만 뭔가 다른 꼼수를 부리려고 했던 것 같았다.
이에 공을 들고 있던 탁지윤과 우정환도 MC들의 말에 힘을 실었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아이돌이란 위치를 이용해 불쌍한 척을 해 댄 것이었다.
…팬덤을 잘 활용하네. 선배 아이돌 그룹까지 인터너 둘의 행동에 합류하니, 반대편에 서 있던 선수 둘이 다소곳한 자세로 경기장에 들어갔다.
이건 무슨 능력이든 상관없으니까 우리는 매서운 여론에서 제외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 광경을 확인한 메인 PD가 한숨을 내쉬며 다른 제작진들에게 손짓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뒤에서 이런저런 짐을 잔뜩 들고 있던 제작진들이 PD의 지시에 따라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산타클로스가 메고 다닐 법한 커다란 주머니에서부터, 손바닥 위에 놓인 호루라기까지. 그 종류가 제법 다양해 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메인 PD로부터 여러 가지 쪽지를 건네받았다.
“이건 정말 긴급으로 짠 게 아니고, 원래부터 있던 포맷입니다. 출연진 여러분은 지금까지 미니 게임을 통해 다양한 초능력들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아, 또 뭐야~”
“그 능력은 개인의 선택으로 골라갈 수 없습니다. 여기 보이는 쪽지를 골라 주시면 되시겠습니다. 그럼 그 쪽지를 가져가신 분이 해당 쪽지에 적힌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 한마디로 랜덤 지급이다?”
“네.”
PD의 말에 조용히 남은 인원들을 돌아봤다.
출연진은 메인 MC 둘을 제외해도 6명 이상. 그런데 우리가 미니 게임을 통해 뽑을 수 있었던 능력은 6개가 전부였다.
나머지 인원은 날 것의 상태로 저 반대편에 서 있는 선수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건데.
거기서 모두가 비슷한 고민을 했는지 망설이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사실 다른 팀원들이 점수를 따 오면 적당히 움직여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분량도 필요하고, 저 엄청난 피지컬의 상대방에게서 어떤 공이 날아올지 몰랐다.
그래서 초능력을 걸고 눈치 싸움이 발발한 듯했다.
…난 한 걸음 뒤로 빠져 볼까. 사실 분량이라고 한다면 제작진 측을 놀리며 초능력을 획득한 시점에서 어느 정도 딴 것 같았다.
심지어 초반에는 삐거덕거리는 걸로 MC들에게 타박을 많이 들었으니, 문제만 없으면 꽤 활약한 인물처럼 비칠 듯했다.
…혜성이 녀석은 지금까지의 노고를 밀어서 뭐라도 하나 쥐게 하자.
나도 끼 스탯이 걸려 있었으나 여기엔 비슷한 조건을 해야 하는 놈이 하나 더 있었다.
권혜성. 아까부터 내 어깨에 매달려 쪽지 통만 살펴보고 있던 놈이었다.
손을 들어 권혜성에게 쪽지 하나를 뽑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려던 찰나였다.
권혜성이 나와 비슷한 타이밍에 맞춰 같이 입을 열었다.
“저기…….”
“저기 있잖아요!”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출연진들이 이쪽을 돌아봤다.
“오디오 물린다~ 한 놈씩 말해라.”
“뭐야, 너희 누가 그룹 아니랄까 봐. 아까부터 되게 호흡 잘 맞네.”
MC들의 이야기에 권혜성과 서로 마주 봤다.
“저렇게 호흡이 좋으니까 PD님이 당하셨구나.”
“저, 정환아.”
“지윤, 우리도 수련하자.”
“갑자기?”
아무튼 말 한마디만 꺼내면 참 시끄러워졌다.
눈만 깜빡거리고 있던 권혜성이 얼마 가지 않아 나를 보며 웃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내가 웃기기라도 한 모양인데.
먼저 얘기하라며 턱짓해 주자 폴짝 점프를 뛰어 내 등판에 제 무게를 실었다.
내가 무거워서 휘청거리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절대 물러서려 들지 않았다.
“저희 형 능력 하나만 주세요! 보시다시피 달리기 빼면 좀 유리 몸이라서요!”
“…야! 누가 유리 몸이야!”
“아, 정말 눈물겹다~ 하이사인 둘의 우정.”
“근데 권혜성, 네 형, 약간 삐거덕거리는 거 빼면 머리 쓰는 걸론 우리 중에서 넘버원급이던데. 너, 잊었냐. 얘가 쟤 물 왕창 먹였다.”
MC가 내 뒤를 이어 PD를 가리켰다.
PD로부터 다소 끈질기며 서글픈 시선이 오가는 것 같아 눈을 내리깔던 순간이었다.
권혜성, 넌 왜 내가 할 말을 네가 하고 있냐. 나 역시도 지지 않고 손을 들어 발언했다.
저 녀석의 끼 스탯을 올려 줘야 쟤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이었다.
“저보다는 혜성이가 하나 가져갔으면 하는데요…….”
“크, 눈물 난다. 눈물 나~”
“쟤도 웃기다. 저기, 너네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해신아, 혜성이 쟤도 여기서 너랑 같이 PD 쟤 물 먹인 애 거든?”
