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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금수저보다 더 좋은 수저는? (9/170)

9화. 금수저보다 더 좋은 수저는?2021.07.04.

16550919849474.jpg“자, 그럼 좋은 의견 있는 사람?”

기사 하나가 손을 번쩍 들어 블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발언을 허락했다.

16550919849479.jpg“마님께 영주님의 칭찬을 하는 건 어때? 주위에서 좋은 이야기가 많이 들리면 마님도 영주님을 다시 보게 될걸? 세 사람이면 없던 고블린도 만든다고 하잖아.”

그의 발언이 끝나기 무섭게 겨우 가라앉았던 장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16550919849479.jpg“세 사람이면 없던 고블린도 만든다는 말은, 없는 사실을 진짜로 믿게 한다는 뜻인데. 그럼 영주님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냐? 이걸 영주님께 말씀드리면 넌 끝이다, 끝!”

16550919849479.jpg“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자식아! 치사하게 일러바치려고!”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뒤로 다른 이들도 소란스러움에 가세했다.

16550919849479.jpg“영주님이 보낸 것처럼 마님께 선물을 보내는 건 어때?”

16550919849479.jpg“온갖 좋은 게 다 모인다는 수도에서 오셨는데 우리 안목으로 준비한 선물이 마님의 눈에 찰까? 오히려 놀린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16550919849479.jpg“아니면 두 분께 술을 잔뜩 먹여서 한 방에 넣어 두자. 그럼 무슨 일이든 생기겠지!”

16550919849479.jpg“마님은 몰라도 영주님께선 절대 안 취하실걸.”

16550919849479.jpg“맞아. 여태까지 영주님이 취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대책 회의랍시고 한자리에 모였지만 기사들도 남녀의 연애 사정에 까막눈이긴 마찬가지였다. 알테어의 행동이 답답하다는 건 알았지만, 어떡해야 이 사태를 풀어나갈 수 있을지 해결책을 찾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럴 내공이 있었다면 다들 미혼으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16550919849566.jpg“쯧쯧쯧.”

답이 없는 소란 속에서 누군가 혀를 찼다. 그 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한 기사들은 한 줄기 광명이라도 찾은 듯 반색하며 그의 곁으로 몰려갔다.

16550919849479.jpg“그래, 카인! 네가 있었지!”

16550919849479.jpg“맞아. 우리 중에서는 네가 이런 걸 제일 잘 알지!”

뻣뻣한 다른 기사들과 달리 카인은 특유의 넉살 좋은 성격 덕분에 영지 내의 아가씨들과 가깝게 지내는 편이었다.

16550919849566.jpg“잘 들어 봐.”

카인은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즐기며 씩 웃었다.

16550919849566.jpg“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 줄 알아?”

16550919849479.jpg“모르지. 그걸 알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겠냐?”

16550919849479.jpg“잘난 척하지 말고 빨리 본론이나 이야기해!”

열화와 같은 비난에 카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16550919849566.jpg“상대가 어려움에 처해 고립되어 있을 때 도와주는 거야. 내가 유일한 구원이 되면 순식간에 마음을 얻을 수 있지.”

16550919862902.jpg“오오……!”

16550919849566.jpg“상대가 처한 어려움의 크기는, 상대가 내게 갖게 될 호감의 크기와 비례할 테고.”

16550919862902.jpg“오오오……!”

16550919849566.jpg“이제 알겠어? 마님이 영주님께 호감을 느끼게 하려면 우리가 어떡해야 할지.”

카인이 자신을 둘러싼 기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무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파벨의 입에서 나왔다.

16550919876874.jpg“영주님께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마님을 돕게 한다는 거로군요.”

16550919849566.jpg“정답!”

유쾌한 외침에 파벨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16550919876874.jpg“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하지만, 일부러 마님을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 건 영주님께서 동의하실 것 같지 않군요. 마님을 위해 편안한 침실까지 포기하신 분 아닙니까.”

얕은수라면 질색하는 알테어가 이런 계획에 동참할 리 없었다. 물론 계획을 주장한 카인 역시 알테어의 성향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16550919849566.jpg“그러니 영주님도 모르게 해야죠. 어차피 연기에는 소질도 없으시고.”

16550919876874.jpg“흠?”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니 벌써 마음에 둔 계획이 있는 듯했다. 파벨이 의문을 담아 카인을 바라보자 그가 씩 웃으며 모두를 향해 손짓했다.

16550919849566.jpg“자! 다들 이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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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919876908.jpg“에취!”

어디에선가 내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상하게 코끝이 간지러웠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탁자 가득 쌓여 있는 장부를 정리했다.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사실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이 가득했다.

16550919876908.jpg‘이번에는 확실히 날 도와준 거지……?’

