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305화 (304/328)

305화

욱하는 마음에 치고 나간 자리였다. 그 외침을 들었는지 제로-원-나인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스태프 신해신과 영혼이 분리된 신해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잔잔한 수면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 것인 양 느리게 파도치고 있었다.

스태프 신해신이 내 쪽으로 막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제로-원-나인이 손가락을 딸깍하고 엇갈려 부딪쳤다.

‘신해신, 네가 쟤랑 마주치는 건 좀 더 뒤의 일이야.’

‘…네?!’

‘그럼 넌 이따 다시 보자고? 알려 줄 게 아주 많으니까 말이야.’

제로-원-나인의 말을 끝으로 스태프 신해신, 아니 시스템 신해신과 쓰러져 있던 분리된 영혼의 신해신이 완전히 사라졌다.

사방이 미약하게 떨리는 걸 보며 나는 헛웃음을 짓기 바빴다.

그사이 얇은 막이 벗겨진 것처럼 제로-원-나인이 있던 곳이 또렷하게 보였다.

일부러 차단하고 있던 거였군. 그 녀석, 시스템 신해신이 어디에 가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됐다.

쓰러져 있던 분리된 영혼인 나는 아마 그대로 길바닥 한가운데에서 정신을 차리게 될 예정이었다.

과거든, 미래든, 분리된 영혼이든, 한결같이 다사다난하기 짝이 없는 몸이었다.

안도 반, 걱정 반으로 한숨을 내쉬자 사라진 두 신해신이 있던 자리를 살펴본 제로-원-나인이 몸을 일으켜 내쪽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또렷해진 사람의 형체로 스르륵 공중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발을 딛고 서서는 익숙하다는 듯이 내게 손을 내밀어왔다.

‘아는 척 안 해서 삐졌어?’

‘…아는 척이고 뭐고 간에 그런 거 할 정신도 없어. 너, 저번엔 순 내숭 떤 거였구나.’

내 말에 제로-원-나인이 눈을 굴려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지간히도 재밌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게 퍽 얄미웠다.

그러고는 변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고 보니 나름 일리 있는 소리 같았지만. 지금 심경으론 굳이 편을 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키워드 룸은 반드시 네가 겪은 기억만을 보여 줘야만 하는걸.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런 것치곤 꽤 재밌어 보이던데.’

제로-원-나인과의 첫 만남 때도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당시 장면을 보여 주고 나서야 녀석이 있는 공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 전제 조건을 지키기 위해 나는 알지 못하던 내 기억 중 하나를 보여 준 모양이다.

그게 하필이면 그 녀석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장면이었고?

아니, 뭐… 그 녀석에 대해 확신을 가져서 제로-원-나인을 찾아온 거긴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알 생각은 없었기에 속이 영 복잡미묘했다.

‘일부러 보여 준 거지?’

시큰둥한 얼굴을 유지하며 제로-원-나인에게 질문했다.

시스템 관리자인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있던 녀석이기에 이런 내 속쯤이야 훤히 알 것 같긴 했지만.

제로-원-나인은 이런 내 모습에 재밌다는 듯이 허리를 접어 가며 박장대소했다.

너, 나한테 미안하다며. 인생을 뒤틀리게 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 있어 시스템까지 만들어 준 놈치곤 꽤나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씩씩거리며 쳐다보자 제로-원-나인이 내 질문에 제 콧등을 훑으며 대답했다.

툭툭 내뱉는 말을 봐서는 이제 더 이상 숨길 의향이 없었나 보다. 나로서는 꽤 반가운 일이었다.

‘네가 부탁했잖아, 그 녀석의 정체에 대해 알려달라고. 너는 이제 알아도 될 때가 왔으니까. 아, 물론 관리자의 세계에 가 있는 그 녀석에겐 좀 더 훗날의 일이겠지만 말이야.’

‘…방금 뭐라고 했어?’

제로-원-나인의 물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로-원-나인이 아까 그 둘을 실체가 있는 사람처럼 명칭 했기 때문이었다.

환상이 아니었나. 키워드 룸을 사용했다는 전제하에 과거 기억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방금의 그 장면도 내게는 없는 기억을 보여 준 거라고 확신했던 거였는데.

