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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306화 (305/328)

306화

제로-원-나인 뒤쪽에 있던 공간이 일그러졌다. 분명 온통 새하얀 곳이었는데.

소용돌이가 치며 생성되는 검은 막이 보였다.

드디어 대면하게 되는 건가? 그 녀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시스템 신해신 말이다.

아까도 마주치긴 했지만 그건 과거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어린 나였으니까.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말투부터 성격까지 달라져 있었지. 긴장돼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만나 보네.]

새까만 막이 꾸물꾸물 모양을 바꿨다. 연기가 모여서 사람의 형상을 그린 것이었다.

그림자 속에서 뻗어 나온 손에 흠칫 놀라다가 익숙한 얼굴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했다.

저기 있는 사람은 스태프 신해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과는 다른 이라는 분위기가 물씬 맴돌고 있었다.

제로-원-나인과 일하면서 성격을 버렸는지 좀 더 까칠하고, 성숙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겼다.

제로-원-나인,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급한 마음에 허허실실 웃고 있는 녀석을 돌아봤다.

스태프 신해신이 겪었던 그 당시도 현실이라고 했으면서.

지금 내 눈앞의 이 녀석은 미래로 보였다. 무슨 놈의 세계가 이렇게 복잡해.

내 물음에 제로-원-나인은 머리 뒤로 뒷짐을 지며 멋쩍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시스템 신해신이 직접 행차할 줄은 모르고 있었나 보다.

‘음, 소개가 필요하려나……? 여긴 잘 알고 있는 시스템 속의 너. 아, 어떻게 된 거냐고 생각했지? 이 녀석은 너와 동일한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던 시스템 신해신이야. 아까 그 녀석이 시스템 속에서 시간을 보내면 이렇게 된답니다, 짜잔. 뭐, 너는 뭐 이미 겪어 봐서 잘 알고 있지?’

[진실만 밝히라니까 뭘 또 주절주절 내뱉고 있어. …신해신, 만나서 반갑다. 인사할게. 난 너야. 정확히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대로 인생을 살아가던 세계의 너.]

다소 무뚝뚝한 시스템 신해신의 인사에 고개를 까딱였다. 확실히 회귀 전 26살이던 나보단 좀 더 나이를 먹은 게 느껴지는 외관이었다.

만나서 반갑다고 악수라도 해야 하나? 도플갱어를 만난 것 같은 기분에 주춤주춤 망설이던 찰나였다.

그런 날 본 시스템 신해신이 제로-원-나인을 살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했다, 지금까지.]

‘아…….’

시스템 신해신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와르르 내려앉았다. 저 녀석도 나와 같은 인물인데.

나는 이렇게 사랑받는 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쟤는 그렇지 못한 삶을 살다가 시스템이 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고생했다며 나를 위해 뒤에서 노력을 해 왔다.

어떻게 보면 가족보다 나 자신을 더 위해 주는 사람이 있던 것이었다.

‘그, 고맙습니다. 다 들었어요. …매번 연관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했다는 거요. 전 그것도 모르고…….’

이상하게 반말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느껴졌다. 더듬더듬 그간 일에 대해 고마움을 피력하자 손을 들어 올린 시스템 신해신이 머쓱하단 얼굴로 뒤통수를 벅벅 긁어 댔다.

…어? 저 행동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민망하면 얼굴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시스템 신해신 뒤에 서서 머리 뒤로 뒷짐을 진 채 개구지게 웃고 있는 제로-원-나인도 퍽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이제 알아챘구나!’

내 외침에 제로-원-나인이 폴짝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사실상 공중에 반 가까이 떠 있던 거였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제로-원-나인은 허공을 한 바퀴 굴러 내 눈앞까지 당도했다.

반질거리지만 멍한 기운이 있는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놀란 마음에 화들짝 뒷걸음질을 쳤다.

‘…윤명? 권혜성? …혹시, 아까는 문채민?’

제로-원-나인의 저 머리 뒤로 뒷짐 지는 버릇과 유쾌한 웃음은 멤버인 권혜성의 것이었다.

