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2021.06.06.
‘다들 나만 보고 있어……!’
수많은 시선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렇게 주목받는 건 처음이라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지만 평소처럼 누군가의 뒤로 슬그머니 숨어버리거나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오늘은 결혼식이고, 내가 바로 신부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삼십 분이면 예식이 끝난다고 했는데…….’
결혼식을 대비하기 위해 온갖 예법서를 찾아 읽었다. 모두의 앞에서 실수해서 망신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인지 특별한 실수는 하지 않았지만 의외의 변수가 발생할 줄은 몰랐다.
‘신랑이 한 시간 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니.’
제단 앞에 서서 홀로 수많은 시선을 감당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오래 기다리는 내가 불쌍했는지 친절한 신랑의 부하가 대리인을 자처한 덕분에 더 이상의 민망한 상황은 피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결혼식을 주관하는 사제는 두 손을 모아 짧게 기도를 올린 후, 결혼식장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끔 혼인 서약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평생을 부부로 살아가야 할 두 사람을 축복하는 내용이었다.
“신랑의 대리인과 신부. 혼인 서약서의 내용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겠습니까?”
“네.”
“네.”
뒤이어 사제가 나와 신랑의 대리인 앞에 혼인 서약서를 내밀었다.
“아래에 빈 공간이 보일 겁니다. 이곳에 두 사람이 서명하면 혼인이 성립됩니다.”
사제의 말처럼 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진 서약서의 하단에 신랑과 신부의 서명이 들어갈 자리만이 공란으로 남아 있었다.
“먼저 신부께서 서명하시지요.”
사제의 말에 옆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어린 사제가 펜을 건네주었다. 이 서명만 하면 예식이 끝나고, 드디어 모두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신랑도 없이 결혼식을 치른 신부라며 사람들이 비웃겠지…….’
혹시나 지금이라도 문이 열리고 신랑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 입구를 힐끗댔지만,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시무룩한 마음으로 빈 공간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 나디아 바인. 오늘부터는 남편의 성을 쓰게 될 테니, 이 이름으로 하는 마지막 서명이 될 테다. 긴장해서 손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글씨가 구불구불해진 게 마음에 걸렸지만 사제와 신랑의 대리인은 크게 질책하지 않는 눈치였다. 참으로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신랑의 대리인께서 서명해주십시오.”
어린 사제는 내가 서명했던 펜을 회수한 뒤 조르르 신랑 대리인에게 다가갔다.
‘이로써 신랑에게 결혼식 날부터 버림받은 신부 확정이구나.’
그런데 신랑 대리인이 손을 뻗어 펜을 집으려는 순간. 입구에서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보니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어느새 활짝 열려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많이 늦은 모양이군.”
빛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였다. 남자는 융단이 깔린 길을 따라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확인할 수 있는 건 실루엣뿐이었지만 체격이 아주 좋아보였다. 그가 조금씩 다가올수록 후광처럼 쏟아지던 빛이 희미해지며 남자의 형상이 선명해졌고, 동시에 묘한 냄새가 짙어져 코끝을 자극했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였다.
‘이게 무슨 냄새지?’
하지만 냄새의 정체를 오래 추리할 필요는 없었다. 마침내 사라진 빛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몰골에 그 답이 있었으니까.
‘헉!’
남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헙!’
피를 뒤집어쓴 남자가 성큼 다가오는 것과 동시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며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피……피가……!’
나는 피를 보면 기절해버리는 공포증이 있었다. 하지만 볼썽사납게 지금 이 자리에서 기절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결혼식은 마쳐야 한다는 책임감에 눈을 부릅떠 보았지만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 사이로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사신 같은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영주님!”
신랑의 대리인을 자처했던 남자가 경악에 찬 비명을 토해냈다.
‘영주님?’
저 남자가 내 남편이 될 이곳의 영주라고?
‘내 남편 될 사람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불구랬는데……?’
그 소문은 완전히 틀렸다. 남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져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내가 놀라서 남자의 얼굴을 관찰하는 사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내며 내 앞에 섰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정확히 눈에 들어왔다. 왼쪽 눈 밑의 눈물점이 유독 눈에 선명히 각인됐다.
차갑고 매서운 인상이긴 했지만, 그는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이런 몰골로 마주치지 않았다면 분명 감탄했을 미려한 외모였으나 한가하게 상대의 외모를 평가할 상황이 아니었다. 긴장감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시감이 느껴지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서 본 것 같은…….’
그러나 의문이 더 이어지기 전에 신랑의 대리인이 남자에게 펜을 건넸다.
“아예 늦지는 않으셨습니다. 서명은 직접 하시죠, 영주님.”
“그런가.”
남자는 담담하게 펜을 받아 들고 유일하게 비어 있는 공간에 제 이름을 써 넣었다. 알테어 에일스포드. 눈으로 글씨를 따라 읽던 나는 놀라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검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 눈 밑의 눈물점이 다시 눈에 들어오자, 기묘했던 기시감의 정체를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자, 잠깐……!’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하고 눈 밑에 눈물점까지 있는 차가운 인상의 알테어라면…….
