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아무튼 서도경은 엔필름에게서 약간이나마 적대감을 깎았다며 즐거워했다.
사사건건 걸던 시비와 방해가 10에서 5 정도로 준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것 같다며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굳이 그게 아니었어도 잘 막고 있는 것 같았는데. 하여간에 사람이 참 뻔뻔했다.
실력으로 만들어 낸 인맥과 경험으로 회사를 이리저리 매만지고 있었으면서.
우리 대표지만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간단한 보고가 종료되고, 본격적인 주제에 돌입했다.
지원겸과 김환준이 우리 숙소로 찾아와서 알려 줬던 이야기, 바로 MXP에 관한 것이었다.
언질용 문자를 남겨 놓긴 했었지만 서도경도 자세한 사태 파악은 안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지원겸이 알려 준 내용을 바탕 삼아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얘기했던 것이 기억난다.
서도경은 김환준과 그사이 몇 번 독대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어쩐지… 거기도 소란을 몰고 다니던 사람치고 근래 정황이 조용해서 이상하다 싶었었다.
“김환준 씨에겐 지니고 있던 명부를 전달받았습니다. 물적 증거로 쓰기엔 충분치 않지만, 몰아세울 방향을 찾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거든요.”
서도경이 근처 서랍을 열어 수첩 한 부를 꺼내 흔들었다.
저게 그 오래 알고 지냈다던 MXP의 실장이란 사람에게 받은 건가.
회사가 워낙 큰 편이라 같은 직책의 인물이 여럿 있다고 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김환준과 디레스트의 데뷔 초반 시절부터 매니저인 사람이었다고 했다.
사실 크라운 게임 당시 한동준 PD와 커넥션이 있었던 자리에 MXP의 실장이 있던 터라 이중 스파이가 아닐까, 염두에 뒀었다. 그런데 그쪽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나를 달래던 김환준을 확인하고, 마음을 내려놓은 뒤였다.
막연한 심정으론 여기에서 발을 빼고 안전하게 애들과 아이돌 생활이나 영위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험난한 연예계 생활에서 나를 포함 멤버들 그리고 회사까지 뒤흔들려고 괴롭히는 놈들을 있어 차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서도경에게는 우선 어떤 생각이 있는지 들어 보기로 한 참이었다.
나와 지원겸 그리고 김환준에겐 나름의 꿍꿍이가 있었으나 그걸로 완벽하게 몰아붙이지 못한다면 역습을 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대표님은 무슨 생각이세요?”
“음, 제일 고전적인 수죠. 신해신 씨도 몇 번 봤던 거?”
서도경의 이야기는 제법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저 명부를 빌미 삼아 증거를 수색해 보고, 꼬리가 잡혔다 싶으면 3자인 척 기자들을 통해 세상에 이 사실을 알리겠다는 것이었다.
기업적인 발상이군. 그러나 그것만큼 좋은, 탈이 없고 깨끗한 루트가 없었다.
나와 지원겸 그리고 김환준 셋이 모였을 때는 회사가 아닌 개인의 입장이었으니까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뿐이었다.
아이돌이라는 직업군에 위치한 우리와 달리 서도경은 회사란 힘이 있었다.
엔필름에겐 약간 경계를 받고 있는 입장이었지만, 그걸 배제하고도 서도경에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맥과 경험 그리고 머리가 있었다.
그리고 또 모르잖아? 엔필름이 이 일에 힘을 보태 줄지.
MXP는 근 몇 년 사이 엔터를 벗어나 다른 업계에도 종사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알음알음 들리는 소식으로는 엔필름이 주력으로 힘을 쏟고 있는 배급 관련 종목이나 프로그램 제작 등, OTT 업계에도 진출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었다.
아마 엔필름 입장에선 썩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었을 것이었다.
그걸 초반부에 진압할 수 있는 게 바로 주축인 MXP를 쳐 버리는 일이었다.
