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307화 (306/328)

307화

“설명해.”

이정원의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지금은 사방이 뚫려 있던 옥상에서 내려와 우리 숙소로 들어온 뒤였다.

옥상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디지 못한 문채민이 놀란 표정을 뒤로 하고 재채기를 했었다.

‘엣취.’

‘…일단, 일단 내려가자.’

난처한 상황과 맞닥뜨렸다는 사실도 미룬 채 녀석들을 끌고 따듯한 숙소 거실에 자리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냐. 전전긍긍 우리의 눈치를 살피기 바쁜 막내 삼인방이 보였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고 싶었는지 권혜성이 혼잣말을 늘어트렸다.

“…아니, 우리는, 그, 저번에 해신이 형 생일 때처럼, 형도 부를 겸 같이 달도 보려고 올라간 거였는데…….”

한두 놈도 아니고 왜 이렇게 우르르 옥상에 올라와 있나 했더니,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듯했다.

관자놀이를 치고 올라오는 두통에 미간을 찡그리며 머리를 되짚던 사이였다.

뭐가 그리 불안한 건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이유준이 팔을 뻗어 내 어깨를 잡았다.

“너, 뭐 하냐.”

“…아니, 나타나기도 그렇게 나타났으니까. 비슷하게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었기에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에 촉도 좋은 놈 같으니라고. 이런 내 침묵에 이정원은 이유준의 가설이 정답이란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앉지도 못하고 서 있던 자세에서 팔짱을 끼더니 한쪽 다리를 달달 떨었다.

그러고는 중얼중얼 뭐라고 길게 말을 내뱉었다.

가만 들어 보니까 아무래도 저건 그것 같았다. 과거 메모리 서칭 엔진을 통해 나를 봤었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아직까지 의심하고 있었나. 한동안 조용하길래 어느 정도 마음을 접은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 쏟아 내듯 이야기하는 걸 보니 표현하지 않아 그렇지, 계속 그 일에 대해 떠올려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꿈이 아니었다니까.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 전에 저게 말이 되는 거야? …아니지, 신해신 저 자식이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지. 유어돌 때부터 미스터리 하다 싶더니. 하아…….”

이정원의 생소한 모습에 놀란 건 강태오도 마찬가지였던 듯했다.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차분히 있던 상태에서 이정원의 말을 곱씹어 보고 있었다.

개중 추측이 가능할 만한 단어만 골라 읊조리는 게 퍽 난감한 상태였다.

쟤 하나일 때도 힘들었는데, 이젠 멤버 전원에게 정체가 무엇이냐는 소리를 듣게 생긴 참이었다.

“꿈…? 미스터리? 정원이 형, 그건 또 무슨 소리인데. 오늘 일이랑 관련이 있는 거야?”

강태오의 물음에 엄지손톱을 깨물고 있던 이정원이 고개를 돌렸다.

그게 기폭제가 되었는지 빠른 걸음으로 내 앞까지 다가와 대뜸 쪼그려 앉더니 이내 나와 눈을 맞추곤 강태오와 다른 녀석들의 시선을 받으며 질문을 던졌다.

“솔직하게 말해. 내가 최한성이랑 같은 소속사에 다니던 시절. 연습실에 나타났던 귀신, 그거 너였지.”

“귀, 귀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해신이 형~!”

이정원의 이야기에 소스라치게 놀란 권혜성에 내 등짝에 달라붙었다.

어깨에 이유준의 손이 올라가 있던 상태에서 앞은 이정원, 옆은 이유준, 뒤는 권혜성에게 점령당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사방이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한 자세에서 갑갑함에 등 뒤에 달라붙은 권혜성을 건드렸다.

무거워, 힘들어, 대답도 못 하겠어. 비켜 달라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셋 중 그 누구 하나도 내 곁에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이유준은 어깨를 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꽈악- 옷깃이 구겨지는 수준을 넘어 악력이 느껴질 정도의 아픔에 이유준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나를 더는 보기 힘들었는지 소파에 앉아 여길 내려다보고 있던 윤명이 낮은 목소리로 상황 정리에 들어갔다.