다른 출연진들도 지금 이 상황이 웃기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나는 우리 둘 중 한 명이라도 초능력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내가 받더라도 권혜성에게 양도해 줄 생각으로 꺼낸 이야기였다.
이런 우리 둘을 보던 MC 둘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도 양심이 있지. 난 원래부터 너희 둘 모두한테 하나씩 줄 생각이었는데.”
“어? 형도? 나도… 솔직히 이거 반 이상은 너희가 따온 거잖야.”
그런데 신파를 찍을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메인 MC 둘의 발언에 살짝 놀랐다. 다른 출연진들도 반박하지 않는 걸 보니 둘 다 받아 갈 느낌이었다.
예상보다 술술 풀리는 분위기에 권혜성과는 다시 서로를 마주 봤다.
그렇게 누가 쪽지를 뽑을지 결정하는 시간을 보내며 제작진에게서 원통 하나를 건네받았다.
차례대로 느낌이 오는 종이를 뽑아 펼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권혜성과 나도 동시에 쪽지를 열며 제작진을 바라봤다.
[슬로우 슬로우]
[뭐든지 분신술]
차례대로 내 것과 권혜성이 들고 있던 쪽지에 적혀 있는 멘트들이었다. …슬로우 슬로우와 뭐든지 분신술? 이런 능력이 있었던가.
미니 게임을 진행하던 당시 짤막하게나마 능력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이름은 알 길이 없어서 기분이 묘했다.
모든 쪽지가 공개되고 나서부터 이 능력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됐다.
“해신 씨의 능력, 슬로우 슬로우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슬로우 슬로우는 말 그대로 해신 씨를 제외하고 모두를 느리게 만들 수 있는 능력입니다. 기회는 단 3번, 공이 허공에 띄워져 있을 때만 가능하단 점을 주의해 주세요.”
아무래도 이건 3점을 먹고 들어가라는 이야기 같았다.
자세한 건 직접 써 봐야 알겠지만 제법 괜찮은 능력을 부여받았다.
만족감에 뒤로 물러나려던 찰나, 들은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사용 방법은 공이 띄워져 있는 순간,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고 주문을 시전하시면 됩니다. 슬로우, 슬로우~”
“…네?”
거기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예능이라지만 이건 좀…….
차라리 능력이 없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출연진들도 제작진들도 이런 나를 기다려 줄 여유는 없었다. 넋을 놓고, 아니 저기 따위의 말을 내뱉는 나를 카메라가 줌인하는 걸 느꼈다.
당황한 나를 두고서 권혜성에게 간 능력에 대한 설명이 소개됐다.
권혜성은 뭐든지 분신술이라는 누가 봐도 튀는 작명이 마음에 들었던 듯했다.
발을 동동 띄우며 제작진을 바라보다 작은 주머니를 하나 건네받았다.
빨간색 복주머니처럼 생긴 소품이었는데, 그 안을 열어 보자 가짜 나뭇잎 3장이 나왔다.
“나뭇잎? 이건 뭐예요?”
권혜성의 질문에 우정환이 궁금하다는 듯 제작진 측을 바라봤다.
“예로부터 분신술을 사용하는데 나뭇잎이 필요하다고 했죠.”
“아, 너구리!”
“네, 혜성 씨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뭐든지 분신술은 말 그대로 뭐든지 바꿀 수 있는 능력입니다. 공이 천장에 띄워져 있을 때만 사용한다면 원하는 걸로 변경할 수 있습니다.”
“오예!”
듣는 것으로는 가늠이 잘 가지 않는 능력이었다. 그러니까 저 배구공을 권혜성이 원하는 다른 물체로 바꿔 주겠다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권혜성이 신난다는 듯 제자리 점프를 했다.
뭐, 시전자가 알아들었으면 그만인 것 같기도 했다.
권혜성 역시 나와 비슷하게 능력에 대한 사용 방법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민망하다 못해 다소 충격적인 주문법에도 권혜성은 웃었다.
“그러니까, 나뭇잎 한 장을 꺼내 들고 뭐든지 분신술~ 이라고 외치면 되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권혜성의 능청에 부끄러움은 전부 내 몫이었다.
재밌겠다며 부러워하는 우정환의 뒤에서 탁지윤이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차라리 나는, 일반인 할래.”
하지만 탁지윤의 소원은 이뤄지지 못했다. 남아 있던 초능력 중 하나가 탁지윤에게 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권혜성과 투 톱으로 운동 신경 측면에서 인정받고 있던 멤버가 저 녀석이었다.
우정환에게 등을 떠밀려 제작진 앞에 선 탁지윤이 제발 평범한 거였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신은 없었나 보다. 탁지윤이 좌절했다.
“보, 복사 복사…….”
“네, 바로 그겁니다.”
탁지윤은 공을 여러 개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우리가 공격할 타이밍에 우수수 쏟아 내면 상대 선수들로부터 득점할 수 있는 기회였다.
민망함에 얼굴 위로 양손을 올린 탁지윤이 여기를 힐끔거렸다.
…알아서 해라, 사실 나도 남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쟤나 나나 여러모로 조용한 성격이라 고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