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불길함의 이유.2021.08.01.
“분위기가 영 이상한데요.”
광산 발견 소식에 잔뜩 들뜬 얼굴로 나와 블란을 맞이했던 파벨이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 블란은 서로를 마주 보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묵묵히 집무실까지 걸어오는 동안 블란도 나만큼이나 머릿속이 복잡했던 모양이었다.
“별일 아냐. 단지…….”
블란이 한쪽 눈을 찡그린 채로 머리를 헤집으며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내가 끊어진 소원 팔찌를 만지작대고 있다는 걸 발견한 파벨이 느릿하게 눈을 껌뻑였다.
“끊어졌네요.”
담담한 사실 확인이었다. 찜찜한 마음에 기분이 가라앉은 블란이나 나와 달리 파벨은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뭐…… 우선 광산 개발 이야기부터 하실까요.”
“야. 넌 영주님이 걱정되지도 않냐?”
블란이 지나치게 태연한 파벨을 타박하자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서 걱정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잖아. 미신에 휘둘리지 말고 영주님을 좀 더 믿어주는 게 어때?”
“어휴. 잘나셨어, 아주. 용을 잡으러 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펄쩍 뛰었던 건 잊었나 보지?”
“지난 이야기는 왜 꺼내? 그때야 그랬지만, 이미 보내드렸으니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잖아.”
나는 티격태격하는 형제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점점 말투가 거칠어지는 게 금방이라도 큰 싸움이 터질 것 같았다.
‘말려야 하나?’
눈치를 살피며 손을 뻗었다 거두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블란이 뒤늦게 나의 존재를 되새긴 듯 빙긋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마님. 저희는 늘 이렇거든요.”
“맞습니다. 늘 이렇게 진심으로 싸우죠.”
“그, 그렇군요.……”
‘전혀 안 괜찮아 보여…….’
그래도 투덕대는 두 사람 덕분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파벨의 말이 맞아.’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으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알테어도 아내가 그렇게 단단한 사람이길 바라겠지.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파벨을 바라보았다.
“광산 개발은 빠르게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자 두 사람이 언제 투덕댔냐는 양 진지한 얼굴로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역시 자금이겠죠? 광산을 개발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니까요.”
“그렇습니다.”
파벨이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차분하게 대안을 제시했다.
“제국 중앙은행에서 대출을 받거나 재력가의 투자를 받으면 어떨까 합니다. 사업성을 증명하려면 먼저 매장량을 파악하고 개발 계획을 상세히 작성해야겠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서 급히 온 거예요. 외부에서 자금을 가져오는 것보다는…….”
나는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파벨에게 내밀었다. 조금 전 파벨이 언급했던 제국 중앙은행의 개인금고 열쇠로, 그곳에 어머니께서 내게 남겨주신 신탁 재산이 보관되어 있었다.
“내가 가져온 자금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 많은 지참금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초기 개발 비용으로는 충분해요.”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는지 파벨과 블란 모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마님.”
그런데 기뻐할 줄 알았던 파벨이 의외로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 마님의 지참금을 내어달라 말씀드렸던 것은…… 상황이 급박하여 제가 실수한 겁니다. 마님의 개인 재산을 영지에 끌어온다면 영주님께서도 크게 화를 내실 거고요.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 열쇠는 넣어두십시오.”
“하, 하지만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오면 이자도 크게 내야 할 거고…… 내가 내고 싶어요.”
“영주님께서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도…….”
제발 내 돈을 써라! 그렇게는 안 된다! 나와 파벨이 팽팽하게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블란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럼 마님께서 투자하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네?”
“어차피 투자는 필요한 상황이니까요. 마님께서 무상으로 자금을 대시는 게 아니라, 광산 개발에 투자하고 수익금을 일부 가져가시면 영주님도 허락하실 것 같은데요. 마님도 재산을 불리실 수 있고요.”
생각지 못한 대안에 나와 파벨이 입을 꾹 다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양쪽 모두에게 훌륭한 대안이었다. 드디어 납득한 듯한 우리 두 사람을 보며 블란이 싱긋 웃었다.