서도경이 어디까지 밝히고 엔필름에게 조력을 요청할진 모르겠으나, 회사 내부에서 실적이 좋아 눈에 거슬리는 엔터 대표 하나와 자기네가 주력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업계를 흔들 대형 황소개구리의 등장 중 어느 쪽을 치우겠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서도경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는지 입가에 띄우고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그나저나 저는 패를 다 깠네요. 그럼 우리 신해신 씨와 사옥 어딘가에 있을 김환준 씨가 무슨 생각 중인지 좀 들어 볼까요?”
서도경은 허점 하나도 쉽게 놓칠 마음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왜 불렀나 싶었더니, 자기 패를 보여 줌과 동시에 우리가 뭘 하려는지 캐물을 속셈이었던 것 같았다.
어차피 알려 주려고 했는데… 뭐니 뭐니 해도 이 사람은 우리 회사의 대표였다.
김환준도 그걸 모를 리가 없었고. 어쩌면 이미 서도경과의 독대를 통해서 이미 모두 밝혔을 수도 있었다.
거짓말은 못 하겠군. 지원겸과의 동맹까지 서도경이 알고 있을까 가만히 눈을 흘겼다.
생글생글 웃는 걸 보면 모두 파악한 것 같기도 하고… 거기도 나쁜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니니까 적당히 보호하며 밝히기로 다짐했다.
지원겸에게는 추후 보고를 하면 될 일이었다.
“아이돌의 측면으로 다가가려고 했죠.”
“아이돌의 측면이라… 음, 혹시 대중?”
“…뭐, 비슷해요.”
예전부터 우리가 생각해 둔 방식은 대중을 사용한 여론몰이였다. 지금까지 MXP가 우리에게 고수했던 방법을 돌려주고자 한 것이었다.
퍽하면 각종 루머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로 멤버들이 욕을 먹게 만들었었다.
아이돌이라서, 아이돌이니까, 대중들의 입에 쉽게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점을 이용한 부분이었다.
그럼 너희도 그걸 한 번쯤은 돌려받아야지. 스턴즈가 나락으로 갔던 건 건수로 치지 않고 있었다.
그건 걔네가 당한 거지, MXP는 빠르게 손절을 치며 몸을 사렸다. 티끌은커녕 기스도 안 났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담아 이번 한 방에 크게 MXP에게 상처를 내 보기로 했다.
“대중을 어떻게 이용할 생각이었는데요?”
서도경의 질문에는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다른 녀석들은 없어서 다행이야.
놈들이 들었다면 길길이 날뛰고도 남았을 다소 파격적인 수법이었다.
“…MXP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남의 뒤통수를 치는 데 아주 이골이 난 사람들이니까요. 이제는 거의 즐기는 수준 같더라고요.”
“그걸 쓰려고 했어요.”
“흠?”
“저희가 늘 해결하던 방식에서 타깃을 잡아 돌리려는 거요.”
“아~ 그러니까 동정론?”
“네.”
우리가 생각한 것은 지금까지 해 왔던 사건 무마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된 버전이었다.
루머의 배후가 어디였는지 밝히는 수법을 통해 MXP를 대중들의 잣대 위에 올려놓기로 한 것이었다.
여태 루머를 해명하기 급급하여 뒤쪽까진 좀 더 파고 들어가지 못했었다.
아이돌이라는 게 응당 이미지 싸움이었다. 그래서 그게 정리되고 나면 활동이다 뭐다 팬들의 마음을 달래기 바빴었다.
이번에는 거기서 좀 더 뒤쪽까지 들어가기로 했다.
최한성 때 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역으로 되돌려주기 작전이었다.
언제 어떻게 어떤 수법으로 MXP가 우리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단점이 있긴 했으나, 호흡만 맞고 주변 인물들이 흐름에 맞춰 움직여 주기만 한다면 이번 사건의 최한성은 MXP가 될 수 있었다.
작게는 MXP가 한동안 우리를 건들 생각을 못 한다는 것부터, 크게는 최한성과 같은 재기 불가능 엔딩을 맞이하는 것까지. 꽤 큰 보수가 걸려 있었다.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을 텐데요? 위험하기도 위험하고요.”
그건 우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방법이 있어야지 뭐, 지금처럼 서도경이 개입하거나 지원겸네 회사 대표가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이상, 이건 기업 대 아이돌의 싸움이었다.
