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순간 머릿속으로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연히 복도에서 한지헌을 만나 서도경에게 끌려갔던 날의 일이었다.
활동 관련하여 안부를 주고받는 척 MXP의 자료를 모았다며 내게 알려 줬었지.
거기서 한지헌과 서도경이 미심쩍은 행동을 보였었다. 아니, 정확히는 미심쩍은 ‘말’이었다.
뭐라고 했더라, 그래,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굴었었다.
‘팀에 무슨 일이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신해신 씨가 능숙해진 편이긴 하지만, 아직은 티가 나거든요.’
대표실을 나서기 일보 직전에 경고처럼 내뱉은 이야기가 떠오르니, 이제야 모든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서도경, 너……. 아무래도 서도경은 시스템 관리자라는 한지헌을 통해 우리에게 들이닥칠 사고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밴에 대해 조사를 요구하자 아무 말 없이 도움을 준 것이었다.
차오르는 배신감과 놀라움에 그대로 입을 벌렸다.
한지헌이 미약하게나마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것을 보며 탈력감이 들었을 정도였다.
서도경은 그런 나와 한지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혹여라도 내가 화를 낼까, 능청맞은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한지헌을 제 수족처럼 뒤에 세운 서도경이 미안하다는 듯 장부를 꺼내 밀며 이야기했다.
한지헌이 고개 숙여 인사한 것과 같은 타이밍에 한 사과였다.
“한 번쯤은 인사시켜 주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그 시간이 찾아온 것 같네요, 한 실장님.”
“네. 신해신 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지헌, 아니 플레이어 서도경의 시스템 관리자 제로-제로-원입니다.”
“이게 무슨…….”
복잡한 머리에 눈만 깜빡이고 있길 한참이었다.
시스템 관리자가 사람일 수도 있나? 실체화되진 못했던 제로-원-나인과 영혼만으로 관리자가 된 또 다른 나를 떠올리며 한지헌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동안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고 현실 세계에서 수많은 일을 처리한 걸 보면, 두말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서도경은 그런 나를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빠른 설명을 위해서였는지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하나둘씩 밝혀왔다.
“한 실장님, 아니 제로-제로-원은 원래 신해신 씨의 담당자와 같이 시스템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시스템이었죠.”
“…왜 과거형인데요?”
“그야 이제는 그 힘을 많이 잃었으니까요?”
“네?”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인생을 두 번 거슬러 올라온 사람이라고. 첫 번째에선 나도 신해신 씨와 같은 플레이어였습니다. 관리자가 조금 더 관대하고 신분이 높은 직급이었다는 걸 제외하면, 신해신 씨처럼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겪었었죠. 그런데 그게 모두 뒤틀렸습니다. 제 입장에선 좋게, 한 실장님, 아니 여기 제로-제로-원에게는 나쁘게요.”
“…설마.”
“뭘 생각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아마 그 생각이 맞을 겁니다. 내가 말할까요? 아니면 한 실장님이 말할래요.”
“편하실대로.”
“그럼 내가 마저 말하지 뭐. 휘말렸습니다, 신해신 씨의 회귀에. 나뿐만이 아니라, 여기 시스템 관리자인 한 실장님도.”
서도경의 이야기엔 저도 모르게 한지헌을 바라보게 됐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제로-원-나인의 과격한 회귀에 생판 남이던 서도경을 비롯하여 시스템 관리자였던 한지헌이 함께 엮였단 이야기였다.
어쩌다가? 솟아오르는 의문에 미간을 찡그리다가 제로-원-나인의 자기 역시 처음 해 보는 일이라며 짓궂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실험을 거쳐서 해 본 것이었는데, 악성 버그의 힘이 참 강했다고 알려 준 일화였다.
설마 그게 잘못됐던 건가. 한지헌은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다는 얼굴로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으로 말하니, 당사자인 둘보다 내가 더 죄책감이 드는 듯했다.
