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2라운드 2라운드다 이건가. 무대 백스테이지에 서서 앞으로 상대해야 하는 팀의 노래를 지켜봤다.
“있잖아 You! 나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는데~”
“Woo woo woo~”
둘리와 도우너가 몸을 살랑살랑 움직이며 리듬에 맞춰 흥을 돋웠다. 우리 팀과는 다르게 발랄하고 귀여운 분위기로 녹화장을 뜨겁게 달군 상태였다.
차라리 우리가 먼저 해야 했나? 뽑기로 정해진 순서였음에도 마음이 영 불안했다.
그때, 곁에 있던 웬디, 아니 웬디 탈을 쓰고 있던 이정원이 내 어깨를 두들겼다.
두툼한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타격감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지만 긴장하고 있던 나로서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긴장했냐.”
애써 괜찮다며 손을 내저으니 그걸 본 이정원이 낮게 혀를 찼다.
“상대 팀도 가수 같기는 한데, 그래도 난 자신 있어. 너, 혹시 벌써 질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정원의 알 수 없는 자신감에 한숨이 새어 나오려고 했다.
사실 나는 진즉 보컬 스탯이 올라가 무대만 즐기고 내려와도 충분했던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 이정원은 아직 보컬 스탯이 그대로였다.
아무리 봐도 우승 혹은 최소 결승전까지는 가 봐야 변동이라고 볼 수 있을 만한 변화가 있을 듯했다.
그게 신경 쓰여서 집중하고 있던 거였는데. 당사자는 당당하다 못해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주눅이 든 것보단 저게 훨씬 보기 좋네. 노래가 끝나고 패널들의 평을 들으며 스테이지 위의 상대 팀을 바라봤다.
“확실히 가수 같기는 하지?”
서바이벌에 두 번이나 나간 폐해였을까, 상대 팀에 대한 분석평이 이어졌다.
무대를 준비하며 몸을 풀던 이정원도 이런 내 의견에는 공감하는 모양이었다. 마이크를 들고 목을 돌리며 풀다가 가볍게 대답했다.
“어, 둘리 쪽은 가수. 도우너 쪽은… 좀 애매한데. 발성이 우리랑 달라. 근데 다른 직종의 연예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노래에 능숙해.”
“그럼…….”
“뮤지컬?”
“뮤지컬?”
이정원과 동시에 내뱉은 대답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정원도 그게 웃겼는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웬일로 너랑 내가 의견이 다 맞는다?”
“나도 일단 가수거든. 여기서 발성 하나 못 맞혔으면 트레이너님이 원통하다고 했을걸.”
“어쭈, 신해신~”
어깨를 누르듯 매달린 이정원에 팔을 내저으며 몸을 떨어트렸다. 안 그래도 인형 탈 때문에 무거워 죽겠는데. 저 둔한 몸을 갖고 용케도 편하게 움직인다 싶었다.
우리는 2라운드에서 올라가면 3라운드까지 연달아 노래를 불러야 할 처지였다.
체력 좀 비축하라며 타박을 늘어놓자 이정원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때, 무대의 불이 꺼지고 스태프로부터 스탠바이를 해 달라는 명이 들렸다.
“피터팬, 웬디! 스탠바이 해 주세요~! 이제부터 아무 말도 하시면 안 돼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니 그걸 확인한 스태프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자, 가 볼까. 무대 밖 경연장 위에서 메인 MC가 우리를 소개해 왔다.
손에 쥔 마이크를 꼭 쥐며 본격적인 2라운드에 발을 들였다.
* * *
김희진의 자취방에 쪼그려 앉아 나는 가왕 페어 편의 두 번째 방송을 봤다.
“그러니까 저게 해신이랑 정원이라고?”
“어! 맞다니까? 아름 언니 그때 해외 가 있어서 몰랐지? 커뮤랑 티위터 난리 났었어. 하이사인이 맞다, 아니다로 진짜 말 많았는데.”
오랜만에 만난 김희진이 내 허벅지를 두들겨 왔다.
하이사인의 활동기가 거의 끝물이라 잠깐 해외에 나갔다가 왔는데 그사이 국내에선 해신이와 정원이가 보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왔다고 말했다.
…진짜인가? 이야기를 듣자마자 와이튜브로 1편의 영상 클립을 찾아봤었다.
확실히 우리 애들 목소리가 맞는 것 같기는 했는데……. 생전 부르지 않던 스타일의 노래를 해서 그런가 아직까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뭐, 그것도 오늘이면 결과를 알 수 있겠지. 페어 편은 특집이라고 했다. 모든 출연진의 얼굴이 공개된다는 말을 들었었다.
