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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세요. (14/170)

14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세요.2021.07.21.

16550920781738.png“어허. 줄을 서야지, 줄을!”

내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블란이 몰려든 기사들을 줄 세우기 시작했다.

16550920781745.jpg“야! 블란 네가 뭔데 줄을 세워?”

16550920781745.jpg“우우! 꺼져라, 블란!”

16550920781738.png“흥! 억울하면 네가 먼저 바구니를 받아 들지 그랬어?”

블란이 항의하는 기사들을 향해 코웃음을 흘린 뒤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16550920781738.png“그렇죠, 마님?”

16550920781764.png“네에…….”

동의를 구하는 질문에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자 블란이 의기양양해져 가슴을 활짝 폈다.

16550920781738.png“이것 봐! 마님이 그렇다고 하시잖아!”

블란에게 맹렬히 항의하던 기사들도 그 이야기에 ‘마님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라고 중얼거리며 얌전히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 소란통에 은근슬쩍 첫 번째 순서를 차지한 카인이 바구니 속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나를 향해 과장될 정도로 정중한 기사의 예로 인사했다.

16550920781774.png“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님.”

16550920781764.png“아, 아니에요! 은혜라뇨.”

흑심을 가득 품고 뇌물을 준비해 온 터라 양심이 따끔거렸다. 카인이 그렇게 거창한 첫 인사를 한 덕분인지, 뒤이어 샌드위치를 받아 간 기사들도 조금 전의 호들갑스러운 모습은 모두 버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수도에서 봤던 완벽한 기사들과 달리 어딘가 삐걱대며 어설픈 면이 느껴졌지만 우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름대로 진지한 모습이 보기 좋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삼삼오오 모여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던 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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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샌드위치를 먹다 말고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 기사는 손에서 샌드위치를 놓치기까지 했다. 갑자기 다들 왜 이러는 걸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하니 금세 답이 나왔다.

16550920781764.png‘……혹시 조금 전에 웃은 게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나?’

역시 그렇겠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싶어 식은땀을 흘리고 있으니, 카인이 굳어 있는 기사의 등짝을 후려치며 타박하기 시작했다.

16550920781774.png“야! 마님이 주신 샌드위치가 떨어졌잖아!”

16550920781745.jpg“뭐?”

화들짝 놀란 기사가 바닥을 뒹구는 샌드위치를 바라보자 주위에 앉은 기사들이 그를 부추겼다.

16550920781745.jpg“얼른 주워! 아직 3초 안 지났어!”

16550920781745.jpg“맞아. 아직 3초 안 됐으니까 괜찮아! 주워 먹자!”

하지만 샌드위치는 이미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16550920781764.png‘게다가 지나지 않았나……? 3초…….’

나는 정말로 그 기사가 부추김에 넘어갈까 봐 걱정되어 한달음에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16550920781764.png“흙투성이가 됐는데, 먹으면 배탈이 날 거예요.”

16550920781745.jpg“에이. 겨우 흙 좀 먹었다고 배탈이라니요. 맛만 좋은데요!”

하지만 기사는 대수롭지 않게 바닥에 떨어진 샌드위치를 주워 흙을 대충 털어내고 맛있게 베어 물었다. 밝게 웃으며 먹는 걸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16550920781738.png“원정을 떠나면 이보다 못한 음식을 먹을 때도 많습니다. 걱정마세요, 마님.”

모두에게 샌드위치를 나눠준 덕에 텅 비어버린 바구니를 든 블란이 내 옆으로 다가와 사정을 설명해줬다. 하지만 나는 개운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흙 묻은 샌드위치보다 못한 음식을 먹을 때도 많다니. 마수 사냥으로 돈을 번다는 건 들었지만, 원정 과정이 그렇게 열악할 줄은 몰랐다. 수도의 기사들은 늘 빳빳하게 다려진 제복을 입고 우아한 말솜씨를 뽐내며 레이디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그들이 실전에 나설 일이라고는, 자신이나 자신이 충성하는 주인의 명예를 두고 결투를 벌일 때뿐이었다. 그런데 에일스포드의 기사들은 영지의 생존을 위해 최전선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걸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는 것 같았다. 기사들을 향한 존경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다시금 의지가 불타올랐다.