“제로-원-나인은 몰랐지만, 악성 버그로 인생이 뒤틀린 케이스는 신해신 씨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고위험 요소라 제로-원-나인과 비슷한 라인의 관리자들에겐 알려지지 않았던 것뿐이죠. 제로-원-나인이 신해신 씨의 인생을 돌리기 위해 실험까지 펼치고 있을 줄은 몰랐다네요. 위쪽 선에선 어느 정도 감당이 되는 일이었는데, 제로-원-나인에겐 약간의 허점이 있었던 거죠. 그 덕분에 저와 한 실장님은 영혼이 엮여서 신해신 씨의 회귀에 한 발 담그게 됐네요. 아, 미안해하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한 실장님은 인간의 몸도 가져 보고. 나름 새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니까요.”
제로-원-나인……! 한지헌은 한참 후임인 제로-원-나인의 불안정한 회귀에 휘말린 상사였다.
거기서 뭐가 잘못됐는지 제로-원-나인과는 다르게 인간의 몸으로 서도경의 곁에 있게 되었다고 했다.
인간의 몸인 상태에선 시스템 관리자의 이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는지 제법 수고로운 일들이 많았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해줬다.
본인들은 가볍게 꺼내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미안함에 고개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제로-제로-원(001)과 제로-원-나인(019), 거기서 두 시스템 관리자의 상호 관계에 대해 모두 알게 됐다.
숫자로 위아래가 구분되는 거였구나. 파도 파도 신기한 시스템 데이터의 세계였다.
그 와중에 한지헌은 남아 있던 정보들과 사용할 수 있는 능력들을 통해 나와 서도경을 백업해 왔던 듯하다.
확실히… 한지헌은 진실을 캐 오는 실력이 장난 아니었으니까. 도움을 받지 않았다곤 우스갯소리로도 하지 못했다.
당장은 시스템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전부 회복할 거라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거기에 능력만 제한되어 있을 뿐이지, 소문은 자신이 제로-원-나인보다 월등히 빠르다며 나에 대해선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오늘 신해신 씨를 불러들인 겁니다.”
“사고가 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신해신 씨밖에 없었으니까요. 우리도 사전에 얘기 정도는 해 주고 싶었는데. 그게 사건을 암시해버리면 이쪽에는 대미지가 오거든요.”
서도경의 말에는 전부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서도경과 한지헌에겐 그날 그 자리가 내게 해 줄 수 있었던 최선의 경고였던 것이었다.
서도경은 내가 모든 걸 받아들였단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지금까지 본 얼굴 중에서 가장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장부를 펼쳐 들었다.
“자, 그럼 출격할 시간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신해신 씨가 무사히 멤버들을 구하고, 나한테 오는 걸.”
“…….”
서도경의 이야기에 마른침이 삼켜졌다.
이건… MXP와의 전면전을 시작하겠단 내용이었다.
* * *
그날부터 세상엔 온통 큰일이 벌어졌다.
서도경의 말처럼 MXP에 대한 총공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건지, 정체를 숨긴 서도경 측에서 기사를 뿌렸다.
[더럽혀진 연예계? 그 불공정한 거래에 대하여]
[뒷거래 리스트, M 기업 충격 파문]
[피해자만 해도 수백 명 예측. 기업의 독과점과 그 위험성]
MXP를 죽이기 위한 여론전이었다.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가만히 있었던 우리로선 다소 파격적인 선택이었는데.
매일같이 찍혀 나오는 뉴스 보도와 얽혀진 관계들이 인터넷을 장악하고 많은 대중들의 입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 미친 거 아니야? 저기 MXP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대로 병크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와 진짜 믿을 회사 없다
- K프로듀서 얘네 걸그룹 A런칭한 놈이잖아 이 정도면 진짜 깨끗한 놈 없구나 ㅉㅉ
- 헐 진짜 개충격이다…….
서도경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건 지원겸네 회사와의 합작이었던 듯하다.
물론 그쪽도 익명으로 몰래 활동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지원겸이 알고 있던 정보의 소재지로부터 MXP의 피해자들을 찾아냈다고 들었다.
거기서 지원겸네 회사 사장이 도움을 줘 글을 쓰게 하면 서도경이 몰래 법적인 문제로부터 도움을 주는 형식이 무한 반복됐다고 했다.
김환준이 내부 사정에 대해 힌트를 줬던 일로부터 가시처럼 엉켰던 일들이었다.
