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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입이나 맞추면 다행이지. (8/170)

8화. 입이나 맞추면 다행이지.202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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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서운 알테어의 눈빛에 몸이 굳어버린 것과 달리 머리는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알테어와 파벨의 대화를 되새겨보면, 아무래도 그는 요즘 다른 곳에서 잠을 자는 듯했다. 단순히 바빠서 그런 게 아니라 아예 방을 따로 마련해두고 자리를 피한 거다. 며칠 동안 알테어가 나타나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지만 그가 일부러 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기분이 묘해졌다.

16550919577629.png‘혹시 그날 내가 당황하는 걸 보고……?’

기대치 않았던 배려를 받은 건가 싶어 얼떨떨한 심정으로 창문 가까이 다가가자, 알테어가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었는지 그의 목이 벌겠다.

16550919577629.png‘그럼 그렇지.’

날 배려한 게 아니라, 그날 멍청하게 허둥댔던 내 모습에 질려서 얼굴도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편안한 잠자리를 포기할 정도라면 얼마나 화가 난 걸까. 알테어가 대놓고 나를 외면하자 기사들이 삐걱대며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파벨 역시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창문을 닫았다.

16550919577637.png“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괜히 투덜거리시는 겁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파벨을 향해 웃어보였지만, 그가 곤란한 표정을 지은 걸 보면 그리 훌륭한 미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16550919577629.png“내가 실수해서 그러시는 거예요. 같이 쓰는 방인 줄 모르고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바람에…….”

16550919577637.png“아닙니다. 영주님께서 고작 그런 걸로 그러실…… 예?”

시무룩해져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을 고백하자 반사적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파벨이 뒤늦게 내 말의 의미를 알아챈 건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던 그가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16550919577637.png“그러니까, 알몸이셨다고요? 영주님께서 그걸 보셨고요?”

무슨 일이 생겨도 늘 뚱한 얼굴이던 사람이 드물게 놀란 모습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으니 사태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귀족 남자들은 정숙한 아내를 원했다. 품위 없이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채 함께 쓰는 방을 돌아다니다니. 그런 걸 좋아할 남편이 어디 있을까. 나는 파벨마저 나를 품위 없는 마님으로 볼까 봐 걱정스러워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16550919577629.png“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난 안나가 들어온 줄 알고…… 역시 영주님께선 조심성 없는 아내의 모습에 화가 나신 거겠죠?”

알테어 앞에서 아내의 역할을 잘 해내겠다고 장담했었는데. 알테어도 그런 내게 기회를 주려는 것 같았는데. 바보 같은 실수로 시작부터 크게 감점을 당했다.

16550919577637.png“그런…….”

파벨은 뭐라 대꾸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기운이 빠져 계속 바닥으로 향하려는 고개를 단단히 세우고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하게 될 때가 있다. 실수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실수를 수습하지 않고 도망친다면 그때부터는 정말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16550919577629.png‘그러니까 도망치지 말고 수습해야 해, 나디아!’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창밖으로 보였던 연무장으로 가서 알테어를 만나야 했다.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자마자 연무장을 떠나려는 알테어의 모습이 보였다. 입고 있던 셔츠에 대충 땀을 닦아내며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상당히 빨랐다. 나는 혹시라도 그를 놓칠까 봐 더욱 분주하게 발을 놀렸다. 하지만 생각처럼 속도는 나지 않고, 대신 발이 꼬여 그만 치맛자락을 밟고 말았다.

16550919577629.png“앗!”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짧은 비명을 들은 건지 알테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끼는 순간, 어떻게 대처할 새도 없이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재빨리 앞으로 손을 뻗었다. 손목을 다칠 수도 있었지만, 그대로 머리를 박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뒤이어 찾아온 건 예상했던 고통이 아니었다. 대신 묘하게 익숙한 감각이 손끝에 닿았다. 놀라서 눈을 번쩍 뜨니 어째서인지 알테어가 내 밑에 깔려 있었다. 분명 저 멀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어리둥절해서 눈을 껌뻑이자 아래에 깔린 알테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16550919609909.png“계속 이렇게 내 위에 있으려고?”

16550919577629.png“아! 죄송해요!”

황급히 일어나려고 해봤지만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제대로 서기가 힘들었다. 몇 번이나 일어서는 데 실패하는 날 더 참아주기가 힘들었는지 알테어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와 함께 알테어의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냉혈하게만 보였던 알테어의 체온은 의외로 따뜻했다. 조금 전까지 훈련을 한 탓에 뜨끈하게 열이 오른 것 같았다.