곁에 있던 문채민도 생각이 많은 건 마찬가지였나 보다. 윤명의 가설에 제 의견을 덧붙여 오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일단 우리가 본 건 진짜인 거잖아. 한 명도 아니고 여섯이서 동시에 같은 걸 볼 확률은 없으니까. …분명, 해신이 형은 아무도 없던 허공에서 나타났어. 심지어 바람은 전혀 쐬지 않은 것 같은 하얀 얼굴로.”

“…확실히 이상하지. 옥상에 올라간 지 5분도 안 돼서 형들이랑 나는 전부 코끝이나 귀가 빨개졌는데. 그 차가운 바람을 제대로 된 겉옷 한 장 없이 1시간이나 쐬었으면서 멀쩡하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해신이 형, 어디 있다가 온 거야?”

윤명의 마지막 말이 크리티컬이었다. 제로-원-나인, 그러니까 시스템의 공간에서 관리자들과 대화하다 온 나에 대해 반은 맞힌 것이었다.

제로-원-나인, 네가 원하던 게 이거야? 그 녀석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런 상황을 만들어 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여기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1군은커녕, 녀석들과 사이가 멀어질 거란 것이었다.

…그건 싫은데. 저당금으로 시작한 아이돌 도전기였지만, 이젠 그 누구보다 진심이 되어 이 직업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좋아해 주는 팬들과 함께 이 녀석들이 존재했다.

얘네와 팬들 없이 활동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 그렇게 질문한다면 단연코 내 대답은 no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게 옥죄어 왔다.

그때, 어디선가 긴 팔이 나타나 등에 붙은 권혜성과 어깨를 틀어잡은 이유준 그리고 내 앞에서 압박을 주고 있던 이정원을 밀어냈다.

“우억……! 형~!”

“뭐야, 왜 그래?”

“강태오, 너…….”

뒤로 엎어진 권혜성부터 이유준과 이정원이 원망을 쏟아붓던 상대를 돌아봤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 강태오였다.

한참 전부터 우리 뒤에서 대화하는 걸 지켜보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가까이 다가와 내 곁에 붙어 있는 녀석들을 물렸다.

멤버들과 나를 차단하듯 가로막은 등판에 그제야 내 손이 잘게 떨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강태오는 그 행동으로 부족했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이 형한텐 궁금한 게 많거든. 근데 이런 식은 아닌 것 같아서.”

“그게 무슨 헛소리인데. 너도 봤잖아, 해신이 형이…….”

그런 강태오의 앞으로 살벌한 표정을 지은 이유준이 나타났다.

이정원은 자신이 나설 틈도 없이 먼저 화가 난 것 같은 기색을 내비치는 이유준을 보고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너도 그러냐, 나도 그래. 이유준과 강태오가 장난삼아 투닥거린다고는 했어도 이런 분위기를 내비친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은 두 명의 팽팽한 대치에 놀라 버린 참이었다.

강태오는 평소답지 않게 강하게 나오는 이유준을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팔을 내려 내 앞쪽을 가리곤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너, 지금 눈이 맛이 간 것 같은데. 정신 차려, 이유준. 지금 해신이 형, 얼굴 안 보여?”

그제야 내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손을 뻗어 얼굴을 매만져 보자 서늘하게 식은 피부가 느껴졌다.

“혀, 형…….”

“…난 따듯한 물 좀 떠올게. …해신이 형 마시게 해야겠다.”

권혜성의 걱정스러운 말에 이어 윤명이 부엌으로 이동했다.

“…얼굴이 하얗네. 형들, 우리 잠깐만 휴전하자. 그게 맞는 것 같아.”

문채민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하얗게 질려 있음을 알게 됐다.

이에 지쳤다는 듯이 바닥에 주저 앉은 이정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강태오의 어깨 너머로 보이던 이유준은 날카롭게 솟아 있던 눈매를 누그러뜨리고 마른세수를 하고 있었다.

