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의외로 손이 따뜻해.2021.07.18.
3황자 오르카 루페스. 소설 속의 그는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황위 경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요양을 핑계로 제국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제 편이 되어 줄 인재를 수집하고 있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 오르카의 가장 훌륭한 수집품이 알테어였지.’
3황자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아 방심하고 있던 형제들은 알테어를 앞세운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오르카가 황제마저 제압한 이후에는 그를 지지하지 않는 귀족들도 우수수 죽어 나갔다. 나디아 역시 그 피바람에 휩쓸려 목이 뎅겅 잘렸고 말이다.
‘으으…….’
소설 속에서 묘사됐던 잔인한 숙청의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회합은 언제인가요?”
“두 달 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시간이다.
‘악역이 될 남자와 그를 악역의 길로 인도하는 남자의 만남이라.’
잘 붙어 있는 목이 괜히 서늘해지는 기분이라 목덜미를 매만지자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침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턱밑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무튼 지금은 쉬도록 해. 얼굴이 창백하군.”
“네에…….”
착실하게 대답하며 눈을 질끈 감았지만 잠은 벌써 저만치 달아난 뒤였다.
‘알테어와 오르카는 이 사냥 시즌에 처음 만나 가까워지는 걸까?’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두 사람이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며 인연을 맺은 걸로 나와 있었다. 국경을 마주한 이웃 나라와 전쟁이 벌어지자 황제는 ‘황가가 제국을 위해 직접 나선다!’라는 이미지를 내세우기 위해 3황자 오르카를 전선으로 보냈다. 평소 허약하다 알려진 오르카였으니 죽으라며 보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모두 그가 전쟁터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르카는 모두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당당히 대승을 거둔 뒤 수도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어쩌면 소설에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설정이 있었는지도 몰라.’
사실은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오르카와 알테어가 아는 사이였다든가, 그 인연의 시작이 이번 사냥 시즌이라든가…….
“그만.”
단호한 알테어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냈다. 마침 머릿속으로 알테어를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놀라서 눈을 번쩍 뜨자 그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톡 두드렸다.
“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동부 귀족들을 만나는 건 두 달이나 남았으니 벌써 생각할 필요 없어.”
“저는 그게 아니라…….”
“자라.”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알테어의 커다란 손이 눈을 덮었다. 순식간에 밤처럼 짙은 어둠이 내려앉자 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의외로 손이 따뜻해.’
얼굴에 닿은 알테어의 온기 덕분에 잊고 있던 나른함이 다시 몸을 가득 채웠다. 조금씩 수많은 생각들이 멀어지며 단잠이 찾아왔다.
* * *
“두 달 후 사냥 시즌에 동부 귀족 회합에 참석할 거다.”
잠시 나디아의 상태를 살피고 집무실로 돌아온 알테어의 선언에 책상에 널브러진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파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대 남작이 에일스포드의 주인이었을 무렵에는 알테어도 부모님을 따라 회합에 자주 나갔다. 하지만 그가 작위를 이어받은 뒤로는 처음이었다.
“거긴 왜요? 그런 건 귀찮다며 쳐다도 안 보셨잖습니까.”
“그렇게 됐다.”
알테어는 간단하게 말했지만,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귀족들은 멋지게 옷을 차려입고 대규모의 수행원을 끌고 나타날 텐데, 에일스포드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영주님. 준비할 게 많습니다. 알고 계시죠?”
파벨이 혹시나 확인하듯 묻자 알테어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인을 고용해야겠지. 여태까지는 그냥 뒀지만 안주인도 생겼고, 예전처럼 대충대충 할 수는 없다.”
“그거야 그렇지요.”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까지 극도의 효율성을 유지해 온 에일스포드의 사정이 특이한 것이지, 보통의 귀족들을 생각하면 나디아는 물론이고 알테어도 누릴 수 있는 건 누려야 맞다.
“하지만 자금이 문제…… 아!”
