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가족이잖아요. (81/170)

15화. 가족이잖아요.2021.07.25.

블란은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알테어에게 전했다. 마님이 샌드위치를 만들어 왔다는 이야기에 뚱한 얼굴이던 알테어도 ‘마석 광산’이 언급되자 표정이 바뀌었다.

16551108149896.png“마석 광산이라면 확실히 도박을 걸어 볼 가치는 있군.”

16551108149901.png“예. 적당히 조를 나눠서 움직이면 피해도 크지 않을 거고…….”

16551108149896.png“아니.”

알테어가 손을 들어 블란의 말을 끊어냈다.

16551108149896.png“피해가 크지 않은 정도로는 안 돼. 피해 없이 탐색을 마쳐야 한다.”

16551108149901.png“하지만 산맥에는 마수가 가득합니다. 광범위한 범위를 탐색하려면 아무리 정예로만 조를 꾸려도 부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16551108149896.png“그러니 범위를 줄여야지.”

단호한 알테어의 말에 블란이 ‘그러니까 어떻게요?’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만으로는 탐색 범위를 줄일 수 없었다. 하지만 알테어는 생각이 있는 듯했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던 알테어가 움직임을 멈추고 블란을 바라보았다.

16551108149896.png“에일스포드에 오래 산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전 조사부터 하지. 대대로 산맥 인근에 자리 잡고 산 사람들은 조상대에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몰라.”

16551108149901.png“아……!”

16551108149896.png“마석 광산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아니겠지만, 산맥 어디에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다는 식으로 구전되는 이야기를 수집해보고…… 그 부근부터 천천히 수색해보지.”

마석 광산이 있는 자리라면 분명 다른 곳과 지리적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차이가 마석 광산 때문에 만들어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16551108149901.png“우선 사람을 보내 수소문해보겠습니다.”

16551108149896.png“그래. 그러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테니 나는 그동안 용을 잡고 오지.”

16551108149901.png“예! 영주님께서는 용을…… 네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리던 블란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16551108149901.png“용 잡으러 가지 마시라고 마석 광산 이야기를 한 건데요!”

16551108149896.png“마석 광산은 마석 광산이고, 용은 용이지. 탐색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잖아.”

16551108149901.png“그거야…….”

차분한 알테어의 말에 블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마석 광산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백 퍼센트가 아닌 확률에 영지의 미래를 거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영주인 알테어는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6551108149896.png“이미 렘브루 령에 의뢰를 수락하겠다고 서신도 보냈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너는 네 할 일을 해.”

가난하고 힘없는 자는 불합리함에 대항할 수조차 없는 건가.

16551108149901.png“……예. 영주님.”

블란은 무력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마석 광산을 찾아내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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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른 아침부터 의외의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왜인지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파벨이었다.

16551108182753.png“무슨 일이에요?”

혹시 큰일이 생긴 건가 싶어 걱정스럽게 물으니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16551108182757.png“상의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마님.”

16551108182753.png“네. 편하게 말해요.”

16551108182757.png“그…… 염치없는 이야기지만…… 마님께서 가져오신 지참금을 영지 살림에 보태주실 수 있을까요?”

확실히 조심스러운 이야기였다. 그래서 파벨도 망설이며 이야기를 꺼낸 것일 테다. 도리를 아는 파벨이 이런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영지 사정이 안 좋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특히 최근 몇 달의 장부는 마이너스를 찍고 있었다.

16551108182753.png‘이해는 하지만…….’

16551108182753.png“그럴 수는 없겠어요, 파벨. 내가 가져온 지참금은 따로 쓸 곳이 있거든요.”

마석 광산이 발견되면 이를 개발할 자금이 필요해진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에일스포드 령에 그런 자금이 있을 리가 없으니 내 지참금으로 개발 비용을 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파벨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16551108182757.png“영주님께서…….”

이유를 묻고 싶은 듯 한참을 머뭇거리던 파벨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08182757.png“영주님께서 렘브루 령으로 용을 잡으러 가신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요.”

16551108182753.png“네? 용이요? 언제요?”

16551108182757.png“아마 며칠 내로 떠나실 겁니다.”