방긋거리는 주제에 묘하게 멍한 눈빛은 윤명과 매우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거기다가 단호한 듯 장난기가 섞인 말투는 문채민을 쏙 빼닮았다.

뭐지? 그제야 내가 느끼고 있던 이질감의 정체를 알게 됐다.

‘으하하, 빙고!’

뭔가 익숙하다 했더니. 제로-원-나인의 폭소에 시스템 신해신이 슬며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알 듯 말 듯 나른하게 지어 보이는 저 미소, 내게는 퍽 익숙한 것이었다.

…이유준. 멤버들 중 가장 여유로운 얼굴을 할 줄 알던 녀석이었다.

시스템 신해신이 등장하자마자 느꼈던 말투는 이정원이었다.

매서운 듯 따지고 보면 따듯한 말씨가 이정원과 빼닮아 있던 것이었다.

칭찬을 들으면 민망하다는 얼굴로 회피하는 건 강태오의 버릇인가.

그러니까 제로-원-나인과 시스템 신해신은 나를 제외한 하이사인 멤버들과 흡사한 구석들을 보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외관이 닮았냐고 하기엔 애매한 곳이 있었지만. 제스처나 분위기 하나하나를 따진다면 상당히 유사한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편안한가 싶었더니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였다.

제로-원-나인은 이런 내 모습에 웃음기가 만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뒤에 서 있던 시스템 신해신은 이정원을 보는 것 뉘앙스의 자세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우린 실존하지 않는 존재인걸. 네 옆에 있으면서 뭘 보고 학습했겠어. 네가 가장 좋아하고 따르는 애들의 모습이지.’

‘…좋아하고 따르는 애들이요?’

제로-원-나인의 말에 따르면 자신들은 데이터에 불과한 존재라고 했다.

성격이나 가치관, 인격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숫자 범위에 불과하단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배우고 학습한 건 내 주변에 있던 인물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내가 마음을 준 녀석들이 비교 대상이라고 알려 준 것이었다.

그러던 사이 허공을 바라본 시스템 신해신이 미간을 찡그렸다.

진짜 권혜성이라도 된 것인 양 말을 멈추지 않고 있는 제로-원-나인을 보더니 큰 보폭의 걸음으로 다가와서 내 어깨를 휙 낚아챘다.

[…너, 이만 가.]

‘…네?’

이것까지 이정원을 쏙 빼닯아 있네. 그나저나 대뜸 무슨 소리야?

의미 불명의 대화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와 동시에 제로-원-나인을 바라본 시스템 신해신이 급하다는 듯이 크게 소리쳤다.

[이만 됐으니까 보내 줘. 시간이 너무 지체됐잖아. 저쪽에서 알아챘어. 다 된 일을 망칠 속셈이야?]

‘에~ 벌써? 할 말이 무진장 많았는데.’

[뒷일은 전부 얘가 해결해야 한다고. 그냥 넘어가면 쉽게 다음 일을 할 수 있는데 벌써 위험해졌잖아.]

‘흠, 난 이것도 필요하다고 보는데~’

[제로-원-나인.]

‘…….’

갑자기 분위기가 살벌해진 경향을 띄었다. 제로-원-나인을 노려보는 시스템 신해신의 표정이 험상궂게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격이었다.

한참을 침묵에 빠져 있던 제로-원-나인이 시스템 신해신의 다급한 외침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로-원-나인!]

‘아, 됐다.’

[…너 정말.]

‘미안한데, 이것도 필요한 일이거든.’

‘…네?’

제로-원-나인의 말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시스템 신해신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짚고 있음에도 제로-원-나인은 웃기 바쁜 듯했다.

이내 제로-원-나인이 공중으로 풀쩍 뛰어올랐다. 제로-원-나인을 따라 스르륵 허공으로 올라간 시스템 신해신이 복잡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뭔데? 니들끼리만 알지 말고 나한테도 좀 얘기해 달라고.

