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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옷은 남편이 갈아입혀 주셔야죠. (5/170)

5화. 옷은 남편이 갈아입혀 주셔야죠.2021.06.20.

매서운 알테어의 눈빛에 접시를 모두 비우느라 과식한 탓에 속이 엉망이었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급하게 마신 술도 문제였다. 생각보다 독한 술에 얼근하게 취기가 올라와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16550918764936.png‘어쩌지…….’

취기가 돌기 시작하니 졸음이 밀려왔다. 누구 하나 말이라도 걸어주면 나을 텐데, 카인을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오는 기사가 몇 있긴 했지만, 어째서인지 금세 사색이 된 얼굴로 후다닥 내게서 멀어져 버렸다. 떠들썩한 와중에 홀로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16550918764936.png‘카인한테 정말 고맙네.’

그가 아니었다면 만찬 내내 한마디도 못 하고 자리만 지키다 돌아갔을 거다. 멍하니 빈 술잔을 만지고 있으니 점점 내 신세가 처량해지기 시작했다. 환영해주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 와서 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중이라니. 기사들은 서로 부어라 마셔라 신나게 술을 마시더니 다들 거나하게 취해 늘어져 있었다. 멀쩡한 사람은 알테어뿐인 것 같았다.

16550918764936.png‘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해. 나도 귀한 사람인데! 어? 한번 엎어봐?’

술에 취하니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생각보다 많이 취했는지 몸이 비틀거리는 것이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16550918764936.png‘그래. 난 술에 취했어. 그러니까 다 엎어버릴 수 있어! 이 더러운 세상!’

하지만 그 대단한 자신감은 나를 따라 일어선 알테어의 싸늘한 눈을 바라보자마자 거품처럼 맥없이 꺼졌다.

16550918764936.png‘술 취한 와중에도 무서운 분은 무서우시구나.’

나는 몸이 기억하는 생존본능에 수긍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옆으로 알테어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16550918764957.png“취한 것 같은데.”

16550918764936.png“아닙니다. 저는 멀쩡합니다. 모든 것이 좋습니다.”

16550918764957.png“……확실히 취했군.”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 팔을 붙잡았다. 몸이 휘청하며 그에게 기울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알테어가 흠칫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16550918764936.png“죄송합니다. 몸이 닿았습니다.”

16550918764957.png“왜 나만 보면 계속 죄송하다고 하지?”

16550918764936.png“죄송하다는 말만 해서 죄송합니다. 어휘를 늘려보겠습니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습니다.”

16550918764957.png“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16550918764936.png“그러니까 노력을…….”

더 길어지기 전에 알테어가 손을 들어 나의 말을 막더니, 나를 그대로 안아 올렸다. 몸이 붕 떠올라 나는 반사적으로 알테어의 목에 팔을 둘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눈을 깜빡이자 엄청나게 가까워진 알테어가 고개를 돌렸다. 옆으로 드러난 그의 귀가 빨갰다.

16550918764957.png“이것 봐. 퍼덕대지 않으니 훨씬 낫잖아.”

투덜거리는 알테어의 매서운 눈빛이 이상하게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놀라움에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16550918764936.png‘설마 이건…….’

술 때문인가!

16550918764936.png‘그래. 술 때문이겠지.’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미친 악역님이 고작 여자 하나 안았다고 부끄러워할 리가 없으니까.

16550918764936.png‘와. 이 술은 얼마나 독하길래 헛것을 보게 만들지.’

나는 굳게 다짐했다.

16550918764936.png‘역시 술이 문제야. 이놈의 술. 내가 다시 마시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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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나디아는 알테어의 품에서 금세 잠이 들었다. 그 모습에 알테어는 헛웃음을 흘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벌벌 떨면서 무릎을 꿇을 기세더니, 술에 취하니 품에 안겨 잘도 자는구나 싶었다. 아마 정신이 멀쩡했다면 질겁하며 제품에서 뛰어 내렸을 것이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도 이리저리 퍼덕대며 제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던가. 알테어는 복잡한 눈으로 가만히 나디아를 내려다보았다. 똑같은 나이인데 어떻게 이리 다를 수가 있을까. 하얀 피부에 작은 손. 피부는 곱고 분홍색의 머릿결은 부드럽다. 어디를 봐도 높으신 귀족 따님이었다. 그에 비해 알테어의 피부는 햇볕에 그을렸고, 커다란 손에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실상 귀족보단 용병에 가까운 몰골이 아닌가. 매일 밖으로 나가 검을 휘두르며 적을 상대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테어를 비롯한 에일스포드의 기사들은 거칠었다. 하나같이 속은 순박한 시골 청년들이었지만, 외모만은 위압감이 넘쳤다. 에일스포드에 종종 방문하는 용병들도 이들을 무서워할 정도였으니, 심약한 수도 출신의 아가씨가 겁을 먹는 건 당연했다.