걱정스럽게 말하던 파벨이 곧 반가운 소식을 떠올린 건지 반색했다.
“혹시 마님께서 지참금으로 가져오신 돈을 써도 된다고 하셨습니까?”
귀족들은 결혼해도 사유재산의 구분이 엄격했다. 아내가 결혼하며 가져온 지참금은 온전히 아내의 재산이었다. 혹여 이혼하더라도 이 자금은 아내가 고스란히 가져갈 수 있으므로, 남편이 손대는 것은 치졸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가문의 사정을 생각해 아내가 자금을 먼저 내어놓는 경우도 많았다. 어쨌든 한 가족이 되어 고락을 함께 하는 처지 아닌가? 선량한 마님께서 영지의 사정을 확인하고 흔쾌히 지참금을 내놓으신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벨의 아름다운 상상은 이어지는 알테어의 말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나 있었어? 지참금은 아내의 재산이다. 그쪽에서 먼저 내놓겠다고 해도 거절해야 맞지. 이상한 걸 탐내지 마라, 파벨.”
“저라고 마님의 재산을 축내고 싶겠습니까? 사정이 너무 안 좋으니 하는 말입니다. 당장 회합에 갈 준비를 하는 것도…….”
“렘브루 령의 의뢰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알테어가 귀찮다는 듯 길어지려는 파벨의 말을 뚝 잘랐다. 그 소리에 파벨이 드물게 경악해서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이미 거절하셨잖습니까? 변수가 많아 너무 위험하다고요.”
“대신 보수가 크다. 한 번 다녀오면 일 년은 거뜬할 거야.”
“그거야 그렇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보통 마수가 아니라 용을 상대해야 하는데…….”
파벨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용은 동부 산맥에 자리 잡은 성가신 마수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놈이었다. 웬만한 검으로는 피부에 상처조차 낼 수 없는 놈이라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만 상대할 수 있었다. 동부에서 오러를 다루는 기사는 알테어뿐이었다. 용의 출몰로 가장 피해가 심한 렘브루 령에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큰 보수를 불렀는데, 알테어는 함께하는 기사들의 안전을 고려해 의뢰를 거절했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걸리적거리는 놈들은 빼고 최정예로만 꾸려서 갈 거다. 기사들에게는 내가 통보하지. 넌 원정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해 둬.”
“그냥 마님에게 좀 도와 달라고 말씀하시면 좋을…….”
알테어가 매섭게 노려보자, 파벨도 더는 투덜거릴 수 없었다. 이곳은 에일스포드 남작령이었고, 영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알겠습니다.”
파벨은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영주님이 못 하시면 내가 해야지.’
일개 집사로서 주제넘은 소리겠지만 마님이라면 사정을 이해해주실 거다. 벌써 그런 이상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우스웠지만, 제 확신이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 * 종일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다음 날은 몸이 아주 가벼웠다. 그러나 해결하지 못한 의문 때문에 마음만은 여전히 무거워서, 나는 알테어가 주고 간 초대장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알테어가 왜 3황자와 손을 잡고 악당 노릇을 하게 되는 걸까?’
내게 3황자를 아느냐고 물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의 알테어는 오르카 황자와 전혀 접점이 없어 보였다. 나는 몇 가지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정리해보았다. 1. 오르카라는 사람 자체에 호감이 있어서 충성하게 됐다. 2. 오르카가 돈이 절박한 알테어를 황족의 어마어마한 재력으로 꼬드겼다. 3. 알테어가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만한 사건이 있었고, 마침 오르카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3번은 내가 아직 알 수 없는 부분이고…….’
2번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마석 광산만 찾으면 가난이 다 뭐야? 바로 제국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텐데!’
나는 머릿속으로 2번을 쓱쓱 지워냈다. 그럼 남는 건 1번뿐이었다.
‘소설 속 오르카는 확실히 호감을 사기 좋은 인상이었어.’
