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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산 넘어 산. (12/170)

12화. 산 넘어 산.2021.07.14.

1655092031993.png‘마주치면 먼저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감기에 걸린 건 아닌지 묻고, 다음에는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사과를 한 뒤에 재빨리 돌아오는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머릿속으로 알테어와 마주치는 상황을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했다. 실전에서 실수하지 않으려면 철저한 이미지 트레이닝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그런 시뮬레이션이 무색하게도, 몇 걸음 움직이지도 않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마주하고 말았다.

1655092031993.png“어어……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복도에서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번쩍 들고 있는 블란과 카인을 발견한 것이다. 에일스포드에는 많은 기사가 있어 아직 모두의 이름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은 내가 확실히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16550920319945.png“깨어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마님. 정말 다행입니다.”

1655092031995.png“저희는 정말로 큰일이 나는 줄 알고……. ”

블란과 카인이 창백해진 얼굴로 연신 사과했다.

1655092031993.png‘내가 물에 빠진 걸 왜 두 사람이 미안해하지?’

나는 의아해하며 서둘러 블란과 카인을 말렸다.

1655092031993.png“나 혼자 물에 뛰어든 건데요. 오히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내가 모두에게 사과해야죠. 나한테 미안해서 이러고 있는 거면 어서 일어나요. 이제 몸도 멀쩡해졌으니…….”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팔을 붕붕 휘둘러 보이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휘청거리며 겨우 중심을 잡으니 블란과 카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16550920319945.png“마님!”

1655092031995.png“더 쉬셔야 합니다!”

두 사람이 내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손을 뻗었다 거두기를 반복했다. 어떻게든 날 돕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허락도 없이 손을 대도 괜찮은 건지 확신이 들지 않는 눈치였다.

1655092031993.png‘뭔가…… 귀엽다.’

커다란 남자 두 명이 사소한 이유로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게, 그 사소한 이유가 나라는 게 신기하고 재밌었다. 바인 후작가에도 많은 기사가 있었지만, 그들은 좀 더 근엄하고 딱딱한 느낌이었다. 자신들만의 원칙에도 확실해서 좀처럼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에일스포드의 기사들은 조금 친근하다고나 할까?

1655092031993.png‘물론 체격은 에일스포드 기사들이 더 크고 굵은 느낌인데…….’

무서워서 어렵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바인 후작가에서는 기사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소심한 마음에 화들짝 놀라고는 했었는데 말이다.

1655092031993.png“오래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잠깐 어지러웠나 봐요. 난 정말 괜찮아요!”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서둘러 핑계를 가져왔지만,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낸 건지 그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16550920319945.png“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래 누워 있다가 일어나면 어지러워진다니요?”

1655092031995.png“그거야말로 큰 문제가 아닙니까? 그 정도로 몸이 약하시다니!”

블란과 카인이 차례로 경악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이 정말로 잘못된 것인가 혼란스러워질 정도였다.

1655092031993.png“아, 아니에요! 내가 특별히 약한 게 아니라, 여자들이라면 가벼운 빈혈 정도는…….”

다시 변명을 해봤지만 이미 심각해진 두 기사의 귀에는 내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16550920319945.png“역시 의사를 불러오는 게 좋겠지?”

1655092031995.png“그래. 그게 좋겠다, 블란.”

두 기사는 당장이라도 복도를 달려가 의사를 불러올 기세로 몸을 틀었다.

1655092031993.png‘아, 안 돼!’

잠시 휘청거린 걸로 의사를 불러왔다가는 꾀병이 심한 마님이라고 오해를 받을 거다. ‘아니, 고작 이런 걸로 의사를 불렀단 말입니까?’ 하고 황당해할 것이 분명했다.

1655092031993.png“난 정말 괜찮아요!”

나는 재빨리 두 손을 뻗어 블란과 카인의 셔츠를 붙잡았다. 최대한 강하게 셔츠를 잡아당기니 달려 나가려던 두 사람이 멈칫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실수를 한 건가 싶어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슬그머니 손을 떼려는데 등 뒤에서 기척도 없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920349463.png“무슨 일이지?”