속마음을 들은 제로-원-나인이 빙글 한바퀴를 돌아 내 앞에 거꾸로 섰다.

중력이라곤 무시한 것처럼 완벽한 형상을 한 채 거꾸로 서 있던 제로-원-나인과 눈을 마주쳤다.

윤명 특유의 멍하지만 깊은 눈동자를 보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다 됐으니까 본론부터 얘기해 달라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저 녀석이 하도 뭐라고 해서, 돌아가기 전에 알려 주는 거야.’

‘무슨 일인데요?’

‘음, 쉽게 말하자면 그거지. 멤버들이 너를 찾고 있어.’

‘…네?!’

[…그래서 빨리 보내라고 했잖아. 신해신, 잘 들어. 키워드 룸이 고정해 주는 시간은 어디까지나 네가 과거를 봤을 때만이야.]

‘…어. 그러니까.’

[여기 이곳은 시간의 흐름이 현실과 똑같다고. 너, 지금 옥상에 올라간 지 1시간이 넘었어.]

‘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만 두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제로-원-나인, 너 설마……. 얄밉게 웃고 있는 녀석을 보자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시스템 신해신은 멤버들이 나를 찾으러 올라오기 전에 현실로 돌려보내고 싶어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제로-원-나인은 다른 생각이 있었는지 기어코 멤버들이 나를 찾아 옥상에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위험한 처지라는 것만큼은 확실해졌다.

안 그래도 이정원이 메모리 서칭 엔진 일로 사람을 들들 볶아 댔는데.

다 됐으니까 얼른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만 했다.

급한 마음에 시스템 신해신을 붙잡으며 외쳤다.

‘보, 보내 주세요!’

[그, 나한테 권한이…….]

‘이 공간의 소유주는 나지~ 그럼 슬슬 인사해 볼까나.’

시스템 신해신에게 달려든 내 뒤로 얄미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공에서 빙글빙글 발장난을 치고 있던 제로-원-나인이었다.

샐쭉 눈을 접어 웃더니 인상을 휙휙 뒤바꿨다.

얼핏 보이는 얼굴들 틈에서 권혜성과 윤명 그리고 문채민이 보이는 걸 보며 나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집어삼켰다.

‘신해신, 잘 가~’

[이렇게 인사하기는 싫었는데. …고생해, 또 다른 나.]

제로-원-나인의 말 한마디에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끝이 없는 낭떠러지로 끌려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심장을 저 위에 두고 온 것만 같은 스릴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렸다.

제로-원-나인, 너 가만 안 둬. 마지막으로 떠오른 얼굴은 실실 웃고 있던 멤버 셋을 합쳐 놓은 듯한 인상의 제로-원-나인이었다.

그 뒤에 서서 깊은 한숨을 내쉬던 또 다른 내가 불쌍해졌다.

* * *

“…….”

시스템 신해신, 너도 공범이야. 이런 상항일 거라곤 설명 안 해 줬잖아.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광경은 실로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찬 바람이 부는 옥상, 나를 찾아 올라왔는지 사방에 깔려 있던 멤버들이 내가 서 있는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 윤명.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권혜성이 연신 옆에 있던 윤명의 어깨를 두들겨 댔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선은 내게 박혀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음, 아마 아닐걸?”

윤명은 멍한 얼굴을 한 채였다. 눈빛은 여전했지만, 입과 눈이 묘하게 확장된 걸 보아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저기, 해신이 형……?”

나를 부르는 문채민의 물음에 가만히 허공을 바라봤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냐.

쉽게 말하자면 나는 지금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아직 현실로 돌아오고 있는지 반투명한 몸이 보였다.

시야가 또렷해짐에 따라 손과 발의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들리는 또 다른 목소리들에 파르르 추위가 밀려들었다.

“…이게,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나도 지금 고민해 보고 있으니까 조용히 해, 이유준.”

“신해신 너…….”

멤버들에게 전부 들통이 난 상황이었다. 그것도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부분을 들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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