내가 떠올리고 있는 건 조금 전 일어났던 작은 사고였다. 알테어는 덤벙대며 바닥에 넘어지는 나를 보호해줬다. 문제의 날에 있었던 일이 내 실수가 아니라고도 말해줬다. 말투는 그다지 상냥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의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있는 ‘악역 새싹’ 알테어라면 내가 돌바닥을, 아니, 불구덩이를 굴러다녀도 못 본 척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알테어는 그러지 않았다. 무자비했던 소설 속 캐릭터와 현실의 알테어의 간극을 발견했다는 건 나의 생존에 아주 긍정적인 신호였다.

16550919876908.jpg‘알테어는 정말로 에일스포드를 좋아하나 봐.’

함께 있으면 사고를 칠 것 같은 나마저도 에일스포드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감싸줄 정도니까, 이 영지를 아주 소중히 여기는 게 확실했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내 성에서 누가 다치는 꼴은 못 본다’라며 어둠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도와줬었지.

16550919876908.jpg‘그렇다는 말은…….’

내가 이 에일스포드에 속해 있는 동안에는 안전할 수 있다는 뜻인가?

16550919876908.jpg‘그래! 그런 뜻이야!’

벼락같이 찾아온 깨달음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면 나는 절대로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라는 자리를 버릴 수 없었다. 알테어에게 장담했던 대로 부인의 역할을 잘 해내서, 언제까지고 이 안전한 울타리 안에 있고 싶었다.

16550919876908.jpg‘어…… 그런데……’

반대로 내가 부인 역할을 제대로 못 해서 에일스포드의 이름을 더럽힌다면 어떻게 되지? 까맣게 물든 머릿속에서 상상 극장이 시작되었다. 상상 속의 알테어가 ‘네가 감히 에일스포드를 우습게 만들어?’라고 음산하게 말하며 검을 휘두르자, 상상 속의 내 머리가 뎅겅 잘려서 바닥을 뒹굴었다.

16550919876908.jpg‘히익!’

상상 속에서 피를 떠올린 것만으로 피 공포증이 도질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16550919876908.jpg‘아, 아냐! 열심히 잘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열심히 부인 역할을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을 뿐이다.

16550919876908.jpg‘지금 영지에 가장 필요한 건…… 누가 봐도 자금이지.’

그 문제를 해결해서 유능한 남작 부인이라는 걸 보여주면 알테어도 내가 쓸모있는 녀석이라는 걸 인정할 테다.

16550919876908.jpg‘음. 동부에 돈을 벌 만한 일이 있었던가?’

나는 눈을 감고 책의 내용을 되새겨 보았다. 사실 소설의 배경은 사교계의 중심인 수도였기 때문에 동부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 않았다. 무서운 악역 공작의 출신지로만 몇 번 등장했었는데…….

16550919876908.jpg‘아!’

갑자기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16550919876908.jpg‘광산!’

소설 속의 악역 공작 알테어는 지금의 가난한 영지 사정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했다. 영지 내에 마석 광산이 있어서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마석은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마도구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원이다. 현대의 물건과 비교하면 건전지와 같은 역할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건전지는 흔하고 저렴해서 누구든 사용할 수 있지만, 마석은 아주 희소하고 비싸다는 것 정도다. 부유한 귀족들도 마음껏 사용하기 힘들어 꼭 필요한 곳에만 마석을 썼다. 그런데 그 비싼 마석 광산이 악역 공작의 소유였다.

16550919876908.jpg‘영지가 이렇게 가난한 걸 보면 아직 광산이 발견되기 전인가 봐.’

땅에 엄청난 보물이 잠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마수 사냥을 다니며 푼돈을 벌고 있다니. 1등에 당첨된 로또 복권을 서랍에 넣어 두고 최저시급을 겨우 받는 아르바이트나 하는 꼴이었다.

16550919876908.jpg‘광산을 발견해서 영지를 부유하게 만든다면 단숨에 알테어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다행히 소설 속에는 광산의 위치에 대한 정보도 드러나 있었다. ‘마수의 소굴인 줄로만 알았던 산맥에 마석이 가득했다’라는 언급이 있었으니 에일스포드 영지에 속하는 산맥을 조사하면 금방 광산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수저 부럽지 않은 광산 수저! 당장이라도 삽을 들고 산맥으로 뛰쳐 나가 땅을 파고 싶은 심정이었다.

16550919904902.jpg“마님!”

머릿속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미래에 히죽대고 있으니 언제 방에 들어온 건지 안나가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내 옆에 서 있었다.

16550919904902.jpg“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 방금 얼굴에 경련이……!”

음. 아무래도 생각지 못한 행운에 들떠 표정 관리가 제대로 안 된 모양이었다.

16550919876908.jpg“아, 아냐. 그냥 좀 생각이 많아져서.”

