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90화 (289/328)

290화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됐다. 원성아 선수와 박현선 선수 단둘만이 들어간 상대 팀의 네트를 바라보다가 인파로 득시글거리는 우리 쪽을 살폈다.

왜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도 오합지졸처럼 느껴지지?

녹화를 위해 한 줄로 서 있을 땐 몰랐는데, 적으로 마주하니 선수들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으, 으악!”

“야, 공을 피하면 어떡해!”

경기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동시에 박현선 선수가 원성아 선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불안하다 싶었더니, 비운동인과 하는 경기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강한 스파이크가 네트를 넘어왔다.

체격이 좋고 운동 실력이 나쁘지 않았던 우정환의 비명에 온몸이 굳었다.

저놈이 저렇게 질색 팔색 할 정도라면, 나는 거의 받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나이스~”

“이거 쉽겠는데?”

선수 측 진영으로 1점이 카운트되고, 메인 MC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젊은 피들, 너희 뭐하냐!”

“젊은 피들도 맞으면 아프잖아요~”

권혜성의 능청에는 나름 공감하는 바였다.

초능력이니 뭐니 하며 뽑을 때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맞으면 최소 멍일 공 앞에선 죄다 소용이 없어 보였다.

이러다간 정말 순식간에 패배해 버리고 말겠는데. 그러나 그건 안 될 노릇이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나와 권혜성의 끼 스탯이 걸려 있었으니까.

앞의 분량으론 어느 정도 지분을 차지했을 것 같긴 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마지막 미션에서 지면 시스템이 이걸 걸고 넘어질 것 같았다.

제로-원-나인이야 살살 구슬리면 될 것 같긴 하나… 나는 아직 그 녀석이란 존재가 신경 쓰였다. 왠지 깐깐한 것 같단 말이지. 게다가…….

“아, 오늘 초능력인지 뭔지 상대 팀에게 페널티를 많이 먹여서, 우리 쪽 벌칙이 셀 거 같은데.”

MC중 한 명의 말이 크게 거슬렸다. ‘온 동네 예능 잔치’에 매번 있곤 했던 벌칙 타임이었다.

온 동네 예능 잔치는 마지막 미션으로 오늘처럼 선수들과 대결을 펼치거나, 출연진들이 반으로 갈려 승부를 보곤 했다.

거기서 패배한 출연진들에게는 늘 소소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벌칙들이 주어졌다.

작게는 한겨울의 물 폭탄부터, 크게는 꽤 오랜 시간 창피함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들이 이어졌다.

…그건 절대 싫어, 이미 녹화 초반에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겐 더 이상의 이미지 하락은 안 되는 일이었다.

분량이고 뭐고 간에 일단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으니까.

탁지윤이 날린 공이 원성아 선수에게 가볍게 막히는 걸 보며 침음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판단에 옆걸음으로 MC 중 메인을 맡고 있던 개그맨에게 다가갔다.

“한번 끊고 가죠, 작전을 좀 세워야 할 것 같아요.”

“해신이, 너. 무슨 생각 좀 있어?”

“생각까진 아니고… 흐름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아서요.”

타임 기회는 팀당 3번, 벌써 한 번을 쓰는 게 아까울 순 있었다.

그래도 이대로 지진 부진 상대방에게 끌려다니기만 하면서 피를 보는 것보단 내어 줄 건 빠르게 내어 주고 팀을 재정비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MC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도 부여된 초능력이 있는 데다가, 아까 전 미니 게임에서 잔머리를 쓰는 걸 목격했으니까 믿어 주겠다는 의미 같았다.

“작전 회의!”

“온 동네 팀, 작전 회의 사용하셨습니다!”

MC의 외침에 제작진으로부터 빨간 깃발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출연진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선수들은 숨 하나 차지 않다는 태연한 표정으로 여길 바라봤다. 네트 너머에 서 있는 두 장신이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자, 이제 말해 봐. 무슨 생각인데.”

“어? 해신이 형 의견이에요? 그럼 믿고 따라야지~”

“응.”