알테어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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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라도 내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사이 블란과 카인이 의사를 부르러 갈지도 모른다. 나는 두 사람의 셔츠를 꼭 붙잡은 채 고개만 돌려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못마땅한 얼굴로 날 노려보고 있는 알테어의 시선을 마주했다. 엄청난 시선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떨렸다. 그러자 날 노려보고 있던 알테어의 시선이 더욱 매섭게 변했다.

16550920349463.png“더 쉬어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나? 넌 지금 침대 밖에 나와 있으면 안 돼.”

1655092031993.png“들었지만…….”

알테어의 상태가 걱정되어 확인하고 싶었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1655092031993.png‘조금 더 철저하게 시뮬레이션을 해야 했는데……!’

복도에서 생각지 못하게 블란과 카인을 마주친 바람에 충분히 시뮬레이션할 시간이 부족했다. 물론 내가 상상 속에 세워놨던 알테어보다 현실의 알테어가 몇 배는 더 매서운 기세라, 수십 번 시뮬레이션했어도 소용이 있었을까 싶긴 하지만……. 머뭇거리는 사이 알테어가 손을 뻗어 두 사람의 셔츠를 붙잡고 있는 손을 떼어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번에는 블란과 카인을 향했다.

16550920349463.png“분명히 벌을 줬는데. 자정까지 이 자리에 꿇어앉아서 손을 들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나?”

블란과 카인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나를 돕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게 쓸데없는 변명이 될 거라 생각했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용기 내 나서는 수밖에 없다. 나는 차가운 분위기에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끼며 힘차게 소리쳤다.

1655092031993.png“저, 저를 도우려고 그런 거예요!”

블란과 카인을 바라보던 알테어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1655092031993.png“그러니까…… 두 분은 저를 도우려고 그러신 거니까…… 혼내시려면 저를 혼내셔야 해요!”

무슨 벌이든 대신 받겠다는 의미로 눈을 부릅뜨자 알테어의 눈썹이 꿈틀했다.

1655092031993.png‘여, 역시 주제넘게 나섰다고 화가 난 건가!’

곧 이어질 호통을 기다리며 치맛자락을 꽉 쥐었지만, 돌아온 건 의외로 차분한 말투였다.

16550920349463.png“……널 돕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1655092031993.png“가벼운 빈혈 때문에 휘청거리는 걸 도와주시려고…… 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16550920349463.png“그러게 왜 밖으로 나왔어?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돌아다녀?”

1655092031993.png“자, 잠깐만 확인하려고 했어요.”

16550920349463.png“뭘?”

1655092031993.png“절 도와주려고 호수에 들어오셨다고 했으니까…… 전 이렇게 앓는데 영주님은 괜찮으실까 하고…… 또 감사하다는 인사도 드리고,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는 말도…….”

몇 번 하지는 못했지만, 상상 속의 시뮬레이션에서는 분명 멋지게 이야기했었는데. 현실의 나는 알테어의 무표정한 얼굴이 무서워 횡설수설하며 움츠러들 뿐이었다. 그런 내 꼴이 우스웠는지 알테어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알테어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16550920349463.png“……우스운 걱정은. 난 그딴 거 안 걸려.”

확실히 알테어는 멀쩡한 것 같았다. 기운 없어 보이지도 않았고, 안색도 좋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혈기가 돌아 더 컨디션이 좋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1655092031993.png‘다행이다.’

나 때문에 아프지 않아서.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내내 마음에 품었던 짐이 사라지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덕분에 긴장했던 몸에서도 자연스럽게 힘이 빠졌다. 그게 불편했는지 알테어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덩달아 나까지 놀라 다시 몸에 힘을 주니 알테어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블란과 카인을 바라보았다.

16550920349463.png“너희들은 그만 숙소로 복귀해라.”

16550920319945.png“하지만 아직 자정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약속했던 시간을 다 채우겠습니다.”

1655092031995.png“저도 블란과 의견이 같습니다. 벌을 다 채우지 못하면 마음이 무거울 겁니다.”