그런데 제로-원-나인의 말을 들으니 혼란스러워졌다.

제로-원-나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사실을 밝혀 와서 더 그런 듯했다.

‘아까 봤잖아. 네가 그 녀석이라고 부르던 신해신, 아, 참고로 우린 관리자 에이치라고 불러. 아무튼 관리자 에이치의 첫 시스템 세계 영접 시절. 물론 지금의 네가 회귀하기 바로 직전의 모습도 같이 있었고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둘이 단순한 내 기억이 아니라 실재하고 있던 녀석들이었다고?

일그러진 얼굴로 제로-원-나인을 돌아봤다. 시간 선상이 너무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잠시 실실 웃고 있는 제로-원-나인을 보며 체념했다.

하긴, 시스템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도 겪었는데. 이런 것에 놀라는 건 이제 신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내가 과거로 온 거야. 아니면 그 녀석들이 미래로 온 거야.’

포기한 얼굴로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하자 제로-원-나인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빙글빙글 허공을 향해 돌리더니 이내 한 공간을 가리켜 보였다.

제로-원-나인의 행동에 이끌려 바라본 허공에는 알 수 없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동그라미 두 개와 그 사이를 가르는 선 하나가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둘 다. 여긴 네가 살던 미래의 시간대, 또 나와 그 녀석들이 있던 거긴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시간대. 은연중에 너도 느끼지 않았어? 내 형체가 흐리다는걸. 너는 그 녀석들을 봐도 됐으니까 볼 수 있게 해 놨지만, 그 녀석들은 아직 너를 봐선 안 됐으니까 중간에 막을 쳐 놨거든. 물론 그거 때문에 나도 좀 흐리게 느껴졌나 봐. 이제는 아주 잘 보이지? 두 공간을 하나로 합쳐 버렸거든.’

선을 사이로 두 개의 원을 가리키며 설명한 제로-원-나인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아까 그 신해신 역시 현실을 겪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리쳐서라도 힌트를 줄 걸.

험난한 미래가 남아 있는 시스템 신해신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돌에 도전해야 할 신해신이 떠올라 심란해졌다.

뭐, 이미 늦어 버린 일 같았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그 녀석의 정체를 이리도 쉽게 알려 줄지 몰랐는데.

심지어 그건 이미 한번 어그러진 인생을 살다가 강제로 시스템 관리자란 직책을 맡게 된 과거의 나였었다.

복잡한 마음에 제로-원-나인을 바라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보면 내 추측이 맞아떨어진 건가. 두 번째 시스템 관리자가 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지는 제법 오래된 일이었다.

‘버그, 그걸로 내 정체를 알려 준 거지?’

제로-원-나인에게는 오래전부터 묻고 싶던 사실을 물어봤다.

제로-원-나인과 만나기 전까지의 버그는 전부 내 인생에 관한 것뿐이었는데.

녀석과의 대면 이후 풀린 버그는 묘하게 다른 기색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섯 번째부터야?’

너 말고 또 다른 시스템 관리자가 있다는 걸 알려 준 게 말이야.

오류 복구라는 이름의 네 번째 버그 이후로 나타난 다섯 번째 버그가 떠올랐다.

‘선택한 자, 그거 날 말하는 거잖아.’

정확히는 아까 본 신해신을 말하는 거였다.

놀랐다는 기색이 커서 그렇지, 긍정하는 말을 하는 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여기 말고 또 다른 공간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확신에 찼다.

스태프 신해신, 너, 시스템이 되는 걸 허락한 거구나.

과거의 내가 인생을 되돌리고자 제로-원-나인의 제안을 수락했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본 걸로 따지자면 선택한 자라고 하기엔 우스운 느낌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전부 맞는 말이었다.

등 떠밀리듯 움직인 거긴 하지만 다시 살아 보기로 인생을 베팅하다니.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추구하던 나로선 꽤 과감한 선택이었다.

제로-원-나인은 모든 속마음을 전부 읽은 것 같았다.

내 생각이 곧 정답이라는 양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껴 왔다.

‘호오, 꽤 똑똑한데?’