너무 그러니까 부담스럽잖아. 유어돌 때부터 잘 따르던 우정환과 문채민을 통해 알게 된 탁지윤이 긍정하는 듯한 뉘앙스로 나를 바라봤다.

민망함에 손날을 세워 시선을 차단하곤 권혜성을 비롯하여 다른 선배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을 훑었다.

사실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리 복잡한 게 아니었다. 언젠가 나오긴 했겠지. 그걸 조금 앞당겨서 시도해 보려는 것뿐이었다.

“저희, 시작부터 너무 끌려다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서요. 보니까 선수분들, 저희를 봐줄 생각이 아예 없어 보이더라고요.”

“아, 하긴 그런 것 같더라. 명우야, 너 전면에 있을 때 봤지.”

“네, 와~ 그렇게 센 공도 아니었는데, 블록을 진짜 한 이만큼 뛰셨나?”

“저도 봤어요! 무슨 암벽인 줄.”

앞쪽에서 공을 넘기려던 출연진 하나가 자신의 목격담을 말했다.

아마추어의, 그것도 팀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초짜들을 상대로 그 정도의 진심을 보이고 있다면, 정극으로 나가는 건 아예 무리란 뜻이었다.

“그 정도면 선수분들, 초장에 저희를 누르려는 속셈인 거예요.”

“와, 멘토님들 그렇게 안 봤는데……!”

우정환의 목소리에 선수들이 여길 보며 웃었다.

무슨 내용인지 듣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음료수를 마시며 미소 짓는 얼굴이 퍽 무서웠다.

“넌 왜 작전을 유출하고 그러냐.”

우정환의 뒷덜미를 누른 MC 하나가 마저 말을 이어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손짓에 맞춰 몸을 더욱 낮게 숙이며 아까 봤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저기가 저렇게 나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어? 혹시 초능력?”

“응, 맞아.”

내 질문에 탁지윤이 제작진에게 받았던 소품을 확인했다.

다른 게 아니라면 이것뿐이겠지. 선수들의 초반 맹공격에 대한 이유 말이다.

아마도 선수들은 초능력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안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소지하고 있는 당사자들도 애매모호하단 반응이 이어졌는데. 그걸 받아 내야 할 선수들에겐 미지의 힘처럼 느껴졌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초반부터 맹렬한 기세로 달려 나왔을 확률이 높다는 분석이 나왔다.

“런 앤 건 같은 건가?”

“그건 농구 용어 아니냐?”

“그래도 의미는 얼추 비슷하잖아요.”

우정환의 말이 정답이었다. 상대방이 유리한 고점에 치닫기 전에 공격으로 모든 상황을 봉쇄하는 것.

아마 그게 선수들의 최종 목표였을 것이다.

초능력이 있어도 못 쓰면 그만이었으니까 말이다.

조금만 더 당황했다면 제대로 능력도 못 쓰고 어버버한 상태에서 뒤집기는 힘들 점수 차까지 갔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이건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이 준 무기가 얼마나 대단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돌파구는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출연진들에게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게 바로 우리도 선수들과 비슷한 수법을 쓰자는 것이었다.

“저희도 속공으로 가죠.”

“…우리한테 속공이 있어?”

권혜성의 물음에는 피식 미소 지었다. 우리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말하고 있는 속공은 전혀 다른 거였다.

“정식 공격만 공격이라고 생각하지 마. 잘하는 걸로 빠르게 몰아붙이면 그게 곧 속공이지.”

“…아! 초능력으로 몰아붙이자고?”

권혜성의 이야기는 정확했다.

선수들이 자신이 가진 무기인 배구 실력으로 우리를 몰아세우고 있었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무기인 이 아이템을 이용하여 선수들을 몰아붙이면 되는 거였다.

“저희가 가진 능력은 총 6개 그리고 능력 한 개당 유효 횟수는 3번이잖아요.”

“6 곱하기 3을 하면… 모두 성공했을 시에 최대 18점은 먹고 들어갈 수 있다 이거지?”

“네.”

선수들은 30점을 채워야만 우리에게서 승기를 가져갈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아마추어임을 적용받아 커트라인이 20점에 불과했다.

