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308화 (307/328)

308화

그렇게 그날 일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 있었다. 멤버들은 하나같이 나를 신경 쓰는 듯한 뉘앙스를 흘렸다.

하지만 시간을 주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별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이걸 넘어갔다고 해야 하나? 다소 어리둥절한 분위기 속에서 활동 막바지에 도달했다.

방송에 나가고, 팬들과 교류하고, 익숙한 일상을 보내며 아이돌 생활을 이어 갔다.

겨울이 다 되어 컴백한 앨범이었던 만큼 연말, 연초 시상식이 다가와 있다는 뜻이었다.

두 타이틀 연속으로 밀리언 셀러를 달성했던 게 의미가 작진 않았나 보다.

올라간 인지도가 피부에 와닿을 만큼 우리 앞으로 다양한 러브 콜이 들어와 있었다.

연예 대상 혹은 연기 대상의 축하 무대에서도 섭외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간단한 미팅을 통해서 M 공중파의 연기 대상 프로그램에 출연이 확정되었다.

고우림 때문인가, 미팅실을 나서며 이제는 익숙해진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같은 소속사이자 협력 관계에 있었던 고우림이었는데. 올해 하반기 M 방송사에서 드라마를 찍었었다. 우리가 불렀던 OST의 드라마만큼 좋은 반응이 나온 작품이었다.

이정원과 함께 출연했던 나는 가왕 페어 편도 같은 방송사였으니까.

이래저래 시너지 효과로 큰 관심을 받을 기회란 판단이 내려졌다.

서도경이 긁어모은 사람들이라 그런가, 일 처리는 끝내주네.

매니지먼트실과의 회의를 끝내고 다음 일정을 위해 숙소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애써 멀쩡한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멀쩡한 놈인 건지. 등짝에 매달려 있던 권혜성이 한곳을 바라보며 손가락질했다.

“어? 한 실장님!”

거기 서 있던 것은 오랜만에 보는 한지헌 실장이었다.

서도경이 자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회사에 남아 있는 사이 외부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느라 자주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한지헌은 권혜성의 외침에 성큼성큼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오늘도 외근을 핑계로 서도경의 지시를 받고 나갔다가 온 건가.

멤버들의 인사에 한지헌이 반갑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타이밍이 안 맞았는지 그간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실장님은… 대표님 뵈러 가시나 봐요.”

이정원의 물음에 한지헌이 슬쩍 눈을 굴렸다.

뭘 또 하고 있나 보군. 저 인텔리한 얼굴로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뽐내니 차마 물어볼 엄두가 안 났다.

한지헌은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합법이기는 한 건가. 당시에는 급해서 받아들였지만 서도경의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위험한 방식에서 발을 빼고 싶어졌다.

한지헌은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대충 맞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않는 걸 보니 내 추측이 정답이었나 보다.

다 됐으니까 얼른 가자. 우리 회사 대표지만 얽히면 골치가 아팠다.

이유준과 강태오의 등을 떠밀며 숙소로 돌아가자는 의사를 표현했다.

강태오는 여기를 돌아보곤 대충 상황을 눈치챈 모양이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라는 얼굴로 윤명과 문채민을 주차장 가는 길목으로 이끌었다.

아까부터 말이 없던 이유준은 잠시 고민하는 듯한 느낌으로 턱에 손을 올렸다.

내게 뭔가 물어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것도 이내 지금 우리 관계가 묘한 선상에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잠자코 강태오의 뒤를 따랐다.

남은 건 한지헌에게 질문하고 있는 이정원과 내 등짝에 매달려 있던 권혜성 둘뿐인가.

알아봤자 좋은 건 없어. 팔을 뻗어 권혜성의 등을 두 번 토닥였다.

내 행동에 눈치를 살피던 권혜성이 내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에이~”

그러고는 내가 말하는 바를 알아챘다는 듯이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겼다. 윤명과 문채민 쪽으로 향하고 있던 것이었다.

