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당연한 밤2021.06.27.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러 온 안나는 물에 푹 젖은 채 알테어의 외투를 걸치고 있는 나를 보고 금방이라도 기절할 기세로 펄쩍 뛰었다. 수건을 준비해놓지 않은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안나가 황급히 준비해 온 수건으로 몸을 닦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상황을 물을 여유도 생겼다.
“안나. 동부에서는 부부가 침실을 같이 쓰니?”
“그럼요. 부부라면 당연히 한 방을 쓰지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안나의 모습에 맥이 빠졌다.
“그렇구나. 전혀 몰랐어.”
“수도에서는 다른가요?”
“완전히 달라. 부부가 침실을 함께 쓴다니…… 생각도 못 했어. 게다가 이틀 동안 영주님께서 여기 안 오셨으니까, 난 완전히 나 혼자 쓰는 방인 줄 알았는걸.”
“첫날에는 마님께서 아파서 쓰러지셨고, 어젠 술에 많이 취하셨으니 편하게 쉬라고 그러셨을 거예요. 아마 오늘부터는 여기서 주무실걸요?”
“오, 오, 오늘부터?”
당장 오늘부터 알테어와 한 침대에서 눈을 붙여야 한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난 잠버릇이 험한데…….’
거슬린다고 또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넌 바닥에서 자!’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방에 소파가 있다는 거다. 침대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차가운 돌바닥에서 잠을 자진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리 큰 소파는 아니지만 내 몸 하나 정도는 대충 구겨 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소파가 이상한가요?”
진지하게 소파의 크기를 가늠해보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서 눈을 뗐다.
“참. 집사에게 말은 전했어?”
“네. 곧 찾아뵙겠대요. 그런데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요.”
“무슨 말?”
“아직 다섯 시간이 남았대요.”
“다섯 시간……?”
내가 모르는 의미라도 숨어 있나 싶어 안나를 바라보며 눈을 껌뻑이자 그녀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마 헛소리겠지요. 신경 쓰지 마시고 식사부터 하셔요, 마님!”
* * * 에일스포드 성의 집사 파벨은 그가 예고한 대로 정확히 다섯 시간 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마님. 파벨입니다.”
파벨은 금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턱 밑까지 높게 쌓인 책 더미를 안고 안경을 쓴 모습이 제법 깐깐하게 느껴졌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라고나 할까? 퉁명스러운 표정까지 더해지니 쉽게 가까워지긴 힘든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얼굴이 눈에 익어.’
묘한 기시감에 파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탁자 위에 책 더미를 내려놓았다.
“동생입니다.”
“네?”
“블란과 닮아서 계속 쳐다보신 게 아닌가요?”
“아! 신랑 대리인을 해주셨던 그 기사님이요?”
“예. 제가 그 녀석의 동생입니다. 편하게 파벨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영주님께서도 그렇게 하시니까요.”
곤란한 상황에서 도와줬던 친절한 사람의 동생이라니. 깐깐한 인상에 살짝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우선 오늘은 성의 상황을 알고 싶으실 것 같아서 최근 3년 치 장부를 가져왔습니다. 창고 열쇠는 제가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사실 쌓아둔 게 없어서…….”
파벨이 썩 민망하다는 듯 가볍게 제 머리를 털어냈다.
“역시 사정이 많이 안 좋은 거군요?”
“한 번 둘러보면 금세 알게 되실 테지만, 에일스포드는 척박한 땅입니다. 농사를 짓기 힘들어 부수적인 수입원에 매달리는 상황이지요.”
“부수적인 수입원이라면……?”
“마수 사냥입니다. 제국 동부를 가로막고 있는 드래곤 산맥에서 고블린이나 그리핀이 자주 내려오거든요. 인근 영지에 마수가 나타나면 저희 기사단이 처리해주고 사례를 받습니다. 일종의 용병이라고 할까요.”
기사단으로 돈벌이를 하다니. 수도의 고고한 기사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기사가 아니라 그들의 긍지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다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그건 정기적인 수입원이라고 할 수는 없겠네요. 필요할 때마다 마수가 나타나 주는 건 아닐 테니까요.”
“예. 맞습니다. 그게 바로 영지 사정이 좋지 않은 이유지요. 먼저 성을 둘러보시겠습니까?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고들 하니까요.”
“음…… 우선은 장부를 살펴보고 싶어요. 성을 둘러보는 건 그 다음에요.”
“그런가요. 안내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저를 찾아주십시오. 다른 궁금한 점은 없으십니까?”
“지금은 딱히 없어요. 다만…….”
나는 탁자에 쌓여 있는 장부 한 권을 품에 꼭 껴안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에일스포드가 어떤 곳인지, 또 영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시집왔지만, 난 잘 해내고 싶어요. 정말로 열심히 할 테니까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용기 내어 꺼낸 말이었지만 돌아온 건 침묵이었다. 슬그머니 파벨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괜한 말을 한 걸까?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지려는 찰나.
“정말이지…… 제가 드려야 할 말을 선수 치셨군요, 마님.”
어느새 파벨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우고 뚱한 얼굴로 돌아온 파벨이 깍듯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저희 에일스포드와 영주님, 모두 잘 부탁드립니다.”