해신이와 정원이라면 본방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카메라도 내려놓은 채 TV 앞을 지켰다.
상대 팀의 무대를 보면서도 이제 곧 나올 피터팬과 웬디가 기다려지던 참이었다.
“와, 근데 여기 강하네. 2차는 2차다 이거지?”
김아름의 말에는 초치지 말라며 TV를 돌아봤다. 둘리와 도우너도 잘하는 것 같긴 했지만, 이상하게 나는 피터팬과 웬디가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아직 해신이랑 정원이인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이러는 걸 보니 그 둘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돌 팬덤 짬바가 있지. 본능적으로 내 가수를 알아보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상대 팀이던 둘리와 도우너가 패널들의 평가를 들으며 무대 뒤로 사라졌다.
[다음은, 풋풋한 청춘 드라마의 OST로 화제가 되셨던 두 분이죠? 네버랜드를 찾아 떠나는 두 동화 속 주인공의 하모니! 피터팬과 웬디입니다!]
MC의 소개말과 동시에 까맣게 암전되어 있던 스테이지 위로 조명이 켜졌다.
[발자국(겨울 나무 아래에서 당신을 기다려요 ‘OST’)] - 피터팬&웬디
눈꽃이 피어오르며 바람이 부는 영상이 스크린 위로 떠올랐다.
저 노래는……. 나와 비슷한 감상이 들었는지 김희진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미친, 결아당이야? 이번에도 OST야?”
“쉿.”
이 노래는 피터팬과 웬디가 1라운드에서 불렀던 연작 드라마의 메인 OST였다.
앞에서 불렀던 연애편지가 청춘물이었던 드라마 특유의 풋풋하고 달달한 감성을 녹였다면, 이건 끝끝내 이뤄지지 못하고 헤어진 연인 둘이 성인이 되어 서로를 그리워하는 장면에 맞춘 씁쓸하고 서글픈 분위기였다.
봄과 대비되는 겨울이라는 드라마 배경에 어울리는 바이올린 소리가 가슴을 두방망이질 치게 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가느다란 현악기의 소리 너머로 본격적인 노래의 시작이 열렸다.
마이크를 두 손에 꼭 쥔 웬디가 특유의 청아한 미성으로 첫 음을 내뱉었다.
[웬디]
잘 지내고 있니
겨울이 왔어
네가 보고 싶어지는 계절이야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김희진도 나도 동시에 침음했다.
아, 정원이다. 이건 나도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부드럽지만 힘이 있는, 하지만 감성으론 절대 밀리지 않는 풍부한 소리의 소유자.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그룹의 메인 보컬이었다.
지금까지 왜 제대로 발라드를 부르지 않았는지, 몇 구절만으로도 정원이의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스치듯 나오는 패널들의 표정을 보아 나와 같은 심경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피터팬]
우리가 만난 건 봄인데
어째서 널 그리워 하는 건
겨울인 걸까
…해신아. 그러다가 못 본 사이에 노래 실력이 확 늘어 있는 해신이를 발견했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씁쓸함을 담아 곡 특유의 겨울 냄새를 물씬 풍기게 만들고 있었다.
결이 다른 두 음색이었음에도 앞뒤를 채우는 보이스가 잘 어우러지고.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심금을 울리는 두 음색의 향연에 푹 빠져 그대로 TV를 바라봤다.
[피터팬]
눈이 내려
[웬디]
소복소복 흩날리고 있어
그리 높은 음이 아니었지만, 사람을 묘하게 홀리는 목소리들이었다.
저음에서도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게 티가 날 수 있는 거였구나.
배경 스크린 너머로 드라마 ‘겨울 나무 아래에서 당신을 기다려요’가 나왔다.
주인공이 상대방을 그리워하며 늘 만나곤 했던 학교 뒤뜰의 벚나무 아래에서 소복소복 쌓인 눈을 밟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에 맞춰 가사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피터팬]
마치 꽃비가 내리던 그날 같아
하얗고 어딘지 따듯한 게
[웬디]
마음 한구석이 아린 것 같아
해신이와 정원이의 음색이 김희진의 자취방을 한겨울로 만들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가녀린 호흡과 함께 안정적인 발성이 귀를 사로잡았다.
중간중간 나오는 패널들의 잡담을 보아 패널들 역시 해신이와 정원이를 가수라고 확정 지은 것 같았다.
