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300화 (299/328)

300화

하이사인이 레일 하트에 이어 바로 컴백을 했다. 사녹을 가고 싶었는데 조별 과제 스케줄과 겹쳐 버려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상태였다.

그렇게 티위터와 SNS로 지인들에게 소식을 들으며 본방송의 방영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권소현] 신유 너 지금 조별 과제 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유인] 웃지마 죽인다 후기나 들려줘

주말 출근을 간신히 막은 권소현에게서 애들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권소현] 음 커플링 곡도 좋은데 난 타이틀 픽임 ㅈㄴ 이번에도 잘 뽑았어 무엇보다 유준이가 기강 잡고 나왔다 ^^ 아 물론 우리 명이가 제일 쩜

[신유인] 트레일러 때부터 장난 아닌 건 느꼈는데 ㅜ 해신이는? 해신이 얘기 좀 해달라고

얼마 전 이번 타이틀에 대한 트레일러와 컴백 포스터가 떴었다.

새벽녘 어슴푸레한 하늘을 배경 삼아 물가 안에 발을 담그고 서 있던 남자의 사진이었다.

얼굴을 대놓고 보여 주지 않는 하이사인 트레일러의 특징에 따라 많은 팬이 이번 센터에 대해 유추했다.

태그로 함께 걸려 있는 곡 제목이 #Complex였던 터라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러다가 그다음 게시물로 올라온 이미지 한 장에서 이유준이 이번 앨범의 센터임을 알게 됐다.

아침이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뒤쪽을 돌아본 타이트한 클로즈업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해 왔던 컨셉과는 또 다른 느낌의 앨범에 기대감이 샘솟았다.

매번 멤버들의 또 다른 자아에 대해 보여 주곤 했던 하이사인이었기에 이번에도 엄청난 게 나올 거란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과제를 버리고 갔어야 했나? 정신이 없는지 연락이 끊긴 권소현과의 대화방을 보다가 미련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래, 지금 나는 조별 과제를 함께하는 조원들과 대학로 인근 카페에 자리해 있었다.

아쉬워하지 말자. 이렇게 되면 과제도 하고 애들도 볼 수 있겠지.

음방이 시작할 시간에 맞춰 쉬는 시간을 갖자고 말한 뒤였다. 각자 할 일들을 하거나 잠시 자리를 비운 걸 확인하며 곧 방영될 음악 방송만을 기다렸다.

애써 서글픈 마음을 잠재우며 핸드폰을 다시 들어 올리려는데, 옆에 있던 같은 과 후배가 말을 걸었다.

“언니, 혹시 케이 팝 좋아해요?”

“어? 어떻게 알았어?”

“죄송해요. 훔쳐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폰 배경 화면이 보여서요.”

권소현과 대화하던 당시 얼핏 보인 핸드폰 배경 화면에 관심을 주게 된 모양이었다.

…혹시 얘도 케이 팝을 좋아하나? 평소 모습을 봐선 머글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남친 짤로 돌아다니던 해신이의 사진 한 장에 케이 팝을 연상 짓는 걸 보니 머글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러면 나야 재밌지. 학교에선 덕메, 즉 덕질 메이트가 없었기에 관심이 갔다.

은근슬쩍 떠보려고 들고 있던 핸드폰을 가운데에 세팅했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후배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너, 혹시 하이사인 알아?”

“당연히 알죠. 유어돌인가? 그때 나온 애들 아니에요?”

“현경이 너도 유어돌 봤어?”

“네, 원래 그런 것 잘 안 보는데 알고리즘이 클립을 추천해 주더라고요. 본방까진 아니어도 킬링 타임으로는 종종 봤어요.”

후배는 케이 팝 팬덤의 기질이 보이는 새싹이었다. 머글인 것 같긴 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인재라고 볼 수 있었다.

관심이 없는 것 같지도 않고… 슬쩍 영업해 보자는 마음에 음악 방송을 켠 뒤 블루투스 이어폰을 내밀었다.

“언니가 하이눈이거든. 오늘 애들 컴백한다고 해서, 괜찮으면 너도 같이 볼래?”

“…음, 뭐, 그러죠.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요.”

