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다시 갈게요~”
“네?!”
“원성아 선수, 아까와 같은 동작으로 공을 받아 주세요.”
뭐든지 분신술, 말 그대로 권혜성이 공격하던 타이밍에서 외친다면 뭐든 바꿀 수 있는 능력이었다.
아무리 배구 선수라고 한들, 네트 너머로 들어오는 탁구공은 리시브하지 못하겠지.
어떻게 손에 닿게 한다고 한들, 말랑한 엄지손가락으론 공을 충분히 띄우는 게 불가능했다.
“어, 어?!”
“와, 이거 당했네.”
뒤에서 올라올 공을 기다리던 박현선 선수가 어깨에 힘을 뺐다. 원성아 선수가 탁구공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짝다리를 짚고 웃는 모습을 발견했다.
삑- 그리고 다시 한번 제작진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며 점수 패널이 넘어갔다.
[ 2 : 3 ]
“우악! 성공했다! 해신이 형!”
“어어, 알겠으니까 거기 그대로 있어.”
권혜성의 외침에는 얌전히 있으라며 녀석을 다독였다. 흐름을 탔을 때 계속 들어가야지. 내가 짠 작전이 바로 이거였다.
“너, 머리 잘 쓴다?”
“좋은 능력들이잖아요.”
상대방을 당황 시키기엔 아주 그만인. 어이는 없어도 불규칙적으로 돌리기만 하면 적응하는 게 아예 힘들어질 항목이었다.
그리고 그 사령탑은 출연진들이 갖고 있던 능력이 어떤 건지 전부 파악해 둔 내가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끼 스탯 올리는 데에는 어느 정도 일조하겠지.
손에 쥔 체스 말을 매만지며 다음 경기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다음은 너야, 탁지윤. 머리가 쉼 없이 굴러갔다.
* * *
“와, 이거 말렸다. 원성아! 침착해!”
“…이거 침착이고 뭐고 할 게 없잖아. 패턴이 계속 바뀌는데?”
[ 14 : 8 ]
선수 측 팀에서 타임 요청이 떨어졌다. 탁지윤, 잘했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온 탁지윤의 공격 차례에 녀석이 공격했다.
처음에는 영 부끄러워하는 것 같더니. 아무래도 탁지윤은 시키면 잘 해내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복사 복ㅅ……. 내 입으로 말하기엔 차마 민망한 능력을 떠올렸다.
당황한 선수들로부터 공이 날아오고 무사히 리시브한 뒤 찾아온 공격 타이밍에 탁지윤이 능력을 썼다.
복사, 이름처럼 뭐든지 복사할 수 있다는 능력을 네트를 넘어가고 있던 공에게 부여한 것이었다.
‘ㅂ, 복사 복사, 배구공 5개!’
삑- 선수들이 무사히 공을 받아 내건 말건 제작진 쪽으로부터는 다시 게임 정지 요청이 내려왔다.
이제는 익숙한 일인지 선수들도 체념한 얼굴로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탁지윤 씨, 복사 복사 능력 사용하셨습니다. 선수 측으로 배구공 5개가 떨어집니다. 5개 모두 받아 내셔야 인정됩니다.’
그걸 어떻게 해내. 선수가 정규 배구 경기만큼 분포되어 있는 게 아닌 이상 단둘로는 절대 불가능한 룰이었다.
애초에 우리가 노리던 게 그거였으니까.
어차피 안 될 거라며 몸을 피한 원성아 선수를 바라보며, 탁지윤과는 손뼉을 부딪쳤었다.
남은 점수는 6점……. 이제 우리가 쓸 수 있는 능력은 합쳐서 4번.
무슨 대화를 나누는 중인지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 진영과 네트를 번갈아 가리키는 선수들을 바라봤다.
이 웃기지도 않은 게임에서 허무맹랑한 능력들을 상대로 8점이나 가져가다니.
초능력인지 뭔지가 없었다면 정말 절대로 불가능한 게임이었음을 직감했다.
그래도 나름 운동을 했다고 목이 타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무렵이었다.
등 뒤로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윽, 뭐야. …권혜성?”