‘그 미친 악역 공작이잖아!’
왜…… 왜 네가 여기서 나오시는 건데요……? * * * 책 속의 세상에 환생했다. 아니, 빙의라고 하는 게 좋을까? 사실 내가 처음부터 이 사실을 깨달은 건 아니었다. 다시 태어나기 전의 나는 아주 소심하고 심약한 성격이었다. 특히 사람을 대하는 게 무엇보다 어렵고 힘들었다. 물론 다시 태어난 뒤에도 그런 기질은 전혀 변하지 않아서 사람 많은 곳은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귀족 아가씨들이 즐기는 무도회나 티파티 같은 것도 질색이었다. 다행히 부모님께서는 너그러우신 분이라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딸을 이해해주셨다. 하지만 성인이 되는 해,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를 올려야 하는 데뷔당트만은 피할 수가 없어서 눈물을 삼키며 황궁 무도회에 참석했다가, 누구보다 빛나는 여주인공 아벨리나를 보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바로 이곳이 소설, <검은 장미의 배반> 속의 세상이라는 것을! <검은 장미의 배반>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책은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죽는 걸로 유명한 피폐소설이다. ‘그래도 주인공은 살겠지. 주인공이니까!’라고 생각했던 독자들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쳐버렸던 바로 그 작품. 하필이면 그 책 속의 조연, 나디아 바인으로 다시 태어나다니! 나는 그저 더 이상 이렇게 소심하게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담력을 키워보고자 유명하다는 피폐 소설을 읽었을 뿐인데! 중간중간 보기 힘든 장면도 많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50번 정도만 읽었을 뿐인데!
‘피폐 소설에 환생하다니…… 물론 소심한 걸 고쳐보고 싶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담력을 키우고 싶진 않았어…….’
이 책에는 무시무시한 악역이 등장한다.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도 특히 무서워했던 인물. 그게 바로 미친 공작, 소위 ‘사신’이라 불리는 알테어였다. 그는 자신의 주군이자 반역을 꿈꾸는 3황자의 명에 따라 반대파 귀족 가문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사람들의 목을 우수수 베어 넘긴다. 작가의 묘사가 어찌나 실감 나는지 글을 보고 있는데도 서슬 퍼런 알테어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오싹했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에는 더러운 짓을 털어 내려는 3황자의 손에 알테어 공작도 죽임을 당하는데, 의지의 악역답게 죽는 순간 이를 악물고 3황자의 목을 베었다. 그리하여 주요 등장인물 모두 사망이라는 전설적인 엔딩이 만들어졌다.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엔딩이냐고 항의가 엄청 쏟아졌지.’
‘나디아 바인’도 알테어의 손에 죽는 인물 중 하나였다.
‘악역의 손에 목이 뎅겅 잘려서, 그게 바닥에 굴러다니고…….’
사실 나디아는 비중이 그리 큰 인물은 아니었다. 여주인공 아벨리나의 라이벌 루비체의 친구 3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는 조연인데, 늘 루비체의 말에 동조하는 앵무새 같은 캐릭터라 눈에 띄는 분홍색 머리라는 특징 외에는 딱히 묘사도 없었다.
‘내가 여주인공 아벨리나였으면, 아니, 하다못해 루비체라도 되었으면 이게 소설 속인 걸 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뒤늦게 이곳이 소설 속 세상이라는 걸 깨닫고 천천히 기억을 더듬자 루비체 뒤에 늘 분홍 머리의 어리바리한 여자애가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이렇게 눈에 띄는 특징이 없었다면 조연으로나마 소설 속에 등장했다는 사실도 몰랐을 거다. 그런데도 피폐 소설의 등장인물이라는 이유로 목이 뎅겅 잘리다니!
‘보통 이럴 때 책 속에 빙의한 주인공들은 운명을 바꾸겠다며 똑똑하게 움직이던데.’
그런 건 전부 소설이니 가능한 이야기다. 피폐 소설을 보며 덜덜 떨기나 하는 내가 무슨 수로 수도에 몰아칠 비극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조금 비겁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사건의 배경이 되는 수도를 떠나자. 그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의 나는 가족을 잃고 성격 나쁜 숙부님의 집에 얹혀사는 처지였다. 데뷔당트 이후 갑작스러운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작위가 숙부에게 넘어가 순식간에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다. 숙부님은 위세 높은 바인 후작으로 거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무척이나 인색했기 때문에 내게 독립 자금을 한 푼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수도를 벗어날 방법을, 그리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방법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이제 갓 성인이 된 빈털터리 귀족 아가씨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혼’이라는 선택지 외에는. 결혼 역시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가만히 수도에 있다가 목이 뎅겅 잘리는 것보다야 백배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살다 보면 언젠가는 할 결혼이 아닌가? 결혼해서 저택을 떠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나를 밥만 축내는 거머리로 생각하던 숙부님은 신이 나서 적당한 남자를 골라주었다. 그렇게 골라온 남자가 에일스포드 남작이었다. 숙부님의 말에 따르면 제국의 동쪽 끄트머리, 시골 깡촌의 가난한 영지를 가진 게 전부인 내 또래의 남자라고 했다.