흔쾌히 낚여 준 머글 후배가 이어폰 한쪽을 받았다.

얘가 예비 하이눈이 될지 아니면 그냥 무대를 보는 머글이 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만 할 것 같았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MC들의 소개에 맞춰 하이사인이 등장하려고 했다.

[COME BACK – HISIGN]

컴백용 스폐셜 영상에 조용히 입가를 틀어막았다.

트레일러 영상과 컴백 포스터에서 봤던 장소로 보이는 얕은 강가, 고요한 적막 속에서 의자에 앉아 있던 이유준이 한쪽 다리를 끌어안았다.

나머지 발 한쪽은 강물에 살포시 담그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그 뒤로 멤버들이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불며 나타난 건 이정원이었다. 강가에서 조금 떨어진 넓은 들판, 들꽃 옆에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꽃과 함께 반쯤 흐려지던 포커스 위로 새벽이슬이 굴러 지나갔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카메라 무빙에 따라 그렇게 다음 멤버가 등장했다.

…권소현, 이거 보고 있을까? 이정원에게서 바통 터치를 받은 윤명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언가를 원하는 듯 손을 내민 상태에서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새벽달에 미소 지었다.

아까보단 조금 더 맑은 파란빛을 도는 하늘에 구름이 서서히 이동해 갔다.

이유준이 있던 강가에서 조금 더 깊어 보이는 공간, 하체를 거의 다 담그고 있던 강태오가 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넘어간 머리카락 아래, 강태오의 눈동자가 클로즈업되며 아주 먼 곳에서부터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이 보였다.

빨갛지는 않지만, 빛을 담은 구가 강태오의 동공과 겹친 순간, 이정원이 있던 초원으로 보이는 배경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 아래, 나무의 기둥을 잡은 채 서 있는 권혜성이 보였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흔들리며 아스라이 그림자를 그리는데, 그 아래 차분한 표정으로 서 있던 권혜성이 한 걸음 앞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다시 나타난 강가 안으로는 유일하게 강물에 몸을 담그지 않은 소년이 보였다. 청년과 소년의 중간으로 느껴지는 앳된 얼굴, 멤버 문채민이었다.

이유준 서 있던 빈자리를 바라보며 강물 앞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맨발이 이슬을 머금어 축축해진 풀을 밟는 장면이 클로즈업됐다.

그럼 마지막이 해신인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문채민의 어깨 너머로 서 있던 사람이 보였다.

발목까지 잠긴 물에 몸을 돌린 신해신이었다. 흑발에 흰 얼굴이 푸르스름한 새벽녘 기운을 담아 희게 빛났다.

그대로 페이드아웃, 멤버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의자에 앉아 다리를 안고 있던 이유준이 입을 열었다.

[그 노래가 귓가에 맴돌아]

[Complex]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사로잡았다. 드디어 본무대가 시작됐다.

멀지 않은 곳에 조원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지금 체면치레 따위 할 때가 아니란 마음이 강했다.

옆에 후배가 앉아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일단은 무대부터 감상하기로 했다.

얼터너티브 록 장르의 강렬한 기타 사운드 위로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새벽녘 푸르스름한 하늘을 표현한 건지 각기 다른 하늘색으로 의상을 입은 애들이 나타났다.

달빛처럼 보이는 흐릿한 조명 아래에서 가장 앞에 서 있던 이유준이 입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흐트러트린 앞머리와 맑고 깨끗한 메이크업이 청순한 비주얼의 이유준을 돋보이게 해 줬다.

- 나만 그런 게 아닐까

생각에 빠져

길을 잃은 아이처럼

방황하던 모습을 떠올려

래퍼이던 포지션과 다르게 이번에는 곡의 시작을 이유준이 열었다.

노래도 잘하네? 무겁고 낮은 목소리가 초반부에 나오니 이목이 확 집중됐다.

서로 엮인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멤버들 사이로 문채민이 등장했다.

이유준보단 훨씬 밝은 느낌이지만 채도가 낮은 다른 하늘빛의 니트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 MY complex 머릿속을 파고드는

강렬한 비트에 사로잡혀

여기서 쿵 저기서 쿵

상처투성이 비루먹은 못난이

특유의 공격적인 플로우를 담아 시작부터 랩을 했다. 곡의 전개가 특이했다.