* * *
‘몇 시지?’
나는 장부를 읽느라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벨에게 장부를 건네받았을 때는 환한 낮이었는데, 어느새 세상은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최대한 빨리 장부를 파악하고 싶어 욕심을 부렸더니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으으……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아…….’
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책을 읽는 건 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역시 일하는 것과 독서는 천지 차이였다. 나는 삐걱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외투를 발견했다.
‘헉! 저건……!’
알테어가 내게 덮어주고 갔던 문제의 외투였다. 그걸 본 순간 안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마 오늘부터는 여기서 주무실걸요?’
주어는 당연히 알테어였다. 장부에 정신이 팔려 그 중요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벌써 해가 떨어졌으니 언제 알테어가 들이닥칠지 모른다. 나는 불안한 심정으로 문을 힐끗대며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다. 이곳은 동부이니 동부의 문화를 따르는 게 맞다. 분명 그렇게 마음을 먹었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성인이고, 한 사람의 아내다. 남편과 밤을 보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수도를 떠나기 위한 방법으로 결혼을 선택했을 때 그것마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 남편이 그토록 멀어지고 싶었던 무서운 악역이라는 건 계획 밖의 일이었지만…….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알테어의 외투를 바라보았다. 내 몸을 빈틈없이 감쌌던 외투의 크기만으로도 알테어의 체격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알테어는 위압적인 남자였다. 체격만 큰 게 아니라 온몸이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런 사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건 도대체 어떤 일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두려워졌다. 나는 두려움에 지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의지를 불태우며 침대에 누웠다.
‘오, 올 테면 오라지! 그게 뭐 별거라고!’
“에취!”
괜한 허세를 부린 탓인지 금세 재채기가 터져 나왔지만 말이다. * * *
‘그래. 그렇게 의지를 불태웠는데…….’
그날 밤에는 놀랍도록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일이 벌어지기는커녕, 알테어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지만 ‘나보고 아내와 내외하라는 거냐!’고 빈정거렸던 알테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덤벼라!’는 심정으로 잔뜩 벼르고 있던 내 긴장감도 날이 갈수록 몸집이 줄어들었다.
‘어쩌면 그 말이 진짜인지도 몰라.’
멜리사는 에일스포드 남작과 결혼한다는 내게 몇 가지 소문을 알려줬었다. 그중에 에일스포드 남작이 고자라는 소문도 있었다. 비록 멜리사의 말 대부분이 거짓이었지만, 거지 남작이라는 이야기와 남성의 문제는 진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쪽이 기사들의 숙소입니다.”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을 떨쳐냈다. 사흘의 장부 검토를 마치고, 오늘부터는 직접 성을 둘러보기로 했다. 안내자는 파벨이었다. 파벨은 특유의 뚱한 표정을 하면서도 꼼꼼하게 에일스포드 성을 안내해주었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필요한 정보는 꼭 말해주는 좋은 안내자였다. 효율적인 안내 덕분에 나는 빠른 시간 안에 에일스포드 성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눈으로 본 성의 모습과 장부에서 얻은 정보를 조합하니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도 정할 수 있었다.
‘우선 돈을 버는 게 먼저야.’
보수할 곳은 산더미인데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마수를 잡아 받는 보수는 그리 크지 않은 데다 정기적인 수입도 아니라 그것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지는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할 일이 정해졌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뿌연 유리 사이로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알테어도 있었다. 그는 기사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자세를 지적하고 직접 시범을 보이기도 하며 훈련을 주도하고 있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절도가 넘쳐 문외한인 나도 그가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저…… 파벨.”
나는 잠시 고민하다 파벨에게 물었다.
“그…… 영주님께서 요즘 어디에서 주무시는지 아세요?”
“영주님이요? 방에서 주무시겠죠?”
“며칠째 방에 안 오셨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요.”
“예?”
파벨이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턱을 매만지던 그가 척척 걸음을 옮겨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더니, 대뜸 고개를 밖으로 빼 큰 목소리로 알테어를 불렀다.
“영주님!”
훈련하는 기사들 모두의 시선을 끌 정도로 목청이 아주 좋았다.
“며칠 전에 저한테 대충 잠만 잘 수 있게 방 하나 치워 놓으라고 하셨죠? 혹시 요즘 거기서 주무십니까?”
“파벨. 지금 훈련 중인 거 안 보여?”
파벨의 질문에 알테어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무서워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지만, 파벨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진짜 거기서 주무시는 거 아니죠? 정말 잠만 잘 수 있게 자리만 깔아놨단 말입니다!”
“잔소리하지 마! 내가 어디서 자든 무슨 상관이야!”
“허. 진짜 거기서 주무시나 보네. 자기 방 놔두고 왜 거기 가서 주무시는데요? 네?”
“그러니까 네가 그딴 게 왜 궁금하냐고!”
“저야 안 궁금하죠. 마님이 궁금해하셔서 대신 여쭌 건데요!”
“뭐……?”
파벨을 바라보고 있던 알테어의 시선이 옆으로 빗겨나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나를 향했다. 붉은색 눈동자가 내 얼굴에 박히는 순간. 알테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