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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터졌다! (15/170)

16화. 터졌다!2021.07.28.

알테어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용을 잡기 위해 렘브루 령으로의 단독 원정을 결정했다. 사흘 후로 출발 일정이 잡히자 에일스포드 성은 묘하게 어수선한 분위기로 가득해졌다. 침착한 사람은 당사자인 알테어뿐인 것 같았다. 대장을 홀로 보내게 된 기사들은 물론이고 파벨과 안나까지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나 역시 홀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내답게 걱정해 달라던 알테어의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제대로 된 아내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으니 알테어가 떠나기 전까지 꼭 답을 알아내서 ‘아내답게’ 그를 걱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종일 끙끙 앓으며 혼자 고민한 끝에, 이대로는 절대 답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절망적인 결론에 다다랐다. 지금껏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열심히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았지만, 어디에도 ‘아내답게 남편을 걱정하는 법’ 따위는 담겨 있지 않았다.

16550921072675.png‘책에 세상 모든 지식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아군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16550921072675.png“안나.”

16550921072694.png“예, 마님.”

16550921072675.png“아내답게 남편을 걱정하는 법에 대해서 알아?”

16550921072694.png“아내답게 남편을 걱정하는 법이요?”

내 머리를 빗겨주던 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16550921072694.png“혹시 영주님께서 용을 잡으러 떠나는 것 때문에 그러세요?”

16550921072675.png“응. 내가 영주님을 걱정한다고 했더니, 아내답게 걱정해달라고 하셔서…….”

16550921072694.png“음…… 그렇다면 혹시 그게 아닐까요?”

16550921072675.png“그거?”

16550921072694.png“동부에는 남편이 위험한 곳으로 떠날 때 아내가 소원 팔찌를 만들어주는 풍습이 있거든요. 똑같은 걸 두 개 만들어서 끼고 있으면서 상대의 평안을 비는 거지요. 소원 팔찌가 끊어지지 않고 멀쩡하면 상대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면서요.”

16550921072675.png“그런 풍습이 있었구나.”

수도에는 없는 풍습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크고 작은 전쟁이 잦은 동부라 만들어진 풍습 같았다.

16550921072675.png“만드는 게 어렵지는 않을까? 크게 손재주는 없는 편인데.”

16550921072694.png“그럼요. 아주 간단하답니다. 알려드릴 테니 같이 만들어요! 머리 손질이 끝나면 재료부터 구해 올게요, 마님.”

  * * * 안나의 말처럼 팔찌를 만드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색이 다른 세 가지 실을 엮어 매듭을 지으면 간단하게 팔찌를 만들 수 있었다. 손재주가 없는 나는 그것마저도 어려워서, 결국 완성된 팔찌는 어딘가 엉성했다.

16550921072675.png“괜찮을까? 너무 못났지?”

실이 삐죽 튀어나온 못난 팔찌를 보며 우물거리고 있으니 안나가 괜찮다며 용기를 북돋아 줬다.

16550921072694.png“영주님은 그리 심미안이 뛰어나지 않으셔서, 이게 못났다는 사실도 모르실 거예요!”

16550921072675.png‘그, 그 말은 확실히 이게 못나긴 했다는 거구나……!’

위로라고 건넨 안나의 말에 나는 더욱 침울해져서 걸음을 옮겼다. 오늘, 드디어 알테어가 렘브루 령으로 떠난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주위가 어두웠지만,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등불을 든 안나의 안내에 따라 조심스럽게 성 밖으로 나섰다. 입구에 다다르니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친 알테어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블란, 파벨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6550921101839.png“어? 마님!”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한 거대한 검은색 말이 푸르르 투레질하자, 블란이 반갑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뒤이어 파벨이 고개를 숙여 깍듯하게 인사했고, 알테어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16550921101845.png“너무 이른 시간이니 배웅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달했을 텐데.”