‘하지만 어차피 나도 빈털터리에 내세울 게 없는 건 마찬가지인 걸.’
오히려 쥐꼬리만 한 지참금을 가지고 시집가는 날 받아주겠다고 나서줬으니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숙부님의 딸이자 동갑내기 사촌 멜리사의 말에 따르면…….
“그 사람, 완전히 개털이래. 영지가 너무 가난해서 오죽하면 별명이 거지 남작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도무지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나 봐. 누가 거지 남작과 결혼해서 거지 남작부인이 되고 싶겠니?”
……라고 한다.
“이해는 돼. 동부 국경이라면 깡촌에다 척박하기로 소문난 곳이니 부를 쌓기 힘들었을 거야. 다만 나는 수도에서 편하게 자란 네가 그런 곳으로 시집간다니 마음이 무거워져서 말이야. 게다가 그 남편이라는 자는…… 추남에다 고자래!”
……라고도 했고.
“어머. 너무 상심하지는 마. 생각해보면 다행인지도 몰라. 못생긴 남편과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잖아. 듣자 하니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불구라던데…… 건강도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일찍 죽어버릴 수도 있겠어. 그 뒤에는 죽은 남편의 재산으로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면…… 아차! 네 남편이 될 사람은 거지 남작이었지? 어쩜 좋니. 오호호!”
……숙부님께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혼처를 찾아온 것 같았지만, 어쨌든 수도를 벗어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크게 불만을 갖지 않고 부랴부랴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멜리사의 말은 전부 틀렸다. 추남이라더니 엄청난 미남이지를 않나,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불구라더니 남의 것이 분명한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날 노려보고 있지를 않나. 멜리사가 입만 열면 거짓말을 쏟아낸다는 걸 알면서도 또 그 애의 말을 믿다니! 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수십 번을 읽었으니 확실히 안다. 이 남자는 지금 에일스포드 남작이라는 남루한 이름을 갖고 있지만, 후에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워 ‘제틀런드’라는 새로운 성을 하사받고 공작이 된다. 그 이후 전쟁터에서 함께 싸웠던 3황자의 수족이 되어 주요 귀족 집안을 쓸어버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혼을 서두르느라 그 악역이 원래는 변방 귀족이었는데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공작이 된다고 했었던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
아니, 그걸 알았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개털이라 거지 남작이라고 불린다던 에일스포드 남작이 미래의 악역 공작인 걸 누가 알았겠어!’
제대로 망했다. 호랑이를 피하려다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격이었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오다니 운이 나빠도 이렇게 나쁠 수가 있을까?
‘첫 번째 삶은 교통사고로 죽고, 두 번째는 미친 악당의 손에 목이 잘려서 죽을 운명이라고?’
억울했다. 다른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고 싶을 뿐인데……!
‘아니야. 나디아 바인. 치, 침착하자.’
나는 잔뜩 긴장해서 도로록 눈동자를 굴렸다.
‘악역이라고 태어났을 때부터 악역일 리가 없잖아. 아직 원작이 시작되기 전이니까 악역을 어떻게든 갱생시켜서 악역이 되지 않게 하면…….’
최대한 희망적인 생각을 해보려고 노력하며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알테어가 미래의 악역답게 싸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목을 벨 것 같은 눈이었다. 피를 뒤집어쓴 상태라 더욱 공포스러웠다.
‘히익!’
소설 속에서 봤던 묘사가 떠올라 간담이 서늘해졌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이상하지 않은가?
‘왜 다들 조용하지? 영주님이 이렇게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났는데?’
누구 하나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희망적인 생각에 크게 금이 갔다.
“다 쓸어버리고 오신 겁니까, 영주님?”
“확실하게 목숨을 끊어 줬다.”
의미심장한 대화에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한 놈은 살려놨으니 적당히 입을 열게 해 봐.”
알테어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음산하게 웃으며 부하에게 명령을 내린 뒤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싸늘한 눈빛이었다.
“너. 앞으로 몸조심해.”
“네?”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소리다. 멍청하게 굴면 금세 목이 날아갈 테니. 내 손으로 아내의 송장을 치우게 하지 말라고. 알겠어?”
세상에.
‘이건 멍청하게 굴면 목을 날려버리겠다는 소리지……?’
악역님께서는 소설이 시작되기 전부터 훌륭한 악역이셨구나. 희망적인 생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애써 버티고 버티던 정신이 그대로 뚝 끊어졌다. 순식간에 동력을 잃은 몸이 땅으로 무너져 내렸고,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 *
“뭐가 문제지?”
알테어는 침대에 축 늘어진 나디아를 보며 의사를 재촉했다. 결혼식 도중에 쓰러져버린 새 신부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의사가 태연하게 구는 걸 보면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닌 듯했지만 평생 기절이라는 게 뭔지 모르고 살아 온 알테어가 보기에는 죽기 직전의 상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수도에서 동부로 오는 길은 멀고 험하지요.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큰 문제는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
알테어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피곤하면 사람이 기절을 하나?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