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결혼이 망했어요!2021.06.09.
의사는 난처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그게…… 평범한 사람들은 그러기도 합니다. 마님께선 특히 연약하신 편이신 것 같으니 많이 신경 써주셔야 합니다.”
“……손 많이 가는 신부를 들였군.”
알테어가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리자 찬바람이 쌩쌩 부는 매서운 얼굴에 의사가 겁에 질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무튼 몸을 보하는 약을 처방해드리겠습니다.”
의사의 시선은 알테어가 아니라 그의 뒤에 선 부관, 블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결혼식에서 알테어의 대리인으로 나디아의 옆에 섰던 사람이었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알테어와 달리 금발 머리의 화사한 인상을 가진 청년이라 훨씬 대화하기가 편했다.
“수고했네.”
블란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알테어 대신 준비해 둔 돈을 의사에게 쥐여 주었다. 사색이었던 의사는 어느새 화색이 되어 꾸벅 인사하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영주님.”
블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팔꿈치로 알테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 말투부터 좀 고치셔야 합니다.”
“내 말투가 왜?”
“사내놈들도 겁먹는 사나운 말투로 마님께 틱틱거리셨잖습니까. 거기다 피까지 뒤집어쓰고 나타나셨으니 레이디께선 당연히 놀라지요.”
“무슨 헛소리야. 난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다. 욕도 안 했잖아?”
“아니, 그게 기준이면 곤란하다니까요…….”
블란이 답답하다는 듯 손으로 제 머리를 헤집었다. 척박한 동부의 사정 때문에 에일스포드 사람들은 거친 면이 있었다. 그중에도 알테어는 특히 말투가 매서운 편이었다. 어린 나이에 영주가 되어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부하들을 통솔하느라 생긴 버릇이었는데, 성인이 된 후에도 습관처럼 굳어진 버릇이 잘 고쳐지지 않았다. 중부에서 오래 기사 수련을 받고 돌아온 블란도 갓 복귀했을 때는 적응이 힘들었다. 사내놈인 자신이 그랬으니 수도 귀족 출신인 마님이야 당연히 기겁했을 거다.
“아무튼 좀 다정하게 대해주십시오. 이런 시골 가난한 남작한테 시집오겠다는 아가씨가 흔한 줄 아십니까? 마님께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넙죽 절을 해도 모자랄 마당에 송장 운운하며 겁주셨으니 기절 안 하고 배겨요?”
“다정하게라니, 뭘 더? 저 죽이려고 따라붙은 놈들까지 잡아줬는데.”
“애초에 놈들이 따라붙은 것도 저희 쪽 사정 때문이잖습니까. 분명 발하일 쪽에서 보낸 놈들일 텐데.”
‘발하일’이라는 이름에 그렇지 않아도 싸늘한 알테어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졌다. 발하일은 알테어의 사촌으로, 후계자가 없는 에일스포드 남작의 가장 가까운 상속자였다. 알테어가 이대로 후계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작위는 그대로 발하일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가난한 영지지만 작위는 소중하다. 발하일은 오래전부터 에일스포드 남작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느긋하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가 좀처럼 신붓감을 찾지 못하는 알테어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왜 결혼이 필요했는지 잊지 마십시오. 빠른 시일 내에 후계자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발하일 쪽에서도 헛된 희망을 버릴 게 아닙니까. 뭐, 첫날밤부터 이렇게 되어버려서야 쉽지만은 않겠지만요.”
블란이 진지한 얼굴로 강조하며 창백하게 질린 채 기절해 있는 나디아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늘은 어쩔 수 없으니 푹 쉬게 두시고 내일 식사라도 함께 해 보십시오. 아니면 직접 준비해서 갖다드린다든가…… 원래 식사를 챙겨주는 사람에게는 호감이 생기지 않습니까? 기분이 풀리시게 저녁에는 만찬도 준비하고요.”
“…….”
알테어는 침묵을 지켰지만 블란은 그가 자신의 조언을 들을 걸 알았다. 알테어 에일스포드는 싫다면 싫다고 확실히 말하는 사람이니까.
“남편으로서 호감을 얻기 전에 인간적인 호감부터 얻으셔야 합니다. 그게 순서예요.”
“알아, 안다고. 내가 무슨 머저리인 줄 알아?”
시작을 거하게 망쳐버렸으니 분명 쉽지 않은 일이 될 거다.
“아무튼 힘내십쇼. 다들 힘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블란은 격려를 담아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다 곧 중요한 문제가 생각났다는 듯 알테어에게 물었다.
“아. 그런데요, 영주님.”