16550918793752.png“영주님.”

가만히 나디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알테어 옆으로 파벨이 다가왔다. 그의 등에는 잔뜩 취한 안나가 업혀 있었다.

16550918793752.png“안나 상태가 이래서 마님 시중을 들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영주님께서 갈아입혀 주시죠.”

16550918764957.png“뭘?”

16550918793752.png“뭐긴요. 마님 옷이요.”

16550918764957.png“……뭐?”

16550918793752.png“예. 이 상태로 주무실 수는 없잖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아파서 쓰러지셨던 분인데. 갑갑해서 제대로 못 쉬실 겁니다.”

16550918764957.png“그러니까, 내가 하란 말인가?”

알테어가 고장 난 인형처럼 굳어서 입을 떡 벌렸다. 파벨은 그런 알테어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16550918793752.png“그럼 남편이 해야죠. 제가 합니까?”

파벨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자 굳어 있던 알테어가 반응했다.

16550918764957.png“네가 하긴 뭘 해?”

16550918793752.png“그러니까 영주님께서 하시라는 겁니다.”

16550918764957.png“…….”

16550918793752.png“마님께서 쓰러지시는 바람에 첫날밤을 아직 못 보내셨다지만, 계속 이렇게 내외하셔서야 언제 동침하고 후계자를 보시겠습니까?”

16550918764957.png“허. 날 보기만 하면 기겁을 하는데, 동침? 후계자를 봐? 다시 기절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16550918764957.png‘그런 주제에 눈을 똑바로 보면서 노력을 하겠다느니…….’

알테어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파벨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16550918793752.png“그러게 누가 결혼식 날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나랬나요? 크고 작은 충돌이 매번 일어나는 것에 익숙한 에일스포드 사람이라면 모를까, 마님께선 안전한 수도에서 자란 귀한 아가씨이신데 그런 몰골을 보면 놀라시죠.”

16550918764957.png“둘이 짰나? 블란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16550918793752.png“형제라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십니다.”

두 사람은 두 살 터울의 형제였다. 블란이 형, 파벨이 동생이었다.

16550918764957.png“생긴 것부터 말투까지 다른 게 없다. 골치 아픈 잔소리쟁이인 것도 똑같고. 그냥 안경 쓴 놈, 안 쓴 놈의 차이지.”

안경 쓴 놈은 파벨, 안 쓴 놈은 블란이다. 알테어는 습관처럼 혀를 차며 고개를 까딱였다.

16550918764957.png“아무튼, 그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나서야 제압 가능한 수준의 적이었다는 건 너도 알잖아.”

16550918793752.png“그거야 그렇지만……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나타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16550918764957.png“그랬으면 신부를 몇 시간은 더 세워둬야 했을걸.”

16550918793752.png“음. 그 무시무시한 몰골을 보이는 것보단 몇 시간을 더 세워두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파벨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하던 알테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생각해도 영 틀린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16550918764957.png“그 이야긴 됐다.”

대화가 불리하게 흘러가자 알테어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16550918764957.png“그때 살려둔 놈은 어떻게 됐지? 슬슬 입을 열 때가 됐을 텐데.”

16550918793752.png“블란 말로는 예상대로 ‘그쪽’의 소행인 것 같답니다. 마님을 노린 것도 확실하고요.”

16550918764957.png“역시 그런가.”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품에 안긴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기나 할까? 발하일은 야비한 놈이다. 앞으로도 비교적 쉬운 타깃인 나디아 쪽을 노릴 거다.

16550918764957.png‘내 얼굴만 봐도 덜덜 떠는 심약한 아가씨이니 그 사실을 알게 되면…….’

16550918793752.png“아무튼 저는 이 녀석을 해결하겠습니다. 영주님께선 마님을 잘 봐주십시오.”

알테어의 생각이 깊어지기도 전에 파벨이 제 등에 업힌 안나를 힐끗대며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를 떠났다. 제자리에 홀로 남은 알테어가 다시 나디아를 내려다보자마자, 그녀가 따뜻한 품속으로 파고들며 더욱 바짝 붙어왔다.

16550918764957.png‘윽.’

움찔하며 몸을 슬쩍 뒤로 빼는 알테어의 귀가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새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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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나는 지독한 속 쓰림과 함께 눈을 떴다. 술에 취해 전부 엎어버리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후의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16550918764936.png‘으…….’

