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그때였다. 시계 초침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 것 말이다.
째깍, 째깍. 익숙한 상황에 주변을 돌아보다가 품 안에 안겨 있던 두 녀석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까… 문채민과 윤명, 이 둘을 마지막으로 스탯 업데이트 미션에 성공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멈춰 있는 상태에서 흑백으로 물든 공간이 보이고.
문채민과 윤명의 곁에서 몸을 물린 찰나, 눈앞으로 파란빛과 함께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예상대로 멤버 전원의 스탯을 올리는 것에 성공했다는 알림이었다.
[‘히든 스탯 깜짝 미션’을 성공하셨습니다.]
[히든 스탯 깜짝 미션]
멤버들의 스탯을 업데이트해 주세요.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종료 기한 – 7인 모두 달성 시
보상 – 랜덤 지급
[멤버]
이정원 – 보컬 스탯 업데이트 완료 [A+ → S]
이유준 – 랩 스탯 업데이트 완료 [A- → A]
강태오 – 댄스 스탯, 운 스탯 업데이트 완료 [A- → A] [B+ → A-]
권혜성 – 끼 스탯 업데이트 완료 [A- → A]
윤명 - 끼 스탯 업데이트 완료 [C+ → B-]
문채민 - 랩 스탯 업데이트 완료 [A+ → S]
[랜덤 보상 지급이 시작됩니다.]
제로-원-나인, 너야? 내 질문에 맞춰 시스템 창이 모양을 달리했다.
저건… 지금은 통합되어 사라진 스폐셜 스킬 트리의 뽑기 기계였다.
픽셀들이 움직이며 블록처럼 쌓여 가고, 마지막이라는 듯 룰렛의 옆으로 긴 바가 설치되었다.
봐도 봐도 신기한 마음에 넋을 놓고 서 있자 그 위로 투명한 홀로그램 창이 나타나 말을 걸었다.
[^▽^!]
장난처럼 보이는 이모티콘과 표정, 제로-원-나인이 등장했다.
“왔네.”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자 픽셀로 이루어진 손이 나타나 내 행동에 맞춰 따라 움직였다.
직접 말을 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이렇게라도 의사소통이 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pull! ☞☞☞]
잡아당기라고? 그때, 룰렛의 옆으로 제로-원-나인의 명령이 떨어졌다.
시키는 대로 해야지. 랜덤 보상이란 말이 조금 걸리긴 했으나, 나쁜 건 아닐 거라는 생각에 있는 힘껏 바를 잡아당겼다.
착, 착, 착- 속도가 붙어 빠르게 돌아가는 세 개의 칸이 보였다.
그 안에 있는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룰렛을 쳐다보길 한참이었다.
그렇게 점차 느려지는 움직임에 룰렛을 예의 주시 하다가 돌아가는 공간 속에 적혀 있던 것이 아라비아 숫자임을 깨달았다.
도대체 뭘 주려는 건지, 제로-원-나인과 시스템 신해신의 속을 알 수 없어서 미간을 찡그렸다.
얼마 안 가 멈춘 룰렛의 칸 위로 최종 숫자가 떠올랐다.
[9.9.9]
…999? 저게 뭔데? 룰렛의 주변으로 파란 김이 나오며 숫자가 변형하려던 참이었다.
어, 제로-원-나인으로 보이던 시스템 창 위로 새로운 문구가 다시 떠올랐다.
[※stop※]
이번엔 멈추라니, 알 수 없는 내용에 홀로 골머리를 썩히던 중이었다.
시스템 창 위로 자그마한 픽셀들이 튀어나왔다.
꾸물꾸물 내 주변을 맴돌던 픽셀들이 한곳에 모여 하나의 형체를 그렸다.
그건 바로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달린 손이었다.
로봇이 움직이는 것처럼 관절을 꺾은 손이 룰렛을 향해 달려들었다.
공기처럼 사라지려던 룰렛은 픽셀 손에 잡혀 다시 제 형태를 갖춘 이후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광경에 그저 고개만 기울이는데, 이런 내 앞으로 처음보는 빨간 버튼이 나타났다.
“이건 또 뭐야.”
[press ☞☞☞]
“누르라고?”
제로-원-나인, 너 무슨 생각이냐. 하여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이었다.