초능력으로 점수를 모두 따내고, 그에 선수들이 당황한 사이 2점만 더 얻어 낸다면…….

“승리할 수 있겠는데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선수들이 초능력에 대해 빠르게 적응해 버렸을 때인데.

일단 해 보지 않으면 뒷일은 모르는 거였다.

그래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승부수를 띄워 보려고 했다.

“열여덟 번을 모두 성공이라… 그것도 연달아서?”

“그래서 작전 회의 시간을 쓴 거예요. 능력을 갖고 있으신 분들?”

“네~”

“나도지?”

“잠깐만 모여 주세요. 아, 비능력자 분들의 도움도 필요해요.”

몇 점 정도 먹은 건 아직 만회가 가능한 시점이었다.

서로가 지닌 능력을 살피며 상대방이 적응할 수 없는 루틴을 짰다.

* * *

“그럼 다시 본경기 진행하겠습니다!”

제작진의 부름에 모두가 정해진 대형으로 이동했다. 기다려 준 선수들은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얼굴이었다.

…긴장되는걸.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순식간에 빼앗긴 점수를 확인했다.

3점, 네트 위로 공이 몇 번 오가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참히 당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순순히 당할 수만은 없었다.

제작진의 깃발이 들어 올려짐과 동시에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 공격은 우리 순서, 첫 번째 공은 공격으로 유효가 되지 않을 테니까, 선수들의 스파이크 타이밍을 잘 노려야만 했다.

“올렸다!”

“형! 원성아 선수님!”

“오케이~”

MC 중 한 명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다른 MC에게로 향했다.

부탁해요. 원로 개그맨이던 MC에게 주어진 초능력을 쓸 차례였다.

“코트 체인지! 장외!”

“…어?”

MC의 외침과 동시에 바닥으로 공이 떨어졌다. 데구르르, 바깥까지 빠져나간 공을 보고 제작진이 삑- 호루라기를 불었다.

선수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단 얼굴로 여길 돌아봤다. 오랜 시간 작전 회의를 한 것치곤 너무도 쉽게 점수를 얻어 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피식, 실소가 터짐과 동시에 점수 패널이 올라갔다.

[ 1 : 3 ]

“뭐야? 우리가 아니라 왜 저쪽 팀이?”

패널이 올라간 곳은 출연진 쪽이었다. 거저먹은 1점에 MC와 우정환이 하이 파이브를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제작진의 설명이 이어졌다.

“고광록 씨가 초능력 ‘코트 체인지’ 중 장외를 사용하셨습니다. 본 능력은 자신의 코트와 다른 면적의 땅을 임시로 체인지하는 능력입니다. 장외, 상대방 코트, 원하는 부분 지정 이렇게 세 곳을 사용할 수 있는데, 방금 장외를 선택하셨으므로 박현선 선수의 공은 장외 처리가 되었습니다.”

“예?”

쉽게 말하자면 점수가 되어야 할, 인 코트가 아웃 코트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선수들에게는 언제 능력을 사용할지 모르니까 공격하기 꺼려지는 환경을 구축했다.

“아저씨가 하나 해냈지?”

“네! MC님 최고~!”

좋아, 시작부터 흐름을 가져오는 것에 성공했다. 그럼 이다음은 저기군. 자동으로 한 명을 바라봤다.

“다시 경기 진행해 보겠습니다.”

점수를 얻지 못한 쪽부터 공을 띄운다는 특별 룰에 맞춰 찜찜하단 표정의 박현선 선수가 공을 날렸다.

호선을 그리며 우리 쪽에 안착한 공을 받아 낸 건 권혜성이었다.

혜성아, 부탁한다. 권혜성이 씨익 길게 입술을 찢었다.

팡! 가볍게 튕겨 오른 공을 받으러 가던 원성아 선수에게 권혜성의 외침이 쏟아졌다.

“뭐든지 분신술! 탁구공!”

“네?”

팡! 현재 상황으로는 무사히 공을 받아 낸 원성아 선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점수는 처리되지 않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배구공 잠시 빼겠습니다! 탁구공 들어갑니다!”

“예~!”

탁구공과 탁구채를 든 권혜성이 원성아 선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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