“형, 남은 건 어떻게 해?”
“…너도 세고 있었냐.”
우리가 가진 능력 개수. 내 말에 권혜성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방이 눈치를 채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지금까지는 100% 공격에 성공했지만 모든 능력을 합쳐도 승리 점수인 20점에는 2점 모자란 상황이었다.
원래 작전대로라면 능력을 쓰는 척 페이크를 걸어 맨몸으로 2번 정도는 점수를 따왔어야만 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견고한 상대 팀의 수비에 능력이 아니면 역으로 당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중간에 다시 한번 타임을 외치고 작전을 수정한 게 잘한 일이었을까.
이래저래 복잡한 머리로 고민하자, 탁지윤이 우정환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기 팀, 회의가 길어지는 것 같지?”
“근데 그럴 만하잖아. 해신이 형……! 작전 진짜 좋았어요! 형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선점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아니야, 다들 잘해 줬는걸.”
탁지윤의 칭찬에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지금까지는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떠올렸을 방법이었다.
남은 건 뒤처리를 어떻게 해내냐는 것인데. 대충 앞으로 상대 팀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유추되었다.
속공은 포기하고, 시간을 끄는 방식으로 나오겠지.
우리가 초능력으로 패턴을 바꾸며 빠르게 승부를 보려고 했으니까, 저기는 그 초능력을 최대한 틀어막으며 점수 차를 회복하려 들 게 분명했다.
“흐음, 난처한데.”
“뭐가?”
권혜성의 질문에는 몸을 숙여 속삭였다.
“우린 남은 초능력 기회를 다 점수로 만들지 못하면 난처하거든. 그걸 전부 성공해도 2번은 맨몸으로 공을 네트에 밀어 넣어야 하는데. 선수들의 방어를 뚫는 게 거의 불가능하잖아.”
당장 승리가 고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방심은 안 될 일이었다.
6점 차이라고 한들, 프로 선수들에겐 초능력이 없는 우리야 누워서 식은 죽 먹기였다.
이게 끝이 나 버리면 22점 정도는 순식간에 빼앗길수도 있었다.
그럼 정말 예능 역사상 말도 안 되는 역전패를 당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만큼은 안 되지.”
절대 안 되고말고. 그래서 현재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노렸다.
남은 능력은 내가 1개, 권혜성이 1개, MC와 탁지윤 1개.
남아 있는 능력들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문득 머릿속으로 작전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이거 가능하려나?”
“응?”
“뭐가?”
눈앞의 두 녀석, 탁지윤과 권혜성이 이번 경기의 중요한 열쇠였다.
* * *
“그럼 다시 본경기 시작하겠습니다!”
제작진의 외침과 동시에 곧바로 MC의 능력을 사용해 점수를 얻어 냈다.
우리에겐 시간을 끄는 게 더 불리하다는 사전 설명에 맞춰 빠르게 넘어가는 패널을 보고 고갯짓했다.
[ 15 : 8 ]
원성아 선수와 박현선 선수는 게임 중간부터 내가 이 팀의 사령탑인 걸 눈치챈 것 같았다.
다시 시작되려는 게임 속에서 따끔따끔한 시선을 느끼며 본격적인 페이크에 들어가기로 했다.
혜성아, 부탁한다……! 곡선을 그리며 넘어오는 공에 권혜성을 바라보곤 큰 소리로 외쳤다.
“권혜성!”
“응!”
“성아야!”
“저 능력은 어떤 공이 올지 몰라서 혼자는 안 돼, 같이 들어와!”
그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어.
배구공을 받기 난처한 물체로 바꾸는 능력이 있는 권혜성에게 시선이 쏠림과 동시에 양쪽으로 나뉘어 서 있던 박현선 선수와 원성아 선수가 권혜성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이때야, 탁지윤. 권혜성이 공을 받아 능력을 쓰지 않고 손바닥을 이용하여 옆으로 밀어냈다.
“헤헷, 실례했습니다~”
“……!”
“이런……!”
“탁지윤!”
권혜성에게 공을 받아 낸 탁지윤이 네트 위로 가볍게 공을 넘겼다.