룰렛을 돌리기 위해 바를 잡아당기란 것까진 이해했는데, 그 뒤에 나타난 손 하며 수상쩍어 보이는 버튼을 누르라 하니 망설이게 됐다.
[Hurry up haesin]
…너, 제로-원-나인이 아니구나. 재촉하듯 다시 말을 거는 시스템 창에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바를 잡아당기란 것까진 제로-원-나인이었던 것 같았으나, 그 이후 나타난 손과 발생한 일들은 시스템 신해신, 즉 내가 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제로-원-나인보다야 이쪽이 훨씬 믿음직스럽지.
급해 보이니까 뭐. 일단은 알겠다며 서둘러 눈앞에 나타난 버튼을 눌렀다.
달칵, 깊숙이 눌린 버튼이 번쩍 빛을 뿜어내고.
그와 동시에 룰렛이 사라지는 걸 막고 있던 손이 룰렛을 탁 놨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꾸물꾸물 움직이던 룰렛은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정지해 있었다.
이내 9.9.9를 가리키던 숫자 칸이 미세하게 떨리며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지막이라는 듯 룰렛을 지켜보던 손이 룰렛의 옆면을 강하게 내리쳤다.
퍽- 드르륵- 탁. 탁. 탁.
고장이 난 기계가 정상 작동한 것처럼 룰렛의 칸이 뒤집힌 것이었다.
거기서 나타난 최종 숫자는 1.0.0이었다.
[1.0.0]
그 뒤론 숫자만을 놔둔 채 룰렛이 자동으로 소멸했다.
펑 하고 터지는 장난감 같은 픽셀에 손을 들어 얼굴부터 가렸다.
스치듯 나를 통과해서 사라지는 기이한 광경을 보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을 땐, 황금빛으로 물든 숫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군. 뒤에 달린 기호를 보며 드디어 룰렛의 결과를 유추할 수 있었다.
[100%]
100%. 이건 확률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99.9%에서 끝나려던 상황을 시스템 신해신이 직접 나서서 도와준 모양이었다.
제로-원-나인도, 시스템 신해신도 이제는 사라졌는지 룰렛에서 나온 결과만이 남아 있던 공간이었다.
이제 그만 설명해 달라며 허공을 바라보는데, 그 위로 처음 보는 문구가 나열된 새로운 창들이 떠올랐다.
[(구매 불가)제로제로 게임 – 일회성 아이템]
버프: 사용자의 위기 상황을 없던 일로 해 줍니다. 단, 능력은 퍼센테이지에 맞춰 자동 조절됩니다. 다수 시전 사용 가능.
*게이지: 100%
오랜만에 보는 보상용 아이템이었다. D 트레일러와 운명 디펜서 이후론 간만에 받은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상당히 좋은 능력에 얼떨떨했다.
그래서 도와주러 온 거였구나. 퍼센테이지 숫자에 맞춰서 효과가 주어진다는 내용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라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연말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스르륵 사라지는 시스템 창과 아이템이 아이템 보관함에 저장되었다는 문구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째깍, 째깍. 주변을 울리고 있던 시계의 초침 소리가 점점 옅어져만 가고.
이내 어느 순간 흑백이던 주변이 원래의 색을 되찾으며 생동감이 느껴졌다.
모두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스르륵, 백스테이지 위로 바빠 보이는 스태프들의 외침과 관객들의 환호성이 귀를 울렸다.
“…으악!”
“…어, 어.”
품에 안겨 있던 내가 빠져나간 탓이었는지 윤명과 문채민이 앞으로 넘어질 뻔한 광경을 목격했다.
간신히 발을 뻗어 균형을 잡더니 어리둥절하단 얼굴로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뒤에 있던 멤버들은 무슨 상황이냐며 의아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
“뭐지? 방금 전까지 해신이 형이랑 붙어 있었던 것 같은데.”
윤명과 문채민의 물음에는 그저 가볍게 웃어 주기만 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만히 팔을 뻗어 장하다며 위로를 해 줄 뿐이었다.
해야 할 일 중 하나를 무사히 끝마친 상황이었다.
남은 건 내가 얼른 낫는 것과 연말 그리고 연초 시상식을 훌륭히 해내는 것뿐이었다.