우리가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대중들의 호감도 쪽뿐이었으니, 우린 우리 나름대로 최고의 무기를 들고자 했던 것이었다.
“거기까지만 하고 끝낼 건 아니었죠. 저희한텐 대표님이 계시잖아요?”
“저요?”
거기서 추가로 서도경과의 자리를 가질 생각을 했었다.
뭐, 우리가 움직이기도 전에 먼저 불러 모으는 걸 보면 이 사람도 예사 인간은 아니었지만.
MXP를 이미지 싸움에서 나락으로 보낸 다음, 그 뒤 일은 기업의 축을 무너트리려고 했었다.
일명 비리 장부로 시작한 위법 행태 적발. 각종 비리가 있는 놈들이 세금 관련 문제가 없을 리 없었다.
서도경은 뭐든 뒤쪽에서 가운데부터 흔들려고 들었을 게 분명했다.
사소한 이미지 문제에서 위법에 관련된 사항까지 불씨가 옮겨붙는 건 금방일 거라고 확신했다.
정 안 되면 내가 방송국에 위장 알바를 갔을 때 한동준과 MXP의 다른 팀 실장과의 대화를 풀고.
이런 식으로 중첩해서 아래부터 무너트리면, 철옹성 같은 탑도 결국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나 돈이나 사람 싸움으로 지치기야 하겠지만… 얕게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계속 받느니 내 팔을 내어 주고 적의 몸통을 베는 게 맞았다.
사실 나는 내 팔도 내어 줄 마음이 없었다. 그냥 조금씩 조금씩 반격하는 척 밀어 넘어트릴 생각에 가까웠다.
서도경은 방금의 대화를 통해 모든 작전을 눈치챈 것 같았다.
처음에는 말이 없더니 얼마 안 돼 고개를 숙이고 입가를 틀어막았다.
…너무 무모했나? 내 장단에 잘 맞춰 주곤 했던 사람이라서 이번에도 쉽게 넘어가 줄 줄 알았다.
그런데 별다른 말이 없으니 선을 넘은 것 같다는 기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때 서도경이 큭큭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내뱉었다.
“…큽.”
“…왜, 왜 그러세요.”
무섭게 왜 이래. 흘린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이상하게 구는 서도경의 모습에 후회가 들었다.
웃음을 참으려고 하는지 잘게 몸을 떨던 서도경이 얼마 가지 않아 허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폭소했다.
이 사람이 이러는 건 처음 봐서 얼떨떨한 심경이었다.
“하하……!”
“…….”
“아, 죄송합니다. 엔터 대표로 발령받았을 때만 해도 아티스트와 이런 대화를 나눌 줄은 몰라서 말이죠. 긍정적인 방향에서 말하는 겁니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네?”
“재밌다고요, 지금 이 상황. 옛날 방식 고수하는 윗사람들이랑만 싸우느라 영 입맛이 없었는데. 한동안 엔필름의 압박 좀 견뎠더니 상처럼 재밌는 일을 받았군요. 그래, 이래야 싸울 맛이 좀 나죠. …그 작전, 나도 함께합시다. MXP는 슬슬 치워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네?!”
서도경의 말에는 내가 더 놀랐다. 좋게 봐서 허락해 줄 건 알았으나 이렇게 전투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도리어 서도경은 다소 즐겁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나와 교류가 없던 그동안 지루했다며 이런 일이 더 입맛에 맞다는 말까지 남겼다.
그렇게 서도경은 허리를 숙여 내게 준비해 둔 자료들과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한 설명을 해 줬다.
“이건 현재 조사중인 부분이고, 이건 김환준 씨와 디레스트 멤버들의 증언을 통해 유추하고 있는 점입니다. 생각보다 그 틈이 견고해서 파고드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어때요, 해신 씨. 해신 씨네가 시간 좀 벌 수 있겠어요?”
5살 먹은 어린아이가 원하던 장난감을 손에 넣은 것처럼 눈이 반짝거렸다.
거기서 이제 와 두렵다고 발을 뺄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물며 이건 나도 오랫동안 바랐던 거였다.
“…물론이죠. 얼마나요?”
서도경이 뻗어온 손을 붙들었다. 지킬 게 있는 싸움이라 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