16550919577629.png‘그리고 체향도 생각보다…….’

건강한 땀 냄새와 함께 시원하고 묵직한 남자 특유의 체향이 느껴지자 어쩐지 알테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이자마자 머리 위에서 알테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919609909.png“말해.”

16550919577629.png“네?”

고개를 번쩍 들자 알테어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는 가까운 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슬쩍 고개를 뒤로 뺐다.

16550919609909.png“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급하게 내려온 거 아닌가? 하려던 말, 지금 하라고.”

할 말이 있어서 내려온 건 맞지만, 강렬한 붉은색 눈동자가 매섭게 나를 바라보고 있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나쁜 사람이 되면 안 돼!’라는 다짐을 몇 번이나 되새기며 겨우 입을 열었다.

16550919577629.png“제가 나갈게요.”

16550919609909.png“그게 무슨 소리야?”

16550919577629.png“실수한 건 저니까, 제가 나가는 게 맞아요. 원래 그 방의 주인도 영주님이시잖아요. 저 때문에 불편한 곳에서 주무실 필요 없어요.”

16550919609909.png“실수라니? 무슨 실수?”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무서운 얼굴이 2배는 더 매섭게 느껴져서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16550919577629.png“그날 제가…… 정숙하지 못하게 옷을 벗고 돌아다녀서…….”

16550919609909.png“뭐? 그게 왜 네 실수야!”

알테어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16550919609909.png“실수라면 시중을 제대로 못 든 안나가 했겠지. 더 깊이 파고들면 여태까지 그 녀석이 덤벙대는 걸 참아 준 내 탓이고. 도대체 그게 왜 네 실수라고 생각한 거야?”

16550919577629.png“그날 그렇게 나가신 뒤로 안 오셨고…… 조금 전에도 절 보기 싫으셔서 고개를…….”

16550919609909.png“그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을 끊었던 알테어가 움찔하는 나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16550919609909.png“……타인의 태도를 기준으로 실수 여부를 판단하지 마. 그날 넌 실수한 거 없어.”

한숨과 함께 이어진 알테어의 목소리는 아주 단호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이상한 기분에 눈을 껌뻑이며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가 찡그린 얼굴로 가볍게 나를 안아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에 덜렁 들리는 게 벌써 두 번째였다. 마치 지푸라기 인형이 된 것 같았다.

16550919609909.png“다른 곳에서 자는 이유는 내가 못 참고 사고를 칠 것 같아서야. 뭐, 이것도 따지고 보면 네 탓이기는 한가. 아무튼 네 실수 때문은 아니라는 거다. 알겠어?”

16550919577629.png“네.”

16550919609909.png“확실히 알아들은 거 맞아?”

16550919577629.png“네. 확실히 알아들었…… 에취!”

대답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재채기가 터져 나오자 알테어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16550919609909.png“왜 재채기를 하지? 감기에 걸렸나?”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알테어의 손이 이마를 짚었다. 구겨진 얼굴로 한참이나 진지하게 체온을 가늠해보던 그가 결국 침음을 흘리며 손을 거뒀다.

16550919609909.png“지금 내가 열이 오른 상태라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데. 의사를 보낼 테니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16550919577629.png“아니에요! 재채기는 그냥 긴장해서…… 감기 기운은 전혀 없어요.”

16550919609909.png“긴장하면 재채기를 하나?”

16550919577629.png“저는 그러기도 해요.”

16550919609909.png“정말로 알 수 없는 것투성이군.”

알테어가 신기한 동물 보듯 나를 관찰하는 사이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나를 따라 황급히 달려온 듯 파벨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16550919609909.png“파벨과 성을 둘러보는 중이었나?”

알테어가 파벨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16550919577629.png“네. 아직 내부만 파악했을 뿐이지만요.”

16550919609909.png“그럼 성 밖을 둘러볼 때는 내게 말해.”

16550919577629.png“네. 허락받고 둘러볼 테니 걱정 마세요!”

16550919609909.png“아니, 허락을 받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게 아니면 무슨 뜻이지? 의도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알테어가 됐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손을 저었다. 그냥 가 보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의 손짓을 알아본 파벨이 얼른 내 옆으로 다가왔다.