얼굴 위에 떠오른 호기심을 보아 궁금한 게 많은 것 같긴 했으나, 눈치가 빠르던 놈답게 현명한 선택을 해 줘서 안도했다.

나머지 멤버도 마저 데리고 가기 위해 입을 연 참이었다.

“정원아, 우리도 가자.”

이정원은 내 말에 잠시 이쪽을 돌아봤다. 궁금한 건 많아 보이긴 했으나 물어볼 명분은 없었는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한지헌이 이정원에게 비슷한 느낌으로 고개를 까딱여줬다.

옆구리에 끼어 있는 서류철이 한지헌의 몸짓에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보였는데.

의식적으로라도 보고 싶지 않아서 발을 빼려던 찰나였다.

“그럼 다음에 인사드릴게요. 저희는 이만…….”

“아, 해신 씨, 해신 씨는 잠시 남아 주시죠.”

“…네?”

한지헌이 등을 돌려 사라지려는 나를 불러 세웠다.

앞장서 걷고 있던 멤버들이 뒤를 돌아볼 만큼 갑작스러운 부름이었다.

진즉 튈걸. 후회해 봤자 늦은 상황이란 걸 알고 한숨을 집어삼켰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지헌은 미소짓고 있었다.

“대표님께서 찾으셨습니다. 안 그래도 회사에 와 계신다는 얘기를 들어서 모시러 가려던 길이었는데. 잘됐네요. 숙소에는 이따 박 매니저님 통해서 모셔다 드릴 테니, 잠시 저와 동행하시죠.”

…결국은 이런 엔딩인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멤버들부터 보내기로 했다.

지하에서 오 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신다며 먼저 가라 말을 하자 멤버들이 의아하단 얼굴로 여기를 구경했다.

예전 같았으면 리더라서 불렀겠다며 적당히 뭉개고 넘어가 줬을 텐데.

옥상에서의 일 때문이었을까, 힐끔힐끔 여기를 돌아보는 시선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뭔데. 신해신, 너 혼자 가는 거야?”

“실장님, 활동 관련된 이야기라면 같이 가고 싶은데요. 혹시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그중 가장 의심이 많아진 것은 바로 이 두 녀석이었다.

나를 보며 대뜸 질문을 던진 이정원과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한지헌에게 직구를 날리기 바쁜 이유준이었다.

강태오는 권혜성과 윤명 그리고 문채민을 데리고 있던 상태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는 태도를 보였는데, 녀석에겐 저 셋을 맡긴 것만으로도 미안했기에 됐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한지헌은 이런 우리를 찬찬히 관찰하고 있었다.

회사에는 자주 들어오지도 못했으면서 서도경에게 들은 바가 있는지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는 뉘앙스로 핸드폰을 꺼냈다. FM답게 상사에게 보고부터 하는 것 같았다.

“잠시만요, 먼저 여쭤보겠습니다.”

빠른 손놀림으로 메시지를 작성하더니, 얼마 안가 울리는 핸드폰에 액정을 확인했다.

간결한 동작으로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한지헌이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대표님깨 여쭤봤는데,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활동 관련 사안이 아닌 해신 씨 개인 일로 부르신 거라고 하시네요.”

아무래도 서도경에게선 나만 오라는 이야기를 전달받은 것 같았다.

“…개인 일이요?”

그와 동시에 이정원의 눈매가 삐죽 매섭게 솟아올랐다.

단순히 그러기만 했으면 모르겠는데. 그대로 나를 돌아보는 얼굴에 움찔 어깨가 떨렸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이정원뿐만이 아니었다. 한지헌을 바라본 상태에서 질문을 던졌던 이유준 역시 한지헌의 대답에 내 쪽을 응시했다.

뺨이 타겠어. 집요하기론 이길 자가 없던 멤버 둘의 지긋한 시선에 눈길을 돌려 바닥을 바라봤다.

하필이면 혼자 있을 때도 아니고 다 같이 있을 때 이런 말을 들어서. 며칠 전 상황과 맞물리니 최악인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지헌의 입에서 처음 듣는 말들이 나왔다.