16550920781764.png‘역시 돈을 벌어서 기사들을 험한 일에서 해방시켜 줘야 해. 난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잖아. 이 사람들은 에일스포드에 속한 기사고.’

조금 전까지 마음에 남아 있던 머뭇거림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뒤였다.

16550920781764.png“사실, 오늘은 부탁할 것이 있어서 여러분들을 찾아온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이야기를 꺼내자 기사들이 조금 전과 달라진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역시 영주가 아닌 마님의 부탁은 듣지 않는다는 걸까? 그런 걱정은 곧 입을 연 카인 덕분에 사라졌다.

16550920781774.png“부탁이라니요, 마님. 당치 않으십니다. 저희에겐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셔야죠. 에일스포드의 주인이시니까요.”

에일스포드의 주인. 스스로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타인의 입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남달랐다. 어쩐지 발끝이 간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16550920781738.png“그럼요, 마님.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저희가 꽤 유능합니다. 물론 제1회 대책 회의는 엉망이었지만…… 아무튼 마님께 빚진 것도 있으니 이번 명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훌륭하게 해내겠습니다!”

이어진 블란의 이야기에 기사들이 헛기침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제1회 대책 회의’라니, 도대체 그게 뭘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블란이 그런 건 잊어버리라는 듯 시원하게 웃으며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16550920781738.png“자, 그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실 건가요, 마님?”

짧은 물음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나는 연무장에 들어설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마음으로 당당히 기사들에게 부탁, 아니,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16550920781764.png“산맥에 굉장히 가치 있는 것이 숨겨져 있다고 들었어요. 개인적으로 알아낸 정보인데, 상당히 신빙성이 높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이 산맥을 탐색해줬으면 해요.”

생각지도 못한 명령이었는지 기사들이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그들은 좀 더 아가씨다운 부탁을 생각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알테어의 부관으로, 기사들 사이에서도 리더 역할을 하는 블란이었다.

16550920781738.png“정확한 탐색 대상은 무엇입니까, 마님?”

16550920781764.png“마석 광산이에요. 그리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으면 좋겠어요. 영주님께도요.”

내 말에 다시 연무장이 고요해졌다. * * * 마석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광산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마석 광산이라니? 그게 우리 영지에 있다니? 블란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게 영지에 있었다면 왜 여태까지 몰랐겠나.

16550920781738.png‘그렇지만…….’

기사들을 앞에 세워두고 명령하던 나디아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정말로 믿을 만한 루트를 통해 확실한 정보를 얻은 걸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어설픈 정보라도 도박을 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다름 아닌 마석 광산이 아닌가? 그러나 산맥은 위험한 곳이다. 마수가 들끓어 아무리 에일스포드의 기사들이라도 쉽게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단단히 준비를 마친 후, 조를 짜서 조직적으로 움직여야만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16550920781738.png‘그렇게 생각하면 여태까지 마석 광산이 있는 줄 몰랐던 이유도 이해가 돼.’

애초에 그 위험한 산맥을 탐색할 생각을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이 하겠느냔 말이다. 만약 마석 광산이 발견되어도 문제였다. 분명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사는 마수가 있을 텐데,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으면 개발도 요원했다.

16550920781738.png‘하지만 우리 영지에는 영주님이 계시지.’

오러를 사용하는 강한 기사는 한 세대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웬만한 인재는 모두 수도로 떠나버리니 이런 동부 깡촌에서는 더욱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 에일스포드에는 그 강한 기사가 있다. 충분히 마수를 쫓아낼 수 있었다.

16550920781738.png‘그러니 정말로 산맥에 마석 광산이 있다면…….’

에일스포드의 상황은 180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해서 블란이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16550920781738.png‘그런데 영주님께 비밀로 하라니…….’

블란은 에일스포드의 기사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알테어를 속인 적이 없었다. 물론, 지난번에는 ‘제1회 대책 회의’ 결과에 따라 그를 속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그건 결이 다른 문제였다. 마님은 확실하지 않은 일로 영주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에도 일리는 있지만, 어쨌든 병력이 움직이는 일이니 영주에게 보고는 해야 한다. 마님의 당부를 어기게 되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의 직속 상관은 알테어였다.

16550920781738.png“영주님. 저어…….”

블란은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알테어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러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알테어였다.