괴로움에 머리를 부여잡고 주위를 둘러보자 고작 이틀 만에 익숙해진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16550918764936.png‘어떻게 돌아왔지?’

나는 불안함에 열심히 눈을 굴리다 금세 답을 찾아냈다.

16550918764936.png‘소름 끼치는 내 귀소 본능. 여전하구나.’

원래의 나는 술에 취하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집으로 찾아가는 버릇이 있었다. 벗어뒀던 외투도 꼼꼼하게 입고, 가방까지 잘 챙겨서 간다며 친구들이 신기해했다. 지금이야 겉가죽이 완전히 다르지만, 속에 든 영혼은 여전히 똑같으니 술버릇이 함께 따라온 듯했다.

16550918764936.png‘그런데 끈은 왜 풀려 있지.’

이상하게 옷이 헐렁해서 손을 뒤로 뻗으니 상체를 조이는 끈이 어설프게 풀려 있었다. 풀기를 시도하다 중간에 포기한 듯한 모양새였다.

16550918764936.png‘혼자서 벗어보려다가 실패했나?’

아무래도 뒤쪽의 끈은 혼자 풀긴 어려우니 말이다. 나는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속이 울렁거려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싶었다.

16550918764936.png‘주전자……. 물…….’

나는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탁자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 주전자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문이 열리고 나보다 훨씬 더 좀비 같은 몰골의 안나가 주전자를 든 채 안으로 들어섰다.

16550918912939.png“마니이임……. 일어나 계셨군요……. 목이 마르실 것 같아서 물을 가져왔어요…….”

역시 조금 어설플 뿐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퀭한 몰골을 하고서도 일을 하겠다고 날 찾아온 게 고맙기도 했다. 다른 하녀들에게 제 일을 미룰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16550918764936.png“몸이 안 좋으면 다른 사람을 보내지 그랬어.”

16550918912939.png“다른 사람이요?”

내 말에 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918912939.png“다른 사람이라면, 파벨이요? 마님의 시중을 파벨한테 맡기는 건 이상한 것 같아요.”

16550918764936.png“파벨이라면 집사를 말하는 거지? 왜 갑자기 집사 이름이 나와?”

16550918912939.png“다른 사람이라고 하셔서요. 아! 아니면 주방장 브렛 아저씨를 말씀하신 거였나요? 음, 하지만 브렛 아저씨께 맡기는 건 더 이상한 걸요.”

무슨 문제 때문인지 안나와의 대화가 계속 겉돌고 있었다.

16550918764936.png“내 말은, 다른 하녀에게 맡겨도 된다는 이야기였어.”

16550918912939.png“네? 여기에 하녀는 저 하나뿐인데요?”

16550918764936.png“뭐?”

16550918912939.png“파벨은 집사, 브렛 아저씨는 주방장, 저는 하녀. 성에서 일하는 사람은 이렇게 셋이에요.”

16550918764936.png“뭐어?”

이 큰 성에서 일하는 사람이 고작 셋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잡역 하녀와 집사, 요리사는 최소한의 인원이었다. 격식을 갖춘 성이라면 여기에 시종, 풋맨, 정원사, 마부, 가정부, 시녀 등 다양한 위치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부렸다. 여태까지 에일스포드에는 안주인이 없었으니 가정부나 시녀가 없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주인 알테어가 있지 않은가. 그의 시중을 들 시종은 필수였다.

16550918764936.png“시종이 없는 집은 처음 봐. 영주님 시중은 누가 들지?”

내 질문에 안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16550918912939.png“워낙 그런 걸 귀찮아하는 분이셔서요. 대부분 혼자 해결하시고, 필요한 경우 파벨이 돕지요.”

16550918764936.png“그럼 손님을 맞이할 때는? 풋맨이 없으면 누가 해?”

16550918912939.png“사실 이런 시골에 손님이 찾아올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혹 그럴 일이 있다면 그것 역시 파벨이 해요.”

16550918764936.png“그리고 집사로서 장부 관리 같은 살림도 맡아서 했겠구나. 안주인이 없었으니까.”

16550918912939.png“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남성 하인이 맡는 업무는 전부 파벨이 해왔던 모양이다.

16550918764936.png‘그렇다면 여성 하인이 할 일은 전부 안나가 해결했겠지.’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알 것 같았다.

16550918764936.png‘왜 이렇게 기형적인 형태가 된 거지?’

홀로 고민하다 보니 오싹한 답이 떠올랐다.

16550918764936.png‘정말이지…… 영주님은…….’

상상 이상의 거지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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