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오랜만이죠? 활동 관련해서는 꾸준히 보고받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아주 좋아요. 특히 근래 행보가 대중들에게도 제대로 각인되면서 자리를 잡은 것 같더군요.”
서류철을 닫은 서도경이 미소 지었다. 내가 생각한 그런 일이 아니었던가.
초반부터 칭찬 세례가 쏟아져서 어리둥절한 마음이었다.
매도 빨리 맞는 법이 낫다고. 일단은 이 자리가 만들어진 연유를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저 사람이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 때문에 나를 불러냈을 리가 없잖아.
저게 어디까지나 빌드 업에 불과하단 사실을 눈치챘다.
“감사합니다.”
“자, 그럼 본론을 시작해 볼까요?”
역시나. 고맙다며 허리를 숙였다가 세운 순간, 서도경에게서 낯설지 않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한지헌에게 이름이 불렸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니 그런 나를 살핀 서도경이 한지헌을 올려다봤다.
테이블 위에 던져 놓은 서류철. 제대로 펼쳐 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서도경은 저 안에 적힌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신해신 씨가 활동으로 업적을 쌓아 주는 동안, 저희 쪽은 저희 나름대로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보고 있었거든요.”
“혹시.”
“네, MXP요. 저번 한동준 커넥션 파문 이후로 조용했죠?”
서도경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절로 몸이 굳었다.
MXP, 시스템에 대한 진실을 알아낸 이후로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적군이었다.
근래 조용한 행보를 보이는 것 같기는 했으나… 시스템이 시킨 1군 아이돌의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처치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조용하다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또 훼방을 놓을지 모르니까.
스턴즈부터 시작해서 멤버들의 개인사를 엮어 만든 말도 안 되는 루머까지.
이제는 지긋지긋하다고도 볼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였다.
그런데 서도경이 이런 자리에서 MXP의 이름을 꺼내다니.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저것도……. 서도경의 정보력은 무서울 정도였으니 이 서류가 그곳에 관련된 이야기 같았다.
내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그걸 확인한 서도경이 서류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내 쪽으로 내밀며 읽어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저번에 신해신 씨가 알려 줬던 정보를 기반으로 착수했던 조사 파일입니다. 저는 메일로 한번 보고받아서 다시 읽어 볼 필요는 없는데, 신해신 씨는 궁금해 보이니 봐 보시죠.”
서도경의 말에 내가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떨리는 손을 감추며 받아 든 서류철.
겉으로 보기엔 일반 회사의 평범한 결재 서류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 속에 든 내용은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모를 정도로 큰일임이 분명했다.
길던 싸움을 드디어 끝낼 수 있는 건가. 마른침을 삼킨 뒤 서류철을 열어 내용을 확인해 본 순간이었다.
“……?”
이게 뭐야. 거기서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온갖 숫자와 문구로 가득한 종이가 보였다. 자세한 것까진 알 수 없었으나 대충 보이는 느낌으로 돈이 관련된 장부라는 것이 확실했다.
서도경은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서류철을 확인한 나를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거기서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것 치곤 무거운 내용들을 설명해줬다.
“한동준 커넥션 사태로 생각했던 점이 하나 있었거든요. PD가 이 정도로 큰 장부 리스트와 커넥션을 갖고 있는데, 숨겨진 배후로 꼽힌 엔터에는 얼마나 많은 줄이 연결되어 있을까….”
“줄이요?”
“네, 줄이요. 당시 MXP는 꼬리 자르기로 빠져나갔지만 MXP도 나름의 독자적인 연계점이 있을 거라고 봤습니다. 신해신 씨가 알려 줬던 이야기나 김환준 씨를 통해 받은 수첩 명부처럼 말이죠.”
“장부라니, 그렇다면.”
“보고 있네요. 그 장부. 정확히는 돈이 매개체로 오간 MXP의 뒷거래 리스트입니다. 금액 옆에 스펠링 보이시죠?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긴 하나, 김환준 씨가 제공해 준 수첩 명부와 해당 스펠링을 대조하면 재밌는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러니까 서도경의 이야기는 그거였다. MXP가 연예계에서 불법적으로 다루고 있던 비리 장부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김환준이 제공해 준 자료와 증언이 있어서 방향을 잡는 게 어려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MXP도 업계에서 라이벌들을 물리치며 살아남은 기업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내부적인 자료를 얻어 낼 줄은 몰랐기에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냈냐고 궁금해하는 것 같네요. 뭐… 한 실장님이 힘내 주신 것도 있고, 저만의 비법 같은 것도 있고. 거기까진 지금의 신해신 씨에게 말해 주기 뭐하고요.”
“지금의……?”
“그건 나중에 말합니다. 자, 이제 이걸 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터뜨리냐는 건데…….”
서도경의 이야기에 다른 건 미뤄 두고 현실적인 문제부터 떠올려봤다.
지금 이걸 푸는 게 정답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아니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다.
“신해신 씨도 아직은 이르다고 보고 있는 거죠?”
“네.”
아쉽지만 당장 이걸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MXP는 한동준 커넥션에서도 살아남은 기업이었으니까.
이걸 또 푼다고 한들 다시 꼬리 자르기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가 이걸 풀면 가장 먼저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사람이 있었다.
김환준 그리고 아직 MXP에 남아 있다던 디레스트의 매니저를 맡았다던 실장.
내부 자료 유출을 도와준 용의자가 너무도 뚜렷해서 함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하단 판단이었다.
내가 아무리 내 팔을 베어 줄 의사는 있었다고 하지만.
김환준은 눈엣가시 같았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나름 한편에 서 있었다.