이번에는 내가 혼란스러워져 눈을 크게 떴다. 소설 속 악역 공작에게는 많은 소문이 따라붙었지만, 그가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16551108182757.png“아시다시피 용을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요. 물론 영주님은 강하시니 그 정도는 아니리라 믿지만…… 그래도 위험하다는 건 확실합니다.”

파벨이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쉰 뒤 내게 부탁했다.

16551108182757.png“지참금을 내어주는 게 힘드시다면 영주님을 말리기라도 해주십시오. 제 말이야 흘려 넘기셔도, 마님의 부탁이라면 분명 들어주실 겁니다.”

알테어가 내 부탁을 들어줄 거라니.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느껴졌지만 파벨은 확신하는 눈치였다.

16551108182753.png‘내가 부탁하면 간섭하지 말라고 또 싸늘하게 노려볼 것 같은데…….’

그 눈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싹해졌지만 파벨의 간절한 눈빛도 거절하긴 힘들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양쪽을 저울질했지만 결국 눈앞에 있는 파벨의 간절함이 승리했다.

16551108182753.png“……알았어요. 한번 말씀드려 볼게요.”

16551108182757.png“정말이십니까?”

침울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던 파벨이 금세 태도를 바꿔 눈을 반짝였다.

16551108182757.png“지금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16551108182753.png“지, 지, 지, 지금요?”

16551108182753.png‘아직 마음의 준비가…… 시뮬레이션이 제대로 안 됐는데……!’

그러나 파벨은 내 이야기가 들리지도 않는지 친절하게도 방문을 활짝 열어 ‘어서 가시죠!’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기대에 찬 눈빛을 보니 입이 딱 붙어 도저히 ‘지금 말고 나중에…….’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16551108182753.png‘거절을 못 하는 내 성격이 나도 참 싫다. 흑흑.’

나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알테어의 집무실에 찾아오는 건 처음이었다.

16551108182753.png‘이 문 너머에 알테어가 있다는 거지.’

거대한 문을 앞에 두고 서 있으니 벌써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등 뒤에서 파벨이 ‘마님, 힘내세요! 할 수 있습니다!’라고 속삭이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어서 도저히 달아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6551108182753.png‘우선 문을 두드려야겠지?’

머뭇거리며 손을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부지불식간에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싸늘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알테어와 눈이 마주쳤다.

16551108182753.png‘헉!’

너무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다 등 뒤를 지키고 있던 파벨과 부딪힐 뻔했지만, 문을 열고 나타난 알테어가 손을 뻗어 나를 잡아당긴 덕분에 충돌은 면할 수 있었다.

16551108149896.png“무슨 일인데 계속 문 앞에서 얼쩡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한참 전부터 내가 문 앞에 서 있었던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16551108182753.png“아, 아셨어요?”

16551108149896.png“그럼 몰라? 기척이 느껴지는데.”

하긴. 알테어는 엄청 강한 기사니까 이런 기척 정도는 쉽게 느끼겠구나. 그걸 생각도 못 하고 한참이나 문 앞에서 기웃거렸다니. 민망해서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16551108149896.png“뭐 때문에 온 건데?”

그렇게 묻는 알테어의 눈빛이 무언가를 찾는 듯 내 손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맡겨뒀던 물건을 찾는 듯한 눈빛이었다. 기사들에게 부탁할 때처럼 뇌물을 가져왔어야 하는 건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빈손으로 털레털레 알테어를 찾아와버린 뒤였다. 나는 민망해진 빈손을 꼼지락대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16551108182753.png“그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16551108149896.png“부탁?”

알테어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역시 이건 네 주제에 감히 무슨 부탁이냐는 소리겠지! 하지만 파벨의 응원을 잔뜩 받은 처지라 쉽게 물러날 수가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용기를 쥐어짜 어느새 움츠려졌던 어깨를 폈다.

16551108182753.png“용을 잡으러 가신다고 들었어요. 위험한 일이라고요.”

16551108149896.png“그래서?”

16551108182753.png“안 가시면 안 되나 하고…….”

매서운 눈빛에 갈수록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알테어는 등 뒤에 선 파벨을 힐끗 쳐다보더니 돌아가는 사정을 다 알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16551108149896.png“파벨.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16551108182757.png“제가 뭘 했다고 그러십니까. 전 마님을 안내해드린 것뿐입니다.”