알테어가 설마 전하지 않은 거냐며 파벨을 향해 질책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 이야기는 확실하게 전해 들었던 터라 나는 재빨리 나서서 손을 내저었다.

16550921072675.png“아니에요! 파벨은 확실히 전했어요! 그냥 제가 배웅하고 싶어서…… 그때 아내다운 걱정을 해달라고 하셨잖아요. 그걸 하려고요.”

정답을 찾아냈다는 뿌듯함에 당당히 알테어 앞으로 다가가자 어쩐지 그가 조금 곤란한 얼굴로 파벨과 블란의 눈치를 살폈다.

16550921101845.png“하겠다고? 지금 여기서?”

16550921072675.png“네.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건가요? 전 여기서 해도 될 것 같은데…….”

16550921101845.png“보는 눈이 많은데.”

16550921072675.png“어어…… 다른 사람이 지켜봐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팔찌만 전해주면 되는 일인데 굳이 장소를 옮기거나 사람들의 눈을 피할 필요가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자 알테어가 손으로 목덜미를 매만지며 답지 않게 웅얼거렸다.

16550921101845.png“뭐, 네가 그렇다면…….”

알테어가 허락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나는 품속에서 팔찌를 꺼내 알테어의 손을 덥석 잡았다. 크고 뼈대가 단단한 손은 내 것을 만지는 것과 완전히 달라서 신기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웬만한 물건은 다 으스러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신기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알테어의 손을 만지작대자 불편했는지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16550921072675.png‘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알테어의 손목에 내가 만든 팔찌를 채워주었다. 어설픈 팔찌였지만, 그래도 손목에 채우고 나니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할 일을 마치고 뿌듯하게 알테어를 올려다보니 그가 어쩐지 얼빠진 얼굴로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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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21072675.png‘왜 그러는 거지?’

영문을 몰라 나도 덩달아 눈을 껌뻑이니 옆에 서 있던 블란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16550921101839.png“아무래도 영주님께선 다른 걸 기대하셨던 모양인데요, 마님.”

16550921072675.png“네? 다른 거요?”

16550921101839.png“아내의 열정적인 입맞…… 아얏!”

블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알테어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16550921101839.png“영주님! 정말로 제 다리를 부러뜨릴 셈이십니까?”

16550921101845.png“안 부러졌잖아. 내가 한두 번 걷어차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조절한다.”

16550921101839.png“아니, 애초에 안 걷어차면 되잖습니까.”

16550921101845.png“그럼 그 방정맞은 입부터 다물든가.”

16550921101839.png“제가 언제 방정맞았다고…….”

알테어는 투덜대는 블란을 무시하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16550921101845.png“네 건?”

16550921072675.png“네?”

16550921101845.png“한 쌍일 거 아냐. 내 팔찌와 네 팔찌. 설마 나 혼자만 하는 건 아니겠지?”

16550921072675.png“그럴 리가요! 제 것도 있어요.”

나는 주섬주섬 내 몫의 팔찌를 꺼냈다. 그러자 알테어가 망설임 없이 팔찌를 낚아채 내 손목에 채워주었다. 꼼꼼하게 매듭을 묶어주던 알테어가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16550921101845.png“……힘주면 톡 부러질 것 같군. 이렇게 손목이 가늘어서야.”

16550921072675.png“그렇게 가늘지 않아요.”

16550921101845.png“안 가늘긴. 한 손에 잡히는데.”

알테어가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 손으로 내 손목을 감싸 쥐었다. 힘을 주면 정말로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는지 어딘가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 슬그머니 손을 빼니 그도 굳이 붙잡지 않고 나를 놓아주었다.

16550921072675.png“……조심해서 다녀오세요.”

16550921101845.png“그러지.”

인사는 담백했다. 알테어는 마지막으로 블란과 파벨에게 무어라 당부의 말을 남기고는 거대한 말에 올라타 순식간에 멀어졌다. 무서운 악당 새싹의 시선에서 벗어났으니 한동안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16550921101839.png“들어가시죠, 마님. 새벽 공기가 찹니다.”