나야 조금 얄미운 선배 그리고 이상한 동맹의 일원 정도였으나 엔필름에게 인정받을 기회를 손에 넣은 서도경에게 김환준과 디레스트는 절대로 버릴 수 없는 무기와 같은 거였다.
그 상태에서 김환준과 디레스트, 그들이 위험해질 선택을 할 리가 없잖아.
얽혀 있는 상호 관계를 파악하다 보니 서도경이 원하는 답변을 알게 됐다.
애초부터 이걸 쓰려면 MXP가 확실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뤄지는 공격이어야만 했던 것이었다.
서도경은 김환준과의 거래 때 이걸 제안받았는지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도 좀 아쉽기는 하나… 여러모로 복잡한 사태에 얽혀 있었으므로 작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머리를 써 보기로 했다.
그때, 고민하는 게 티가 났던 것일까, 뒤에 서 있던 한지헌이 허리를 숙여 내게 말을 걸었다.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끝이 보이니까요.”
“네?”
“한 실장님.”
생전 끼는 법이 없던 한지헌의 말에 살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들어 올리니 서도경에게서 제재가 떨어졌다.
한지헌은 익숙하다는 듯이 얕게 미소 지으며 서도경 명령에 따라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암만 봐도 참 미스터리한 사람들이었다.
“네, 대표님.”
“디레스트는 곧 컴백이죠? 그쪽과도 한번 얼굴을 봐야겠군요. 김환준 씨가 바빠지기 전에 연락 좀 부탁해요. 제 쪽 스케줄은 상관없으니 거기에 맞춰 주세요.”
“네.”
“아무튼 오늘 용건은 이거였습니다. 그때 당시 이야기를 나눠 보긴 했지만, 조사가 성공적일 거라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신해신 씨도 불안할 것 같았거든요. 자료 쪽은 문제없이 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안도하고 신해신 씨의 몫을 하고 있어 주세요.”
다소 갑작스럽게 마무리되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뭔가 더 있기는 하군.
서도경이 이렇게 티를 내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에 나는 모르는 일들이 있을 거란 걸 알았다.
하지만 적군도 아니고 완전한 아군인 상태에서 상대가 밝힐 생각이 없는 걸 헤집는 건 내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서도경의 말에서 정정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준이라, 활동도 마무리됐겠다, 연말 시상식 무대 연습 전에 그쪽과도 한번 접선해 볼까.
새로 열린 미션으로 바쁜 상태에서 잠시 미뤄 둔 동맹이 떠올랐다.
김환준뿐만 아니라 거기도 만나 봐야지. 지원겸, 서도경과 본격적으로 편을 먹기 전 내 손으로 만들어 낸 첫 아군이 떠올랐다.
“그럼 저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애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서도경은 내 말에 알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축객령을 내리기 전에 먼저 일어나 줘서 편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아니, 나가려던 찰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상체가 돌아갔다.
“팀에 무슨 일이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신해신 씨가 능숙해진 편이긴 하지만, 아직은 티가 나거든요.”
“…네, 대표님.”
하여간에 우리 대표는 여러모로 징그러운 인간이었다.
서도경은 우리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캐치하고 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진짜 목표가 이 이야기였나? 자세한 내막까진 알 길이 없을 테니, 상세한 내용까지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중요한 시기에 정신을 차리고 있으라는 서도경 식의 경고였다.
그럼 그렇지,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걸로 골치가 아프거든요.
아까 본 숫자와 멤버들의 반응, 스탯을 올려 줘야 하는 남은 멤버들을 떠올리며 지끈거리는 두통을 내리눌렀다.
한지헌을 마주치기 전에 튈 걸 그랬다는 생각이 반복되고 있었다.
* * *
박재민을 만나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목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여태까지 발생한 일들을 정리해 봤다.
일단 MXP 쪽에 관한 일은 서도경이 잘해 주고 있었다. 진짜 해낼지는 몰랐지만, MXP에겐 상당히 위험할 법한 자료들을 구해 내고 있었다.
시스템에 대한 진실도 얼추 알게 된 이후였다.
내가 왜 회귀라는 특수한 일을 겪었는지, 시스템은 도대체 뭐 하는 녀석인지, 거기다가 이상할 정도로 나를 잘 아는 것 같던 기이한 일들에 대한 연유까지 모두 알게 됐다.
최종 이벤트로 보이는 내용과 이어지고 있는 미션들만 제외하자면 나름 순항하는 중이었다.
그럼 남은 문제는 그건가. 며칠 전에 멤버들에게 시스템을 들킨 일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 키워드에서 돌아오는 과정을 들켜버렸다.
단순한 기억 키워드의 사용이었다면, 시간이 멈춘 상태에서 그 누구도 이상을 느끼지 못했을 터였는데.
그 녀석, 아니 시스템 신해신과 이뤄진 만남에 의해 그만 시간의 흐름이 바뀌어 버렸다.
나 같아도 믿기 힘들 거야, 사라졌던 사람이 옥상 한가운데에 나타나면.
사실 언젠가 멤버들에게는 시스템을 밝혀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밝힐 예정은 없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 줘야 하는 걸까. 스탯을 올려야 하는 멤버들이 셋이나 남아 있는 상태에서 옥상에서 있었던 사건이 복병이 되어 골치가 아팠다.
김환준이랑 지원겸은 언제 또 만나.
일단 연말 시상식과 무대를 준비하면서 지원겸과 김환준에게 연락을 넣어 보기로 했다.
애들 상태를 살핀 후 최대한 시스템에 대해 돌려 말하자. 그러다 보면 다음으로 스탯을 올려야 하는 멤버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억지로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저 멀리 보이는 숙소에 마음 한구석이 착잡해졌다.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음에도 쉬러 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