16551108149896.png“내가 머저리도 아닌데 헛소리는. 그만 꺼져라.”

알테어가 코웃음을 흘리며 내 어깨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집무실 안쪽으로 몸이 딸려갔다. ‘어어?’ 하고 안쪽에 발을 딛자마자 문이 쿵 닫혔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16551108149896.png“파벨에게 너무 휩쓸리지 마. 나쁜 녀석은 아니지만, 다 따라줄 필요도 없어. 가끔 성가신 짓을 하거든.”

16551108182753.png“휘, 휩쓸린 거 아니에요.”

16551108149896.png“아니긴. 녀석이 대신 부탁해달라고 한 거잖아?”

16551108182753.png“그건 맞지만…… 저도 걱정스러웠으니까 온 거예요.”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물론 알테어가 용 때문에 죽을 거라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그는 소설 속의 주요 인물이니, 이런 시기에 쉽게 죽을 리 없다는 묘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용을 잡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고, 아무리 강한 알테어라도 쉬운 일은 아닐 거다.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여전히 내게 알테어는 무서운 악역 새싹이지만, 그래도 물에 빠진 날 구해주고, 답답한 내게 기회도 준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 알테어에게 그런 평가를 할 수 있다니. 나조차도 놀라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알테어의 얼굴을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과 싸늘한 눈매는 여전히 차갑게 느껴졌지만, 그가 사소한 일에 검을 휘두르며 내 목숨을 위협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16551108182753.png“그게…… 저희는 결혼했고…… 저도 에일스포드니까…… 한 가족이라…….”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알테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 머리 위에 꽂히는 시선만이 강하게 느껴졌다.

16551108182753.png“……그러니까 저도 걱정해요. 그래서 온 거고.”

16551108149896.png“걱정…….”

알테어가 혼잣말처럼 내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조심스럽게 알테어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어쩔 줄 몰라 애꿎은 치맛자락만 꼭 붙잡고 있으니 알테어가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굽혔다.

16551108149896.png“걱정 안 해도 돼. 할 만하니까 한다고 한 거야.”

툭. 알테어의 머리가 내 어깨에 닿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서 움찔하자 그가 진정하라는 듯 가볍게 내 등을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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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08149896.png“여태까지는 적당히 버티는 걸로 만족하며 살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적극적으로 움직이려는 것뿐이다. 널 과부로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16551108182753.png“제, 제가 과부가 되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16551108149896.png“알아. 날 걱정한다는 거잖아.”

알테어가 내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강렬한 시선에 뺨이 뚫릴 것 같았다.

16551108149896.png“좀 더 아내답게 걱정해주는 건 어때?”

아내답게? 그게 어떤 거지? 의미를 몰라 눈을 껌뻑이자 알테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16551108149896.png“그래. 이 순진한 아내를 두고 내가 뭘 하겠냐고.”

목덜미를 간질이던 알테어의 숨결이 멀어지자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풀어졌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그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톡 두드렸다.

16551108149896.png“최대한 빠르게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블란과 카인은 남겨두고 갈 테니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테지만, 최대한 성 밖으로는 나가지 마.”

16551108182753.png“네.”

16551108149896.png“손님이 찾아오면 영주가 자리를 비워서 맞이할 수 없다고 다 돌려보내.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고.”

16551108182753.png“명심할게요.”

16551108149896.png“그리고…… 전에 말한 건 고민해봤어?”

16551108182753.png“전에 말씀하신 거요?”

16551108149896.png“날 어떻게 불러야 할지 말이야.”

16551108182753.png“아!”

우연히 마주쳤던 복도에서 나눴던 그 대화를 말하는 거다. 조금의 진척도 없는 문제에 나는 침울해져 고개를 저었다.

16551108182753.png“죄송해요. 더 고민해볼게요.”

16551108149896.png“내가 돌아왔을 때쯤에는 답을 찾았으면 좋겠군.”

16551108182753.png“노력할게요!”

실망하게 하지 않겠다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자 알테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16551108149896.png“그래. 착하네. 노력하는 내 아내.”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다정함이 서려 있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을까? 어쩐지 심장이 간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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