그 글들이 MXP의 블랙리스트와 연관이 되어 뉴스처럼 보도가 되면, 서도경이 아는 기자를 통해 소문을 퍼뜨리고, 지원겸네 소속사가 연결된 기자단을 풀어 글을 쓰게 하는 콜라보가 쉼 없이 이어졌다.
멈출 줄 모르는 연타 공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회적 이슈몰이가 적었던 상태에서 연쇄적으로 비도덕적인 추문들이 터져 나왔던 덕이었을까.
MXP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명예스러운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연초 시상식을 앞두고 있던 상태에서 우리가 원하던 재기 불능한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와,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게…….”
“…근데, 저기 너무 힘을 못 쓰는 것 같지 않아?”
“맞아. 형들, 잊었어? 저기 예전 같았으면 악착같이 빠져나갔잖아.”
멤버들의 반응에는 홀로 실소를 삼키기 바빴다. 그것도 다 이유가 있지.
지금까지 사람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놈들이 이렇게 한 방에 몰락한 원인에는…….
“신해신, 너 뭐 알고 있지?”
“…….”
그래, 바로 내가 있었다.
무서운 눈빛으로 몰아붙이는 이정원과 멤버들에겐 모두 한자리에 모여 달라 손짓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냐…….
시간을 돌리자면 서도경에게 시스템 관리자라던 한지헌을 소개받은 그날이었다.
한지헌과의 사실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된 무렵으로, 서도경에게서 본격적인 작전과 돌입에 대해 듣게 됐었다.
‘기사는 곧바로 터질 겁니다. 신해신 씨가 사고로부터 무사히 돌아올 일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서도경은 과거 내가 조명에 깔려 다리를 다치게 된 날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게 이 온갖 비리 장부와 무슨 연관이 있나 했는데.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된 이후부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조명 사건, 범인은 찾아 뒀습니다. 실형은 면하게 해 주는 조건으로 증언은 전부 받아 둔 상태고요. 차량에 대한 조사도 착수에 들어간 부분입니다. 사람 위로 조명도 떨어트리는 놈들인데, 차량 급발진에 거기가 안 끼어 있을 리 없잖아요?’
서도경은 MXP의 기업적인 비리에 이어 비도덕적인 행태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있던 것이었다.
사고가 나서 차량이 반파되었다면 알아내지 못했을 부분조차 무사 생환하여 돌아왔으니, 새로운 증거를 하나 더 얻게 되었다고 밝혔다.
‘두 개를 동시에 터뜨릴 겁니다. 물론 한쪽은 막을 시간을 살짝 준 상태로요. 논란은 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잊혀질 기업 비리와, 인명을 해치려 했다는 엄청난 사건의 뉴스 속에서 MXP는 과연 어느 쪽을 먼저 막으려 들까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둘 중 뭐를 막아도 나머지 하나가 MXP에겐 지울 수 없는 타격을 입힐 거란 겁니다.’
서도경은 괜히 기업인이 아니었다는 듯이 여기서 여러 가지 힌트를 얻은 모양이었다.
MXP가 빠져나갈 길은 전부 틀어막았단 이야기였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서도경이 MXP에게 직접적인 딜을 걸 거라고 했다.
MXP가 막을 부분이 기업 비리가 아닌 인명 사고일 거란 걸 예측을 한 것처럼, 이 부분을 묵인해 주는 조건으로 다시는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라고 말했다.
‘묵인도 뭐, 제 딴에선 묵인인거죠. 이 부분은 신해신 씨에겐 조금 미안한데요.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겠어요?’
윙크해 오는 서도경에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간, 봐줄 생각이 없었구나. 기업 비리를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MXP를 속여 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잘 먹힌 건지, 아니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일들에 MXP가 정신을 놓은 건지 MXP는 완벽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여기에 내 도움이 없었냐 하면, 아니, 사실 거기에도 내 지분은 조금 크다고 말해야 했다.
‘그럼 저도 하나 도울게요.’
나는 거기서 갖고 있던 아이템을 하나 꺼내 들었다. 보관함에 넣어 놓고 잊은 제로제로 게임과 달리 항상 머릿속에 기억해 둔 아이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