나는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안나가 안쓰럽다는 듯한 얼굴로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16550919904902.jpg“요 며칠 골머리를 앓으셔서 그래요. 계속 성에 틀어박혀 장부만 보셨으니…… 가끔은 바깥 공기도 쐬어야 힘이 나는 법인데 말이에요.”

할 말이 있는지 한참을 주절대던 안나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50919904902.jpg“그래서 말인데요, 마님. 잠시 산책을 다녀오시는 건 어떨까요?”

16550919876908.jpg“산책?”

16550919904902.jpg“네! 아직 성 밖은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셨으니까요. 조금만 걸으면 큰 호수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배도 탈 수 있답니다. 배 위에서 보는 산맥이 아주 절경이지요.”

16550919876908.jpg‘산맥!’

그렇지 않아도 산맥이 궁금하던 차였다. 표정에서부터 긍정적인 기색이 느껴졌는지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안나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16550919904902.jpg“더 고민할 것도 없으셔요! 제가 안내할게요, 마님!”

  * * * 안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성을 벗어나 조금만 걸으니 산맥을 등지고 있는 거대한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16550919876908.jpg‘와아……!’

수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웅장한 자연의 모습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광산이 숨어 있을 산맥이 궁금해 걸음한 것뿐인데도 잠시 그 사실을 잊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16550919904902.jpg“역시 나오시길 잘했지요?”

입을 떡 벌린 나를 보며 안나가 뿌듯한 얼굴을 했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할 뿐이었다. 내가 풍경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안나는 부지런히 움직여 호수에 띄울 배를 준비했다. 두 사람이 타면 그만일 작은 조각배였다.

16550919904902.jpg“제가 노를 저을 테니 마님은 편안하게 풍경을 즐기세요. 산맥 가까이 가면 경치가 더 멋지답니다!”

풍경에 홀린 나는 원래의 목적도 잊고 유람이라도 하듯 배에 몸을 실었다. 안나는 망설임 없이 힘차게 노를 저어 호수 가운데로 나아갔다. 산맥이 점점 가까워져 두 눈에 모두 담기 힘들 정도로 시야에 가득 차니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거대한 자연의 풍경에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잠시 머리를 복잡하게 했던 생각들을 잊은 채 자연이 주는 여유에 푹 빠져들었다. 물론 그것이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16550919904902.jpg“아아앗!”

안나의 비명이 여유를 깨뜨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그녀의 두 손에 단단히 붙들려 있어야 할 노가 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둥둥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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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19876908.jpg‘어쩌다 노가 저 멀리…….’

16550919904902.jpg“손에 힘이 풀려 그만 노를 놓치고 말았어요, 마님! 아아, 이를 어쩌면 좋담! 이렇게 손을 뻗어도 닿지를 않네요!”

안나가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많이 당황한 모양인지 평소와는 말투며 목소리도 달랐다.

16550919904902.jpg“어쩌지요! 저희는 호수에 고립되었어요! 너무 무서워요, 마님! 멋진 기사님이 나타나 우리를 구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안나는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나는 그다지 심각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기다리다 보면 결국 누군가 우리를 구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얌전히 기다려보자고 말하기에는 안나의 상태가 너무 불안정해 보였다. 횡설수설하며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16550919876908.jpg‘으음…….’

나는 눈으로 배와 노의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손을 뻗어 회수하기에는 먼 거리였지만, 수영하면 금세 닿을 거리였다.

16550919876908.jpg“진정해, 안나. 내가 다시 노를 가져올게. 난 수영을 잘하니까 문제없어.”

16550919904902.jpg“예……?”

내가 하는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에 떨고 있는 거구나. 나는 안나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나만 믿어!’라는 기세로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는 호수를 향해 몸을 틀었다.

16550919904902.jpg“마, 마, 마, 마님? 뭘 하시려고요! 수, 수영이라니 설마……!”

안나는 조금 전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그대로 호수에 뛰어들었다.

16550919904902.jpg“마님!”

물에 풍덩 빠지는 날 보며 안나가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생각보다 물이 훨씬 차가웠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노를 향해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생각처럼 몸이 앞으로 잘 나아가지 않았다. 누군가 몸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으슬으슬 몸이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16550919876908.jpg‘이상해. 왜 이러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새도 없이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귓가에는 연신 ‘마님!’이라고 외쳐대는 안나의 목소리와 첨벙대는 물소리가 뒤섞여 윙윙 울렸다. 그러는 사이 시야가 어둡게 물들었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하며 감각이 조금씩 멀어져갔다. 묵직해진 몸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았다. 의식이 멀어지고 시야마저 어둠에 완전히 먹혀버린 그때. 강한 힘이 나를 위로 휙 끌어당겼다. 이런 상황에서 결코 느껴질 리 없는 기묘한 안정감과 함께 정신이 뚝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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