블란과 카인이 고민도 하지 않고 알테어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러나 알테어도 순순히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6550920349463.png“됐다. 당사자가 용서했는데 내가 뭐라고 벌을 주나. 너희가 벌 받는 걸 알면 오히려 이 녀석이 마음껏 못 쉰다.”

알테어의 말에 블란과 카인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곧 합의를 본 것인지 깊게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16550920319945.png“……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와 카인, 모두 숙소로 복귀하겠습니다.”

  * * * 두 사람이 떠나고, 알테어는 나를 침대까지 옮겨주었다. 혼자 걸어갈 수 있다는 나의 주장은 ‘쓰러질 뻔했었다며?’라는 말로 가볍게 기각되었다. 가벼운 빈혈로 휘청거렸다는 발언이 그에게도 큰 사건처럼 느껴졌던 걸까?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으니 다시 노곤해져 졸음이 밀려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껌뻑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자,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알테어가 말을 걸어왔다.

16550920349463.png“수도에서는 어떻게 지냈지?”

두루뭉술한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몰라 가만히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의 질문이 이어졌다.

16550920349463.png“평소에 뭘 하며 시간을 보냈느냐는 말이야.”

1655092031993.png“책을 읽거나 산책하고…… 그냥 평범했어요.”

물론 평범했다는 말 앞에 ‘소심한 탓에 각종 파티에 극단적으로 참석하지 않았던 걸 제외하면’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야 하지만, 알테어가 ‘사교 활동에는 젬병인 아내’를 좋아할 거 같지 않아 슬쩍 그 사실은 숨겼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알테어를 속였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얼굴이 평소처럼 무표정한 걸 보니 다행히 알테어는 내가 자신을 속였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16550920349463.png“그래. 평범했단 말이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품속에서 잔뜩 구겨진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16550920349463.png“곧 사냥 시즌이라, 동부 귀족 연합에서 초대장을 보냈다. 우리도 참석할 예정이니 그렇게 알고 있어.”

1655092031993.png“동부 귀족 연합이라면…… 동부의 귀족들은 다 모이는 건가요?”

16550920349463.png“대부분은.”

그렇다는 말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소리다! 수도에서 지낼 때는 워낙 소심해서 작은 티파티조차 참석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동부 귀족을 전부 만나야 하는 대 이벤트에 직면하다니……! 벌써 현기증이 날 것 같았지만, 남작 부인이 된 이상 사교 활동은 필수적인 임무였다. 시집오면서도 충분히 각오했던 부분이다. 아마 알테어가 기대했던 부인의 역할에는 이런 것까지 포함된 거겠지!

1655092031993.png‘게다가 사냥 시즌이라 모이는 거면…….’

다들 사냥에 집중하느라 사교적인 대화는 거의 하지 않는다. 사교계 새싹인 내게도 제법 만만한 이벤트라 입문용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말은 사냥이라고 해도, 결국 기분을 내는 게 목적이라 목표물도 거의 토끼나 여우처럼 작은 동물들이니 위험하지도 않았다.

1655092031993.png‘문제는 피야.’

나는 피를 보면 기절해버리는 고약한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 아무리 귀족들의 우아한 사냥이라도 피는 볼 수밖에 없으니……. 약간의 피라면 견딜 수 있지만, 철철 쏟아지는 피를 본다면 결혼식에서처럼 기절할 거다.

1655092031993.png‘사냥 시즌 전까지 열심히 피 적응 훈련을 해야 할지도……!’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비장하게 이불을 꼭 붙잡았다.

1655092031993.png“자, 잘해볼게요!”

16550920349463.png“잘하려고 할 필요 없어. 그냥 하던 대로 해.”

1655092031993.png‘하지만 하던 대로 한다면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걸요…….’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자 알테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16550920349463.png“아. 이번에는 3황자도 올 거라고 하던데. 혹시 안면이 있는 사이인가?”

1655092031993.png“3……황자요……?”

16550920349463.png“오르카 황자 말이야. 몸이 약해서 주로 요양 다닌다는. 이번엔 동부에 머무르는 모양이더군.”

알테어의 설명이 없더라도 3황자 오르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1655092031993.png‘오르카라면 알테어의 주군이었던 반역자!’

소설 속의 또 다른 악당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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