16550919577637.png“마님. 아직 못 보신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16550919577629.png“응. 고마워요.”

파벨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며 알테어를 슬쩍 돌아보니 그는 어느새 나타난 블란과 속닥대며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16550919577629.png‘방해하지 말아야지.’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16550919692676.png“영주님…….”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멀어지는 나디아를 바라보던 블란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19692676.png“못 참고 사고를 칠 것 같아서 각방을 쓰신다니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발 사고 좀 치세요! 그러라고 결혼한 거 아닙니까!”

블란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알테어를 타박했다. 알테어는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그의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차며 나디아의 뒷모습을 힐끗댔다.

16550919609909.png“결혼했다고 강제로 하라는 법은 없어. 아무리 내 사정이 급해도 억지로 요구하고 싶지는 않다.”

16550919692676.png“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런 생각이시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노력하셔야죠. 꼬리를 활짝 펴고 구애의 춤을 추는 공작새처럼요.”

블란이 앞에서 춤추는 시늉을 하자 알테어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16550919609909.png“못 봤어? 내가 입만 열어도 겁먹어서 잔뜩 움츠러드는 거?”

16550919692676.png“그러니까 말투도 좀 사근사근하게 하시고, 표정도 좀 더 부드럽게 해보십시오. 활짝 웃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도 않잖아요?”

16550919609909.png“활짝…… 웃으라고……?”

16550919692676.png“예. 이렇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블란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화사한 금발의 기사가 산뜻하게 미소를 지으니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알테어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말이다.

16550919609909.png“……토할 것 같군.”

16550919692676.png“아니, 뭐, 저라고 시커먼 남자를 향해 이런 산뜻한 미소를 짓고 싶은 줄 아십니까? 그냥 시범을 보인 거잖습니까.”

블란이 억울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투덜댔다.

16550919692676.png“그래도 여자들은 이런 미소를 좋아한다고요.”

확실히 블란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준수하게 생긴 기사가 사근사근하게 굴며 다가오면 누구나 껌뻑 넘어가게 될 터였다.

16550919692676.png“자! 확실히 보셨으니 영주님도 해보십시오!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활짝! 웃어보세요!”

알테어는 내키지 않아 머뭇거리면서도 블란이 시키는 대로 굳어 있는 입꼬리를 움직여 보았다. 그런데 알테어가 활짝 웃으려고 하면 할수록 블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16550919609909.png“역시 너도 토할 것 같은가?”

16550919692676.png“아뇨…… 그런 느낌이 아니라…… 엄청 무섭네요. 왜 웃는데 더 무서워지죠?”

16550919609909.png“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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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적인 평가에 알테어가 억지로 끌어 올렸던 입꼬리에 힘을 풀고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돌아와 블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16550919692676.png“악! 제 코를 박살 내신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다리까지 부러뜨리시려고요?”

16550919609909.png“흥. 고작 이 정도로 부러질 다리면 그래야지. 기사의 자격이 없다.”

16550919692676.png“아니, 발길질로 바위도 부수시면서, 이게 어떻게 고작입니까.”

블란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알테어는 코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16550919609909.png‘아무튼 도움이 안 돼.’

  * * * 그날 밤. 에일스포드의 기사들은 블란을 중심으로 은밀히 한자리에 모였다.

16550919692676.png“다들 봤겠지만, 이대로는 에일스포드의 미래가 위험하다. 우리가 나서야 해.”

블란의 말에 기사들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1974905.jpg“하는 걸 봐라. 영주님에겐 미래가 없어.”

1655091974905.jpg“애를 가지긴커녕 입도 못 맞출 거다.”

1655091974905.jpg“입이나 맞추면 다행이지. 손이나 잡을까 싶은데.”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이야기는 점점 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16550919692676.png“자자, 다들 조용히!”

그 소란의 중심에 선 블란이 웅성거리는 기사들을 진정시키며 진지한 얼굴로 엄숙하게 선언했다.

16550919692676.png“지금부터 제1회 대책 회의를 시작한다!”

16550919780395.jpg“오오오!”

환호하며 박수를 쏟아내는 기사들 구석에서 눈에 띄지 않게 자리한 파벨이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19577637.png“하아. 내가 왜 이 바보 같은 자리에 껴 있는 거지…….”

이 바보 같은 자리 중에서도 제 형이 가장 바보라는 점이 아주 절망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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