은발에 주황색 눈동자를 가진 여리여리한 황자님은 누구에게나 인기가 좋았다. 눈동자가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늘 웃는 낯이라 더 그랬다.
‘하지만 미소를 지우고 눈을 뜨면 누구보다 날카로운 인상이었지.’
한마디로 여우 같은 사람이었다고나 할까? 사람 홀리는 데는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정말 1번 같은 이유로 알테어가 오르카의 사람이 된 거라면, 도대체 내가 무슨 수로 두 사람의 결탁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고민해봤지만 ‘알테어가 오르카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험담을 많이 하자!’는 둥의 유치한 해결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됐어. 어차피 오르카를 만나는 건 두 달 후인 걸.’
지금은 당장 할 수 있는 확실한 일을 하면 된다. 마석 광산을 찾아 영지를 부유하게 만드는 일이다.
‘마석 광산을 찾으려면 산맥을 탐색해야겠지.’
멀리 수도에서 시집온 마님이 다짜고짜 산맥에 광산이 있다고 주장하면 이상하게 보일 테지만, 그런 시선을 신경 쓰며 일을 추진할 때가 아니었다.
‘역시 수색은 기사님들에게 부탁하는 게 좋겠지?’
에일스포드의 기사들이라면 누구보다 산맥에 대해 잘 아는 데다, 종종 출몰하는 마수를 상대하는 것도 가능하니 누구보다 이 역할에 적합할 것 같았다.
‘물론 기사님들이 내 부탁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알테어에게 먼저 상의하고 계획을 추진한다면 기사들의 도움도 쉽게 얻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광산의 존재가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비공식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싶었다. 영주의 공식적인 명령을 통해 대대적인 수색을 했는데 마석 광산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의 체면에 상처가 난다. 거짓말을 해서 쓸데없이 인력을 움직이게 했다며 알테어에게 비난받을 것도 걱정이었다. 그런 사람은 아내의 자격이 없다며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선은 비밀로 하자!’
나는 그렇게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누군가에게 부탁하기 위해서는 뇌물이 필요한 법. 나는 커다란 바구니에 든든한 주방장과 함께 만든 샌드위치를 담아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든 기사들에게 나눠 줄 작정으로 바구니를 가득 채웠더니 생각보다 무거워서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연무장의 위치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입구에 다다라 조심스럽게 안을 살피니 다행히 알테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타이밍은 제대로 맞춘 것 같은데…….’
열심히 훈련 중인 기사들을 방해해도 되는 걸까 싶어 머뭇거리며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으니 바닥에 앉아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던 블란과 눈이 마주쳤다. 낯선 상황에 어색해서 겨우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자, 블란이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님?”
블란이 작게 나를 부르자, 열심히 훈련하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 움직임을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자 더욱 민망해져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마님이라고?”
“마님이 오셨어!”
“뭐? 마님이 여길 왜?”
웅성거리는 소리에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꼭 부탁할 일이 있으니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용기를 내어 연무장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며 바구니를 앞으로 내밀었다.
“다들 힘드실 것 같아서 간식을 좀 만들어 왔어요.”
“예? 간식이요?”
블란이 한달음에 내 앞으로 달려와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분명 엄청나게 무거웠는데…….’
블란이 가볍게 한 손으로 바구니를 덜렁 들어 올리는 걸 보고 괜히 억울해져 입을 떡 벌리고 있으니,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카인이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며 내게 물었다.
“저희를 위해 만들어 오셨다고요? 마님께서요?”
“네. 샌드위치인데, 그다지 솜씨는 좋지 않지만, 그래도 주방장이 도와줬으니까…….”
횡설수설하는 나를 기사들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당하게 방을 나서며 가득 채워왔던 용기가 조금씩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싫다면 드시지 않으셔도…….”
그렇게 말하며 바구니를 회수하기 위해 슬그머니 손을 뻗는 순간.
“와아! 감사합니다, 마님!”
기사들이 환호를 지르며 우르르 바구니 앞으로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