“아, 해신 씨만 있을 일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큰 건 아니고 그냥 활동 면담차 대면이라고 하시는데. 시간을 봐서 다른 멤버분들께도 순차적으로 연락드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걸 들은 강태오가 큰 목소리로 이정원과 이유준을 불렀다.

“정원이 형, 이유준, 그만하고 얼른 와. 오 팀장님도 기다리고 계시는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강태오는 안 그러는 척 날을 세우고 있던 두 녀석을 빨리 치우고 싶었던 것 같았다.

고맙다, 강태오. 거기서 새삼 강태오가 마음이 약한 건 알고 있었지만, 순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태오에 이어 권혜성과 윤명 그리고 문채민까지 재촉하는 말을 던졌다.

“형들~ 얼른 와!”

“…나 배고픈데.”

“오 팀장님 기다리신대.”

다들 내가 불쌍한 모양인데. 이런 말을 들으면 천하의 이정원과 이유준도 더 이상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두 녀석은 미련이 남은 눈길로 여길 힐끔거리다가 발길을 돌려 멤버들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숙소에서 물어볼 거니까 일찍 들어와.”

“그게 내 마음대로 되냐. 별거 아니라잖아.”

그걸로는 성에 안 찼는지 나를 스쳐 지나가던 이정원에게서 무서운 말을 들었다.

이정원의 뒤에 있던 이유준 역시 몸을 틀기 전에 내 쪽을 한번 돌아봤다.

…야, 좀 웃어. 헤실헤실 잘만 웃던 녀석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동하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간신히 멤버들이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멤버들의 흔적을 쫓다가 뒤쪽에 서 있는 한지헌을 돌아봤다.

“실장님, 오랜만에 봬서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도 죄송하긴 합니다만…….”

“네, 뭔데요?”

“…진짜입니까? 멤버 전원 개별 면담이 있다는 거요.”

“뭐, 언젠가는 있지 않을까요?”

한지헌의 물음에 안도와 동시에 한숨이 쏟아졌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한지헌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선의의 거짓말을 해 준 것 같았다.

서도경 그 사람이 별 것도 아닌 이유로 사람을 부를 리가 없잖아.

사실 개인 면담 같은 건 매니지먼트실에서도 충분한 일이었다.

다들 정신이 없어서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나 보네. 한지헌이 멤버들을 돌려보내고자 달래던 순간 눈치챈 이야기였다.

이 정도는 되어야 온갖 지저분한 일들도 맡길 수 있다는 건가.

우선은 이만 가 보자며 몸을 돌리는 한지헌의 뒤를 쫓았다.

계약서를 쓰던 당시 첫 만남 때는 이런 생각이 들 줄은 몰랐는데.

마냥 FM이라고 보기는 힘든 사람 사람이란 판단이 내려졌다.

아무튼 그렇게 대화도 없이 한지헌의 뒤를 따라 대표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까 서도경이 왜 나를 부른 거지?

아까는 멤버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갑작스러운 부름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대표님, 한 실장입니다. 신해신 씨 모셔왔습니다.”

한지헌은 이런 나를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는지 대표실 문에 노크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서 안쪽에서부터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얼떨떨한 얼굴로 한지헌의 안내에 맞춰 방 안에 들어가니, 업무를 보고 있었는지 서류를 살펴보고 있던 서도경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저 부르셨다고…….”

눈치를 살피며 서도경에게 질문하자 서류를 내려놓은 서도경이 나를 돌아봤다.

타이밍을 맞춘 걸까, 등 뒤에서 한지헌이 문을 닫았다.

나를 지나쳐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철을 서도경에게 내미는데 그 모습을 보다가 오늘 이 자리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서류철을 받아든 서도경이 몸을 일으켜 대표실 중앙에 있던 테이블을 가리켰다.

나는 앉으라는 제스처에 정신을 차려야겠다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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