* * *
그렇게 다시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흘러갔다. 정말 연말 시상식 무대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은사님을 비롯하여 최주형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두 눈으로 직접 멀쩡한 걸 확인해 봐야겠다며 당장이라도 올라오겠다는 것을 뜯어말리느라 고생했었다.
안 그래도 MXP에서 위험한 노선을 타고 있는데. 연로하신 은사님과 아직 어린 최주형을 이 일에 엮을 수 없었다.
연말, 아니 연초 시상식까지만 잘 마무리 지으면, 내가 직접 내려갈 테니 제발 거기 있어 달라고 부탁을 드린 뒤였다.
은사님은 뭔가를 눈치채시기라도 하셨는지 일단은 알겠다며 수긍해 주셨었다.
주형이 녀석을 달래는 게 조금 벅차긴 했지만. 은사님과 스페인에 있던 이모 그리고 이모부에게 한 소리를 들은 덕분에 직접 내려오라는 허락을 받았다.
어떻게 무사히 한쪽이 끝났다고 생각하자마자 동료 연예인들에게서 안부 문자가 쏟아졌었다. 그야말로 정신이 없던 나날이라고 봐야만 했다.
다들 활동기와 연말 시상식으로 바쁜 탓에 직접 찾아오지는 못한 것 같았으나.
차라리 다행이라며 안도감을 느꼈다.
괜히 우리랑 엮였다가 저기까지 피를 보면 난감해졌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동료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유달리 특이한 행보를 보이는 인물들이 있었다.
…지원겸과 김환준. 사고를 직접 목격했던 탓이었을까, 병원까지 퇴원한 나를 찾아오겠다고 말한 멘토와 선배였다.
하나만 온다고 했어도 정신이 없었을 텐데. 둘이 동시에 회사로 들이닥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자리를 알아볼걸.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메이터스의 안무 연습실이었다. 약속을 한 것까지는 좋은데,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은 고마운 마음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온 건 좋다고 치자…….
그런데 뭐 때문에 이 둘이 이렇게 찾아온 것인지 의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연말 무대의 연습을 위해 방문했던 회사라 연습실 내부에는 우리 멤버들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연습실 구석에 앉아 우리를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바쁜 멤버들이 보였다.
대놓고 들으라는 건지, 아니면 감추지를 못하는 건지. 이정원의 날카로운 외마디가 귀를 찔렀다.
“신해신 혼자 고생하는 것 같은데.”
야, 이정원.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MXP의 행보에 대한 힌트를 준 게 문제였었나 보다.
지원겸과 김환준과도 여러 가지 정보를 주고받았다 했으니, 내가 위험해진 일에는 저 둘과 얽힌 탓이 있다고 보는 듯했다.
애써 이정원의 말은 못 들은 척 맞은편에 앉아 있는 김환준과 지원겸을 바라봤다.
턱을 괸 채 멤버들 쪽을 곁눈질하는 지원겸과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는 김환준을 보니 골치가 아프려고 했다.
“야, 신해신. 이정원 쟤 한 성깔 한다?”
“…그걸 이제 아셨어요?”
“나도 알고 있었는데.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눈빛이 아주 매섭더라고요.”
“그건 네 업보잖아. 과거를 생각해 봐라. 나 같아도 질색팔색하지.”
MXP와의 소동을 겪으며 나름 친해진 것 같은 두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화를 내려나? 일단은 속으로 삭히며 흐린 눈을 했다.
아니, 그래서 왜 찾아온 거냐고요. 비밀 회동이 필요했으면 여기가 아니라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했었다.
혹시 대표실로 갈 걸 잘못 왔나? 이제라도 안내해 줄까 고민하는데 지원겸이 머뭇거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니, 그…….”
그런 지원겸을 보고 있던 김환준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어 보였다.
“여기 성격이 삐딱한 선배는 후배가 걱정돼서 찾아왔다는 말도 못 하네요. 난 솔직하니까 제대로 얘기해 줄게요. 신경 쓰여서 왔어요. 눈앞에서 그런 사고를 당했는데 병원에 못 찾아간 건 미안해요. 스케줄이 겹쳤었거든요.”
김환준의 이야기에 멀리 떨어져 있던 멤버들이 이곳을 돌아봤다.
아까는 힐끔거리기라도 했지, 이젠 아주 대놓고 쳐다보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