“……?”
“부인과 밤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알고 계시죠? 혹시 처음이신가 해서.”
“이, 넌 무슨 그딴 질문을……!”
“쉿! 마님이 깨십니다! 마님께서 그렇게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면 또 무서워하실걸요?”
평소처럼 버럭 소리치려던 알테어가 블란의 말에 황급히 입을 꾹 닫았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블란의 입에서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꺼져.”
알테어가 이를 바드득 갈며 거칠게 블란을 밀어냈다. 하지만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훨씬 줄어든 채였다. 게다가 묘하게 귀가 빨간 것이…….
“흠. 처음이셨구나, 우리 영주님…….”
“닥쳐!”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거울을 바라보니 몰골이 엉망이었다. 어제 결혼식을 치른 신부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모습이었다.
‘지금 내 몰골이 엉망진창인 내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요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불편하게 누워 있던 침대 한쪽 구석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깨끗했다. 밤새 누구도 드나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첫날부터 소박을 맞은 셈이 됐다.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길이 없었다. 결혼을 결심했을 때, 첫날밤이 어떨지 여러 번 고민하며 수많은 대책을 세워뒀지만, 예습한 사례 중에 이런 상황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 고민보다……. 꼬르륵.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배고파…….’
마차를 타고 먼 길을 달려와 결혼식을 치른 데다 덜덜 떨며 진까지 뺀 탓에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뱃가죽이 등에 붙은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가 고픈 것을 보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아냐, 우습긴 뭐가 우스워?’
배가 고프다는 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의미다. 어제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픽 쓰러져 버렸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고, 걱정하는 일은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부터 정신 차리고 잘하면 되잖아.’
수도를 떠나겠다고 결심한 것은 나. 그 방법으로 결혼을 선택한 것도 나. 숙부가 골라온 남편감을 받아들인 것도 나.
‘전부 내가 한 일이잖아. 언제까지 벌벌 떨고 있을래? 아직 세상 안 무너졌어, 나디아 바인.’
무시무시했던 알테어의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나는 씩씩하게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썼다. 벌벌 떨면서 죽어버릴 거였다면 그냥 수도에서 얌전히 결말을 기다렸을 거다.
‘하지만 안 그러기로 했으니까.’
나는 눈을 꼭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선 배를 든든하게 채우자. 그럼 뭐든 시작할 힘이 날 거야.’
마침 아침이 되었으니 곧 식사가 준비될 것이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인 후작가라면 벌써 시녀가 식사를 준비해 대령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집안마다 상황이 다른 법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시녀가 오지 않았다.
‘식사는 그렇다고 쳐.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주는 것도 안 한단 말이야?’
시녀들이 이렇게 마님을 무시하는 경우는 없었다. 어쩌면 알테어가 결혼식장에서 내게 목을 날려버리겠다고 경고했다는 소문이 퍼진 걸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말이 퍼지는 건 금방이었다. 주인이 환영하지 않는 아내를 사용인들이 제대로 된 안주인으로 대접할 리가 없다.
‘여기서도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건 똑같구나.’
바인 후작가에서도 나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정확히는 부모님이 마차 사고로 돌아가시고, 작위가 숙부에게 돌아간 뒤부터였다. 만약 내가 아들이었다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위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데릴사위를 들여 작위를 잇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고는 너무 갑작스러웠고, 나는 너무 어렸다. 수완 좋은 숙부는 어린 내가 부모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는 사이 당연한 듯 제가 작위를 차지하고 나를 골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부터 나는 후작가의 사랑받는 외동딸에서 밥이나 축내는 거머리 조카가 됐다. 나를 하늘처럼 떠받들던 집안의 사용인들도 금세 새로운 권력자에게 붙어 나를 무시했다.
‘숙부님은 바인 가문 딸들의 당연한 권리인 지참금도 내어주지 않으셨어.’
그나마 어머니께서 개인적으로 물려주신 신탁재산이 있어 그 돈을 지참금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소액이라 체면을 차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에일스포드 사용인들의 태도도 이해할 수 있었다. 결혼식에서부터 남편에게 외면당한 신부가 지참금도 조금 가져왔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예뻐할 구석이 없었다.
‘그래도 밥은 좀 주지…….’
치사하게 밥으로 사람을 차별하나. 죄수들에게도 밥은 주는 법인데.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창가로 다가섰다. 창문을 열어 밖을 보자 에일스포드 영지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와는 확연히 다른 시골이었다.
‘평화롭네.’