툭- 데구르르. 권혜성의 초능력에 긴장하고 있던 선수들로부터 침묵이 이어졌다.
“어? 뭐야?”
물론 우리 팀의 출연진들 대다수도 어안이 벙벙하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 16 : 8 ]
이게 아까 내가 짰던 작전 중 하나였다. 둘 다 너무 초능력을 경계하고 있다니까.
선수들은 시간을 끌고 싶어 했던 터라, 공격 하나, 하나를 전부 받으려는 맹점이 존재했다.
뭐, 그것도 초능력 배구라 가능한 일이겠지만. 나는 그걸 이용해 보기로 했다.
상대 팀 진영에 인원이 둘뿐이라는 페널티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형~!”
“서, 성공했어!”
“잘했다, 둘 다.”
가까이 다가온 탁지윤과 권혜성과는 둥글게 서서 손뼉을 마주쳤다.
“야, 너희 언제 이런 걸 짰어!”
“죄송해요. 선수분들 속이려면 팀원들도 몰라야 할 것 같아서요.”
그새 다가온 다른 출연진들과 MC들에겐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선수들 측에서 작전 타임을 외치던 시기에 맞춰 나온 이 작전은 권혜성과 탁지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서 있던 우정환에게만 알려진 내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프로들인데. 표정에서 들킬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아래에 머리를 쓴 것이었다.
“아~ 당했네.”
“지금 이 페이크는 진짜 경기 같았어요.”
“감사합니다……!”
그런 것치곤 둘 다 투지가 넘치는데.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도 식은 땀이 흐르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은 4점에도 끝까지 매달려 보기로 했다.
남은 경기는 팀원 모두가 알고 있던 것처럼 기존 작전대로 초능력을 사용해 몰아붙였다.
페이크를 건 탁지윤부터 나까지 연달아 능력을 사용한 일이었다.
“슬로우 슬로우!”
나름 두 번이나 외쳐 봤다고 익숙하게 부른 주문 너머로 점수를 획득했다.
[ 18 : 9 ]
이제 남은 건 2점, 능력은 권혜성의 것 단 하나.
마지막 작전을 실행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눈치를 살피며 넘어오는 공을 보다가 권혜성을 바라보며 외쳤다.
“혜성아!”
“롸져!”
“이번에는 안 속아요!”
그와 동시에 떨어져 있던 탁지윤이 함께 뛰어올랐다.
선수들은 아까 당했던 수법의 인물이 반대편으로 돌아간 줄 알고 탁지윤을 마크했다.
권혜성의 손에서 공이 가볍게 튕기는 것을 보며 정답을 맞췄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만 속았지?
점프한 탁지윤이 그대로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헤헤, 실례하겠습니다~”
“어?”
“뭐야?!”
권혜성이 손바닥에서 튕겨진 공은 탁지윤이 아닌 네트 너머로 들어갔다.
[ 19 : 9 ]
삐익- 호루라기가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선수들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야, 신해신, 이번엔 무슨 수를 쓴 거야?”
“뭐, 별건 아니고요…….”
저기도 우리에게 남은 초능력의 개수를 파악하고 있는 것 같길래, 살짝 머리를 써 준 것에 불과했다.
능력은 1번, 남은 점수는 2점. 일반인이라면 조급해할 만한 시점이었다.
정공법으로 점수를 넣은 건 탁지윤을 이용한 페이크 한 번이 전부였으니, 그걸 또 쓰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었다.
물론 우리가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같은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리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점수를 넣으면서도 무의식중에 탁지윤을 보는 척 여지를 남겨 뒀으니까.
그렇게 이 수가 통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무사히 들어간 점수에 크게 안도했다.
권혜성에게는 잘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곤, 마지막으로 자세를 재정비했다.
자, 가자, 혜성아. 마지막 점수는 남은 능력자인 권혜성의 몫이었다.
“뭐든지 분신술~! 탁구공 한 번 더 부탁해용?”
권혜성의 얄미운 윙크와 함께 그렇게 우리 쪽 점수 패널이 한 번 더 넘어갔다.
[ 20 : 9 ]
권혜성의 활약으로 막을 내린 경기에 만족감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