‘칭찬 안 같거든.’

‘역시, 오히려 이쪽이 더 관리자 에이치랑 비슷하단 말이야~ 그렇다면 여섯 번째 버그도 알아챘겠네?’

‘…어.’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바로 이곳에 달려온 거였다.

운명 공동체, 이렇게 대놓고 힌트를 줄 줄이야.

이건 그냥 시스템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제로-원-나인 쪽에서 시스템 관리자에 다른 인물이 하나 더 있다는 걸 밝힌 지 오래니,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바로 결론이 나왔다.

근데 운명 공동체라고 하기엔 너무 다른 생을 살고 있지 않나?

분리된 영혼의 신해신은 22살이 되어 길바닥에서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할 사람이었다.

거기야 오랜 여정을 보내면 내가 되기는 한다지만.

시스템 관리자 에이치인지 뭔지로 불리는 신해신은 나와 전혀 딴판이었다.

제로-원-나인 같은 유들거리는 상사를 만나 뜻하지 않게 자신이 고행길을 걷고 있는 걸 보고 있었다.

가만 보니까 진짜 제로-원-나인 이놈 얄밉네?

미안하다며 시작한 것치곤 상당히 즐거워 보이던 녀석이었다.

그리고 인생 되돌려줄 거면 좀 서비스라도 팍팍 주든가. 자린고비 짠돌이인 양 코인을 아껴 가며 살아온 유어돌 시기가 떠올랐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던 직종에서부터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물론 지금에야 팬들의 사랑도 잔뜩 받고 멤버들까지 만났으니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단순히 시스템에게서 좀 더 특혜를 받았으면 삶이 쉽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었다.

그걸 알아챈 제로-원-나인이 입술을 내밀며 툴툴거렸다.

얘기하는 걸 보니 여기도 내가 추측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에이, 뭔 소리야. 지금까지 얼마나 퍼 준 줄 알아? 시스템이 오류로 다운될 정도로 위기 상황에서 도와줬잖아. 아이템 못 골라서 버벅일 때, 방지턱 핑계로 쓸 만한 거 찾아 주고. 스페셜 스킬 뽑기에선 미래를 보고 좋겠다 싶은 걸로 컨택해 주고. 심지어 너, 이벤트마다 보상도 예정보다 많이 받아 갔어. 여긴 내가 한 짓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저번에 그 이벤트 보상 말하는 거야?’

이건 나도 아직 기억하고 있는 일이었다. 이벤트 보상이 제법 아쉽게 끝난다고 생각했던 날의 일이었다.

멈추려던 시스템이 창을 띄우더니 새로운 보상을 마구 쏟아 냈었다.

과도할 정도로 얻은 상태에서 어안이 벙벙했는데. 그 뒤 강제로 종료되듯 사라진 시스템을 보며 이상하다고 봤었다.

사실 거기서 어렴풋이 느끼긴 했었다. 시스템 이 녀석이 다소 이중인격 같다는 걸 말이다.

근데 진짜 두 놈일 줄은 몰랐지. 이제 보니까 담당자가 둘이라서 그런 거였다.

제로-원-나인의 말을 들어보면 관리자 에이치, 그러니까 즉 내가 고생하는 나를 보다 못해 보상을 쏟아 줬단 뜻이었다.

제로-원-나인도 나를 도와주려고 애를 쓴 것 같긴 했지만. 시스템 신해신만큼 신경을 쓰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쩌면 메인 관리자라서 그랬던 걸 수도 있겠고.

저번의 그 이상한 공간에서 호통치듯 만나면 안 되다던 목소리가 어렴풋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관리자가 된 나는 말로만 툴툴거리면서 챙겨 주는 녀석이 되어 있었나 보다.

[무슨 헛소리를 늘어트려 놓는 거야.]

그래, 이런 말도 막 내뱉고… 응? 그때 천장이 흔들리며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낯설다고 하기도 그렇지. 이건 나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말하자마자 나타나네. 시스템 관리자 에이치?

아까 전 넋이 나간 얼굴로 사라진 스태프 신해신의 목소리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먹고 있는 거야. 황당한 마음에 제로-원-나인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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