“보세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형인 제가 파벨보다 생각이 깊죠?”
* * * 광산 개발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자금 문제가 해결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전문가를 데려와 조사한 결과, 에일스포드의 마석 광산은 지반이 튼튼해서 갱도를 만들기 좋고, 매장량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 기대 수익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밝혀졌다. 숱한 광산을 경험했던 전문가도 이 정도 규모의 마석 광산은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문제는 산맥의 마수들입니다. 다행히 조사 기간에는 마수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기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인근에 고블린의 서식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을 완전히 몰아내야 본격적인 개발이 가능할 겁니다.”
최대한 담담하게 보고하고 있지만 파벨의 말투에서 들뜬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뭐, 그 정도는 영주님께서 오시면 금방 해결될 겁니다. 고블린은 그리 까다로운 마수도 아니니까요. 마수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갖추는 것도 저희 에일스포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내가 누군지 알고 이딴 식으로 대접해!”
밖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차분하게 보고를 이어가던 파벨이 입을 꾹 다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파벨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니 멀리 성 입구에서 중년의 남자가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블란을 비롯한 기사 몇몇이 그와 대치 중이었는데, 분위기가 꽤 심각해 보였다. 혹시나 상황을 아는 건가 싶어 파벨을 바라보니 그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갈라드 백작이군요. 그가 여기까지 올 일은 없을 텐데……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란이 수습되지 않자 파벨이 찡그린 얼굴로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텅 비어 있어야 할 문 앞에 어리둥절한 얼굴의 카인이 서 있었다.
“어어…… 제가 방금 문을 두드렸던가요?”
그가 손으로 문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타이밍이 묘하게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밖이 소란스럽던데요. 무슨 일이에요?”
얼빠진 카인의 모습에 웃음을 흘리며 물으니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아……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입니다. 갈라드 백작이라는 자가 당장 영주님을 만나야겠다고 소란을 피우고 있거든요.”
“갈라드 백작이라면…….”
“저희 에일스포드와 경계를 접한 영지의 주인입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놈들이랑은 상종하기 싫다며 교류를 뚝 끊더니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오 년 전에는…….”
한탄하던 카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휴. 아닙니다. 그때 일은 말해봐야 입 아프죠. 아무튼 성가신 자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말 안 하고요?”
“예. 아주 막무가내입니다.”
“음…… 영주님은 부재중이시니 다음에 오시라고 하면요?”
“저희도 그렇게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영주가 없으면 손님 대접도 안 하는 거냐고…… 갈라드 백작을 무시하는 거냐면서…….”
백작이라면 꽤 지위가 높은 자다. 특히나 변경백은 자율적인 권한이 많아 수도의 백작들보다 위세가 높은 편이었다. 지역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누릴 정도였다. 그런 자가 신분을 내세워 생떼를 쓰고 있으니 기사들이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신분으로 백작과 대치할 수 있는 사람은 후작가 출신의 남작 부인인 나뿐이겠지.
‘알테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었지만…….’
내가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화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남자와 대치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렀지만 이대로 뒀다간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기사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나는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야. 우리 기사들을 구해줘야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몇 번 되새기니 조금이나마 용기가 생겼다.
“……제가 이야기해볼게요.”
“그래주시겠습니까?”
굳게 마음을 먹고 앞으로 나서니 카인이 반색하며 나를 안내했다. 파벨도 걱정이 됐는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성 입구에 다다르니 화가 난 남자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그는 기사들을 앞에 두고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못 배운 녀석 밑에서 일하는 놈들이라 그런지 아주 답답하군! 남작이 없다면 남작 부인이라도 나와서 손님을 맞이해야 할 것 아냐!”
대놓고 쏟아지는 폭언에 입이 떡 벌어졌다. 수도의 귀족들은 빙빙 돌려 상대를 비꼬는 방식으로 모욕을 주는 터라, 이렇게 날것의 비난을 마주하니 아주 신선했다.
“……갈라드 백작님.”
조심스럽게 백작을 부르자 그가 눈을 번뜩이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당신이 수도에서 왔다는 남작 부인인가 보군.”