멍하니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블란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성안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기분이 이상했다. * * * 알테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기사들은 산맥 탐색을 시작했다. 블란은 내게 영주님께 비밀로 해 달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는 알테어의 기사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기사들이 산맥을 탐색하는 동안 나는 파벨을 통해 광산 개발을 맡아 줄 만한 전문가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광산이 발견될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파벨은 벌써 사람을 구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눈치였지만, 굳이 나를 말리지는 않았다. 내 행동에 깔린 묘한 확신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시간이 지나도 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애초에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시작한 탐색이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기간이 길어질수록 산맥을 탐색하는 기사들도 지쳐가는 눈치였다. 명확한 성과 없이 산맥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지치는 게 당연했다. 매일 ‘오늘도 성과가 없습니다’라는 보고를 하며 블란의 얼굴도 갈수록 어두워져 갔지만, 나는 확신하고 탐색을 밀어붙였다. 평소의 내 심약한 성격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6550921072675.png‘정답을 알고 있으면 이렇게 사람이 강해질 수도 있구나.’

이게 소설 빙의자의 특권이라면 마음껏 누려볼 생각이었다.

16550921101839.png“마님.”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보고의 시간이 다가왔다. 늘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던 블란이지만, 오늘은 표정이 조금 달랐다. 살짝 상기한 얼굴에서 긍정적인 신호가 느껴졌다.

16550921072675.png“혹시…….”

기대에 차서 묻자 블란이 빙긋 웃었다.

16550921101839.png“예. 찾았습니다, 마님. 지반이 특이하게 내려앉아 있어서 그곳을 탐색했더니 마석이 발견됐습니다. 정말로…… 우리 영지에 마석 광산이 있었습니다!”

16550921072675.png“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기쁜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블란 앞으로 다가갔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껴안고 방방 뛰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로 마음뿐이었다.

16550921072675.png“파벨에게는 알렸어요? 내가 광산 개발 전문가를 찾아두라고 했었는데…….”

16550921101839.png“물론입니다. 신이 나서는 당장 그쪽에 연락하겠다고 난리예요. 기사들도 들떠서…… 이게 정말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블란이 싱글벙글하면서도 얼떨떨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16550921101839.png“아직 끝은 아닙니다. 마석 매장량도 아직은 불확실하고, 지반이 약해서 개발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16550921072675.png“아니에요. 무조건 돼요.”

처음 광산의 존재를 이야기할 때처럼 근거 없는 확신이었지만, 이번에는 블란도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21101839.png“마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소설 속 알테어는 이미 부유한 공작이었다. 그 말은 이 일대의 마석 매장량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개발도 당연히 가능할 거다.

16550921072675.png‘에일스포드는 이제 부자가 되고, 기사들도 고생 안 하고, 나는 알테어에게 인정을 받는 거야!’

벌써 눈앞에 그려지는 장밋빛 미래에 계속 웃음이 새어 나왔다.

16550921072675.png“우선 파벨과 이야기를 나눠야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손목이 허전해지며 바닥에 무엇인가가 툭 떨어졌다. 알테어와 나눠 가졌던, 안녕을 비는 소원 팔찌였다.

16550921101839.png“…….”

16550921072675.png“…….”

그 존재를 확인한 순간 들떠 있던 나와 블란 모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소원 팔찌는 상대의 안녕을 보여준다고 했던가.

16550921072675.png‘물론 미신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재빨리 끊어진 팔찌를 주워 들었다.

16550921072675.png“내가 이렇게 어설프다니까요.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었으면 이게 혼자 끊어지겠어요.”

16550921101839.png“그, 그러게요…….”

블란도 찜찜한지 어색하게 마주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16550921072675.png‘이, 이깟 미신 안 믿는다, 뭐!’

괜한 허세를 부려 보았지만, 가슴 속의 불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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