[가수 맞지?]
[네, 가수 아닐 수가 없어요. 그나저나 둘 화음이 너무 잘 맞는데요? 팀 아닐까요?]
[아이돌? 쓰읍, 그런 느낌은 아닌데. 뭔가 노련해. 나이가 좀 있지 않을까.]
[목 관리를 잘한 중견 가수분들이요?]
[어우, 난 그건 모르겠고. 노래 너무 좋다~ 저번엔 사벚아 정주행했는데, 이번엔 결아당 다시 봐야겠네.]
뒤늦게 나온 여성 패널의 말에 김희진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나도 오늘 결아당 다시 볼란다.”
“…나도 그거 보고 갈래.”
나도 그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피터팬]
너도 함께 봤다면
그날과 같이 웃어 줬을까
[웬디]
기억 속 너는 그날에 멈춰 있어
내 시간도 네게 맞춰진 것 같아
사람들을 어떤 추억에 빠트렸는지도 모르는지, 해신이와 정원이는 계속 노래를 불렀다.
고조되는 음역대에 맞춰 점점 올라오는 감정선에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바이올린 소리 위로 피아노 건반의 음이 붙어오고 화음을 이루듯이 만들어진 멜로디에 본격적인 하이라이트가 시작됐다.
[피터팬&웬디]
오늘도 소리 없이
너와의 추억을 되새겨 봐
학교 뒤 나무 아래
기약 없는 기다림
정원이가 높은 음을 치닫고 올라가면 그 아래로 더블링을 한 해신이의 음색이 따라붙었다.
남성의 일반적인 음역 키를 둘 다 훌쩍 넘어섰는데도, 불편함 하나 없이 고음을 지르는 모습에 소름이 쫙 끼쳤다.
어느덧 해신이도 정원이도 정면을 보던 몸을 틀어 서로를 마주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 손엔 마이크를 쥔 채 다른 손으론 박자를 타는 게 손짓 하나, 움직이는 타이밍 하나하나가 맞춘 듯이 똑같았다.
[피터팬]
내 발자국만이 흔적이야
[웬디]
눈꽃이 녹으면 없어질 거야
[피터팬&웬디]
눈이 멈추고 (날이 따듯해지고)
새싹이 나고 (봄꽃이 필 거야)
한 구절씩 주고받는 파트를 지나 다시 둘의 화음이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스크린 위로 눈 결정이 스쳐 지나가더니 드라마의 엔딩 장면이 흘러나왔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여자 주인공 역시 남자 주인공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졸업한 고등학교 뒤뜰의 나무를 항상 찾아왔듯이, 해당 학교에 신임 교사로 부임한 여자 주인공도 복도 너머 창문으로 항상 그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엇갈린 타이밍에 항상 서로를 못 보고 지나치던 두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재회하는 장면이었다.
[선생님, 그거 들었어요? 학교 뒤 벚나무 아래에 귀신 나온대요!]
[…귀신?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니, 진짜라니까요? 겨울만 되면 항상 나무 밑에 발자국이 있다잖아요! 눈 쌓이면 지워져야 하는데 다음 날이면 또 있대요!]
학생의 말을 들은 여자 주인공이 몸을 돌려 학교 뒤뜰 추억의 장소로 달려 나갔다.
[피터팬&웬디]
너는 잘 지내니
나는 그러지 못해
네가 보고 싶어 (보고 싶어-)
그 장면을 배경으로 해신이와 정원이는 절절한 하모니를 완성해갔다.
달음박질치는 발걸음 소리와 나무를 배경으로 우산을 쓴 누군가의 뒷모습.
보는 이가 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벅찬 장면 끝에 몸을 돌려 학교를 벗어나려던 남자 주인공 앞으로 여자 주인공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피터팬]
정말 마지막으로
[웬디]
이제는 마지막으로
[피터팬&웬디]
그렇게 지키지 못할 다짐을 할게
내일 또 만나
바닥으로 우산이 떨어지며 여자 주인공이 발걸음을 떼는 장면이 끝났다.
폭풍처럼 이어지던 현악기의 화음과 피아노 소리 그리고 완벽한 둘의 보컬이 전율이 되어 무대 위를 휩쓸고 난 이후였다.
어느새 김희진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고 난 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것처럼 암전이 된 무대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언니, 나 애들이 너무 좋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저건 해신이와 정원이, 그러니까 우리 애들이었다.
그리고 이 둘은 반드시 결승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