“처음 뵙겠습니다. 나디아 바인, 아니, 나디아 에일스포드입니다.”
아직 입에 붙지 않는 이름을 밝히며 정중히 인사하자 남자의 기세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드디어 말이 통할 사람이 왔군. 하지만 아랫사람들 교육은 제대로 시켜야겠어. 손님 대접도 제대로 못 하는 녀석들을 곁에 뒀다간 두고두고 비웃음을 당할 걸세.”
“조언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무슨 일로 에일스포드를 찾으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이렇게…….”
나는 말끝을 흐리며 갈라드 백작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많은 병사까지 데리고 오셨으니 아주 중요한 문제겠지요.”
외출하며 수행원을 데려오는 건 당연했지만, 이 정도의 병력은 과하다. 내 지적에도 백작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럼. 아주 중요한 문제지! 에일스포드의 기사들이 우리 영지를 무단으로 침입해 헤집어 놓았으니 말이야!”
“네? 저희 기사들이요?”
“그래. 산맥을 뒤엎으며 소란스럽게 굴지 않았나? 거긴 우리 영지니까 더이상 소란 피우지 말고 그만 떠나줬으면 좋겠군.”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내가 나오기 전부터 백작과 대치하고 있던 블란을 바라보니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저희 영지와 갈라드 백작령이 경계를 접하고 있는 건 맞지만, 최근에 저희가 수색한 지역은 분명히 에일스포드 남작령입니다. 억지를 부리시면 안 되지요.”
“허. 누가 그래? 거기가 에일스포드 남작령이라고? 이 지도를 봐!”
백작이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블란에게 집어 던졌다. 이를 바드득 갈고 그가 건넨 지도를 확인한 블란이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협정 전의 지도군요. 오 년 전 저희 에일스포드가 마물을 소탕한 대가로 산맥 일부를 넘기셨잖습니까?”
“크흠. 생각해보니 땅을 주는 건 과한 것 같더군. 그때 책정됐던 대금을 낼 테니, 땅을 다시 돌려받겠어.”
“허. 쓸데없는 땅을 떠넘기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상황이 달라지니 돈을 주시겠다고요?”
“흥. 원래의 계약을 이행하겠다는 것뿐이야!”
5년 전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니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갈라드 백작령의 의뢰로 마수를 잡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기로 했는데, 돈이 아까워진 백작이 쓸모없는 산맥의 땅을 넘긴 거구나.’
하필 그 땅에서 마석 광산이 발견된 거고!
‘백작이 억울한 이유도 알 것 같지만…….’
제대로 의뢰비를 치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자업자득이었다.
“어차피 권한도 없는 기사 따위와 대화해도 소용없겠지.”
백작이 블란을 비롯한 기사들을 외면하며 내 앞으로 쿵쿵 걸어왔다. 거대한 남자가 한달음에 다가오자 위압감이 느껴져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 남작 부인! 영주가 자리를 비웠으니 대리인인 당신이 여기에 서명해줘야겠어!”
“제가 여기에 서명할 이유가 없어요.”
“이유? 그딴 게 뭐가 중요해? 거지 같은 영지에 돈을 주겠다잖아!”
나를 겁박하려는 건지 백작이 눈을 부라렸다.
‘수도에서라면 기겁하며 벌벌 떨었겠지만…….’
알테어와 비교하면 그의 눈빛은 순한 양 같았다. 극한의 상황에 익숙해져서인지 이 정도쯤은 우습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 돈을 안 받겠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백작님. 저희는 거지도 아니고요. 저는 물론이고 저희 영주님도 이런 이상한 문서에는 서명하지 않으실 거예요.”
“난 백작이야! 고작 남작 따위가 내 말에 거역할 수 있을 것 같아?”
백작이 매섭게 쏘아붙이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악!”
“당장 서명해!”
어찌나 손길이 우악스러운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마님!”
사태를 관망하던 기사들이 놀라서 뛰쳐나오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와 떠들썩한 공기를 한 번에 잠재웠다.
“허……? 이게 무슨 상황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