작사에 이유준과 이정원이 참여했다고 하더니 본인들이 봐서 멤버들에게 잘 어울릴 만한 파트를 준 것 같았다.

서정적인 느낌의 안무가 이어지며 손을 끌어모은 멤버들이 클로즈업됐다.

마치 방금 본 스폐셜 영상에서 새벽달을 바라보던 윤명이 떠오르는 몸짓이었다.

어깨를 둥글게 세우고 팔을 교차하며 아치를 그린 멤버들 틈바구니로 차분하게 세팅된 머리의 권혜성이 걸어 나왔다.

넥 라인이 깊게 파인, 소매가 긴 티셔츠를 입고서 차분한 얼굴로 문채민의 랩 뒤의 보컬 사운드를 채워 넣었다.

- Help me Save me

Find me Hold hand

그대로 손을 잡아 줘

곧바로 따라붙은 목소리는 부드러운 미성의 이정원이었다.

언제 앉은 것인지 다리를 밀며 동선을 변경하는 하드한 안무 속에서 안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몸을 일으켰다.

- 환해진 시야 품 안의 온기

이게 꿈이 아닐까 두리번거려도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은 마음

이정원이 누군가의 어깨를 터치하며 그와 동시에 휙 하고 카메라의 무빙이 틀어졌다.

긴 팔과 다리, 웨이브를 넣어 걸음을 옮기면서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게 누가 봐도 댄서 포지션인 강태오였다.

특유의 세련되면서도 곡에 따라 소화가 잘되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파트를 불렀다.

레이어드 해서 이중으로 걸친 목 폴라 위의 실크 셔츠가 조명을 받아 반질반질하게 빛이 났다.

- 거짓말이라도 영원히 머물러 줘

만개한 꽃잎처럼 얽히고 얽힌 손가락

그래 혼자가 아니야

시작된 1절 싸비, 서로의 팔을 교차하여 다시 한번 아치를 만든 틈 속에서 이유준이 걸어 나왔다.

이유준이 싸비라고? 래퍼에겐 다소 파격적인 보컬이었기에 놀란 마음이 앞서고 있던 순간이었다.

고개를 들어 한쪽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이유준이 싱잉 랩 비슷한 느낌으로 노래를 불렀다.

- 그 Complex를 벗어나

벗어날 수가 없다면

그 상태에서 포커스가 이유준의 바로 뒤에 붙어 있던 멤버에게로 이동했다.

아, 해신이다. 아무래도 메이터스는 이번 타이틀 곡의 센터로 이유준을 세우며 싸비를 도와줄 멤버를 별도로 붙인 모양이었다.

이유준이 부를 땐 싱잉 랩에 가까웠던 보컬 아래로 신해신의 화음이 깔리자 노래가 달라졌다.

- Complex를 안고

한 바퀴 자리를 돌아

그 노래가 귓가에 맴돌아

묵직한 저음과 허스키한 미성이 절묘하게 잘 어울렸다. 꽃잎을 그리는 것 같은 멤버들의 포인트 안무 속에서 서로 등을 기댄 두 멤버가 몸을 틀고 팔을 엇갈려 서로의 어깨를 터치한 채 지나갔다.

- 벗어날 수 없다면 안고 돌아

춤을 춰 외롭지 않아 빙글빙글

다음은 파트에 맞춰 댄서 포지션인 권혜성과 강태오가 몸을 움직였다.

바닥에 앉아 다리를 끌어안고 옆으로 몸을 들어 폈다 일으키는 안무가 보였다.

이걸 하면서 라이브를 한다고? AR이 깔려 있기는 하다지만 MR 제거를 하면 거의 본인들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 있던 하이사인을 잘 알고 있었다.

놀란 마음에 입가를 틀어막자 이유준이 문채민에게 건네받은 핸드 마이크를 들며 본업을 하러 걸어 나왔다.

보컬 파트를 부를 때 지었던 우수에 찬 얼굴은 어디다 버려두고 왔는지 찡그린 미간과 공격적인 제스처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매서운 시선에 이유준이 이런 게 가능했구나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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