그런데 이 평화로운 영지의 주인이 미친 악역이라니. 다시금 떠오른 현실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시녀가 식사를 준비해 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문 열리는 소리가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시녀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사색이 되었다. 문 앞에 알테어가 서 있었다. 손에는 식사가 준비된 쟁반이 들려 있었다.
“어, 그, 어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등장에 나는 얼어서 바보 같이 버벅대며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알테어의 눈은 어제처럼 싸늘했다. 서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은 채 대치 아닌 대치가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역시나 알테어였다.
“……먹어.”
알테어가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내게 명령했다. 나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쟁반을 바라보았다.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수프와 조금 딱딱해 보이는 빵이 전부라 거창한 식사는 아니었으나 쫄쫄 굶은 탓에 절로 군침이 돌았다. 식욕과 두려움이 치열하게 싸운 끝에, 결국 본능이 이겼다. 나는 알테어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탁자로 다가가 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에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서 먹게?”
“어, 아뇨! 당연히 아니죠! 앉아서 먹어야죠, 네…….”
나는 알테어의 지적에 재빨리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먹어. 식기 전에.”
“네에…….”
나는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빵을 뜯어 먹었다.
‘오?’
딱딱하고 퍽퍽하게 생긴 것에 비해 맛이 괜찮았다. 덕분에 조심스럽던 손길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황급히 스푼을 들어 떠먹은 수프 역시 훌륭했다. 재료는 몇 가지 들어가지 않은 듯했지만 부드럽고 풍미가 있었다. 나는 빵을 커다랗게 찢어 수프에 푹 적시고 촉촉해진 빵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맛있어……!’
배가 고파서인지, 아니면 정말 이 요리들이 훌륭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맛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였다. 감격에 차서 다시 빵으로 손을 뻗는 순간, 머리 위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알테어가 팔짱을 끼고 눈을 부라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큭, 쿨럭!”
네가 감히 내가 준 음식을 남기나 감시하겠다는 듯한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내가 쿨럭대기 시작하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머, 먹어요……. 잘 먹고 있어요…….”
나는 재빨리 변명하며 빵을 뜯어 먹었다. 물론 속으로는 무서워서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체, 체할 것 같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국 같았던 식사가 순식간에 고문으로 변했다. 알테어는 내가 수프와 빵을 모두 먹어치울 때까지 기어이 자리를 지켰다. 불편한 심정으로 음식을 욱여넣은 탓에 속이 더부룩했다.
‘토할 것 같아.’
나는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슬쩍 알테어의 눈치를 살폈다. 음식을 전부 비웠는데도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무서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냥감을 노리는 매의 눈빛도 이보다 매섭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행여나 알테어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바들바들 떨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그만 좀 갔으면 좋겠는데.’
알테어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 저 무서운 눈빛을 보고 있다간 이 음식이 소화되기도 전에 피가 말라 죽을 것 같았다.
“저, 그,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나는 용기를 내어 알테어에게 질문했다.
“그게 아니라면 죄송한데, 계속 쳐다보고 계셔서…….”
내 질문에 알테어의 어깨가 움찔하더니 그의 뺨이 바르르 떨렸다. 확실했다. 이건 분명 분노의 떨림이었다. 나는 펄쩍 뛰며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질문을……!”
진심 어린 사죄에도 알테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어깨가 덜덜 떨렸다.
“……저녁은.”
한참 만에 알테어가 입을 열었다.
“먹으러 내려와.”
“네?”
“다들 힘을 합쳐서 널 위한 환영 만찬을 준비했다더군.”
환영 만찬? 준비해? 누가? 머릿속에 의문이 둥둥 떠다녔다.
“……난 확실히 전했다.”
멍하니 앉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테어가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쟁반을 들고 사라졌다. 문을 열고 나서는 알테어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어쨌든 그가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가, 갔다…….”
나는 그대로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바닥에 주저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알테어 에일스포드는 상당히 무서운 놈이지만, 무릎 꿇고 사죄하면 용서해주는 일말의 관대함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무릎을 덥석 꿇을 수 있는 값싼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쉽게 목이 잘리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매번 무릎을 꿇었다간 무릎이 남아나지 않겠어.’
나는 벌써 얼얼한 무릎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무릎 보호대라도 만들까?’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다시 문이 열렸다. 알테어가 돌아온 걸까? 나는 후다닥 무릎을 꿇어 다시 비굴한 자세를 갖추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황당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
“…….”
서로 기대하지 않은 모습을 마주한 탓에 짧은 침묵이 스쳐 갔다. 먼저 입을 연 쪽은 기별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였다.
“어…… 마님……? 왜 바닥에 그러고 계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