그를 확인한 강태오가 몸을 돌려 나를 살폈다.

“…나도 궁금한 게 많기는 해. 정원이 형 말을 듣다 보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거든.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형을 본 기억이 있어. …아주 흐리지만, 꿈이라고 생각될 만큼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다시 되새겨 보면 우리가 활동하던 당시의 형 모습이었어. 지금 상황으로 봐선 이게 진실이라는 거 나도 알아. 그래도…….”

거기까지 걸렸군. 강태오에게 메모리 서칭 엔진을 사용하던 당시에는 페널티가 너무도 약하던 터라 어영부영 넘긴 전적이 있었다.

이정원만큼 집요하게 나오지 않아서 다 잊어버린 줄 알았더니. 이번 일을 계기로 이정원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완전히 몰린 상황이군. 대충 넘어가는 뉘앙스였으나 암담한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강태오의 뒷말을 따라 하자 시선을 피하며 눈을 내리 깐 강태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래도?”

“…조금만 시간을 줄게. 형이 우리에게 거짓말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으니까. 형, 우리 좋아하잖아.”

“…너.”

그걸 어떻게……. 모든 걸 훤히 꿰뚫린 기분이었다.

강태오의 말에 물을 떠 오던 윤명부터 바닥에 앉아 있던 이유준, 강태오에게 떠밀려 나동그라져 있던 권혜성까지 모두 내 쪽을 돌아봤다.

“우리가 바보인 줄 알아? 너처럼 얼굴에서 속마음 티가 나는 인간을 본 적이 없어.”

이정원의 말을 시작으로 녀석들이 한마디씩 얹었다.

“…자, 물 마셔. 해신이 형처럼, 사람 좋아하는 사람도 드문데. …뭐, 나도 그래서 형이 좋은 거지만.”

“형, 무대 끝나고 우리 돌아볼 때면 얼마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줄 모르지? 누가 봐도 무대가 너무 좋아! 너희랑 같이 있는 게 너무 좋아! 팬들과 함께해서 행복해! 이런 얼굴이라고~”

윤명과 권혜성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 둘의 이야기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이유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람이, 우리한테 나쁜 걸 숨겼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던 거였어, 도대체 뭐길래 형이 혼자 모든 걸 감당하려고 했던 건지.”

“…이유준.”

“…위험하니까! 형은 늘 아무런 티도 내지 않으니까! 걱정돼서, 그래서 알고 싶은 거였어.”

이유준이 소리치는 모습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로-원-나인, 나 이 짓 진짜 못하겠다. 멤버들에게 시스템에 대해 숨기는 일은 무리였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이유준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껏 쏟아 내서 그런 거였는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해탈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짜, 마음 같아선 형을 압박해서라도 당장 다 알아내고 싶은데.”

“…뭐?”

“강태오, 쟤가 저렇게 나올 정도면……. 또 형은 몰리면 도망치려고 하니까. 조금만 시간을 줄게.”

“그래, 신해신. 며칠간 잘 생각해 봐. 네가 이걸 묻기로 작정한다면 그에 대해 반대하진 않을거야.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줄 의향도 있어. 너를 싫어하거나 네게 벽을 치겠다는 그런 뜻이 아니야. 널 좋아하고 아끼니까, 네가 고른 선택을 지지해 주겠다는 거야. …그래도 난 그 방향이 네가 모든 걸 밝히는 쪽이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말할게. 네가 걱정돼. 그래서 함께하고 싶어.”

이정원의 말에 더 이상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문채민이 우리의 눈치를 살피다가 나동그라져 있던 권혜성을 일으켜 세웠다.

“형들, 방에 가자. 해신이 형한테도 시간을 줘야지.”

문채민의 말을 끝으로 강태오가 다시 나를 돌아봤다. 어깨에 손을 올린 상태에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봤지? 다들 형 편이야. 편하게 생각해. 그리고… 언젠가 각오가 되면, 모든 걸 말해 줘.”

뒤에 서 있던 녀석들이 그런 강태오와 나를 쳐다봤다.

녀석들에게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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