16550920872881.png“용을 잡으러 렘브루에 갈 거다.”

16550920781738.png“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블란이 꺼내려던 말도 잊고 펄쩍 뛰었다.

16550920781738.png“그건 거절하셨잖습니까?”

16550920872881.png“그랬는데 생각이 달라졌어. 보수로 에일스포드 일 년 치 예산이 걸려 있으니 한 번 고생하면 된다.”

16550920781738.png“갑자기 왜요? 물론 돈이야 많이 주지만, 분명 부상자가 많이 나올 겁니다.”

16550920872881.png“그래서 나 혼자 가기로 했다.”

16550920781738.png“뭐, 뭐라고요?”

16550920872881.png“너랑 카인은 데려갈까 했는데, 그럼 영지가 텅 비어서 안 된다. 어차피 너희를 달고 가봐야 위험할 때 거슬리기나 하고. 빈틈이 생긴 걸 알면 발하일이 또 움직일 테니까.”

블란이 황당해서 입을 떡 벌렸다. 물론 알테어는 강한 기사지만, 그 혼자 용을 때려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괴물 같은 마수들을 알테어가 가볍게 베어 넘길 때는 ‘저 인간은 혼자서 용도 때려잡겠네!’ 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16550920781738.png“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절대 안 됩니다!”

16550920872881.png“상관의 말에 반발하는 거야? 하극상이다.”

16550920781738.png“상관이 죽으러 가겠다는 걸 그냥 두는 게 하극상입니다! 갑자기 왜 용을 잡겠다는 겁니까? 영웅이라도 되고 싶으세요?”

용을 잡으면 명성이야 크게 떨칠 수 있을 거다.

16550920781738.png‘하지만 그것도 용을 잡았을 때의 이야기지!’

하지만 알테어는 블란이 길길이 날뛸 걸 예상했었다는 듯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서류만 살필 뿐이었다.

16550920872881.png“렘브루 령의 의뢰를 거절한 후에 마수 사냥 의뢰가 뚝 끊겼다. 그게 우연일 것 같아?”

16550920781738.png“……원래 의뢰는 있다가도 없고 그랬습니다.”

16550920872881.png“석 달 넘게 의뢰가 없는 때도 있었나? 일반적이지 않다고는 너도 생각했을 거 아냐.”

16550920781738.png“…….”

틀린 말이 아니다. 확실히 최근 마수 사냥 의뢰가 뚝 끊겨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참이다. 큰 의뢰는 아니라도 자잘하게 마수 사냥 의뢰는 꾸준하게 들어왔었는데, 석 달 넘게 의뢰 소식이 없었다. 덕분에 최근 영지 사정이 더욱 좋지 않았다.

16550920781738.png“렘브루 령에서 손을 썼다는 겁니까? 우리 쪽에 의뢰를 못 넣도록?”

16550920872881.png“아마도.”

16550920781738.png“비겁한 새끼들!”

블란이 상관 앞이라는 것도 잊고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알테어도 그 부분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16550920872881.png“열 올릴 필요 없다. 그냥 한 번 장단에 맞춰주면 될 일이야. 돈도 많이 준다니, 뭐, 거절할 이유도 없지.”

블란은 할 말을 찾을 수 없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용을 잡으러 가겠다는 알테어를 말릴 수도, 말리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생각지 못한 화제에 놀라 잠시 잊고 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번뜩 떠올랐다.

16550920781738.png‘마석 광산!’

알테어의 허락 아래 빠르게 산맥을 탐색해서, 정말로 마석 광산을 발견한다면 렘브루 령의 장난에 놀아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산맥 탐색은 큰 도박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그깟 도박 못 할 게 뭐 있나 싶었다.

16550920781738.png“영주님. 우선 의뢰 수락은 조금 미루시죠.”

16550920872881.png“왜?”

16550920781738.png“그게, 오늘 마님께서 연무장에 오셔서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나눠 주시면서…….”

16550920872881.png“뭐?”

시큰둥하게 서류를 읽고 있던 알테어의 시선이 처음으로 블란을 향했다.

16550920872881.png“직접 만든 샌드위치?”

16550920781738.png“아니…… 영주님…… 중요한 건 그게 아니거든요……?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눈을 부라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알테어의 시선에 블란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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