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아내의 역할은 이런 것. (17/170)

18화. 아내의 역할은 이런 것.2021.08.04.

16550921602585.jpg

16550921602591.png‘알테어다!’

후드 로브를 깊게 눌러쓴 터라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위압적인 기세며 스산한 목소리만으로도 알테어를 알아볼 수 있었다.

16550921602591.png‘무사히 돌아왔구나……!’

소원 팔찌가 끊어져서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는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낮을 뿐 아픈 기색은 없었고, 걸음걸이도 멀쩡했다.

16550921602591.png‘역시 내 솜씨가 어설퍼서 팔찌가 끊어졌던 거구나.’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손목을 붙잡은 갈라드 백작이 더욱 강하게 힘을 주어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16550921602591.png“읏!”

16550921602607.jpg“와, 왔구만, 에일스포드 남작!”

조금 전까지 당당하게 소리치던 갈라드 백작이 어째서인지 허둥대며 집어 던지듯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 엄청난 힘에 떠밀려 휘청거리던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16550921602591.png‘아야야…….’

우악스럽게 붙잡혔던 손목을 매만지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니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알테어였다. 그는 어느새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고 매섭게 갈라드 백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16550921602615.png“갈라드 백작. 주인도 없는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16550921602607.jpg“이, 이, 이, 일찍 돌아왔구먼, 남작!”

갈라드 백작이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알테어의 눈치를 살폈다. 막무가내인 그의 눈에도 알테어는 무섭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16550921602615.png“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한번 말해보실까, 백작? 내 기사들에게 윽박지른 이유도, 내 아내를 함부로 대한 이유도. 제대로 말해야 할 거야.”

16550921602607.jpg“히익!”

갈라드 백작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백작의 등 뒤로 갈라드 령의 병사들이 든든하게 도열해 있었지만, 그는 알테어의 눈빛에 잔뜩 쪼그라들어 어깨를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16550921602607.jpg“나, 남작은 못 돌아온다며? 돌아오더라도 크게 다쳤을 거라며?”

백작이 병사들 틈에 섞여 있던 남자 하나를 붙잡고 불평을 쏟아냈다. 나름대로는 속삭인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리 귀가 밝지 않은 내게도 백작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린 걸 보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았다.

16550921602607.jpg“남작만 없으면 우리가 마석 광산을 뺏어올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온 건데, 저 자식이 머, 머, 머, 멀쩡하잖아!”

16550921602607.jpg“부, 분명 혼자서 용을 잡으러 갔다고 했습니다! 어, 어, 엄청나게 강한 놈이라 혼자 잡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두 사람이 바들바들 떨며 대화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던 알테어가 헛웃음을 흘리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서늘한 소리를 내며 검이 뽑히자 투덕거리던 백작과 남자가 사색이 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16550921602615.png“블란.”

16550921632682.png“네.”

알테어가 두 사람을 주시하며 블란에게 물었다.

16550921602615.png“승인도 없이 타인의 영토에 병력을 끌고 들어오는 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다. 그렇지?”

16550921632682.png“예. 맞습니다.”

16550921602615.png“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침입자의 목을 베는 것은 정당방위겠군.”

16550921632682.png“그렇습니다. 아주 합법적인…… 방어지요.”

블란이 ‘합법적인’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에일스포드의 기사들도 하나둘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스르릉. 스르릉. 사방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울림에 갈라드 백작이 바들바들 떨며 몸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도망치려는 모양새였지만, 알테어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붙잡는 게 더 빨랐다.

16550921602607.jpg“히이익!”

16550921602615.png“어딜 가시려고? 응?”

16550921602607.jpg“미, 미안하네! 내가 잠깐 눈이 뒤집혀서 실수한 게야!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걸세!”

16550921602615.png“사과는 내가 아니라 내 아내에게 해야지.”

알테어의 말에 백작이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보며 대충 손을 흔들었다.

16550921602607.jpg“미안하네! 미안해!”

16550921602615.png“더 정중히 사과해야지요, 백작님.”

알테어가 정중한 말투로 백작의 오금을 걷어찼다. 백작의 다리가 맥없이 꺾여 그가 내 앞에 무릎 꿇은 자세가 되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와중에 어린 여자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된 백작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물론 알테어는 그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16550921602615.png“사과. 아직 안 하셨는데?”

16550921602607.jpg“……미안하네. 내가 실수했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걸세.”

백작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사과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려움 때문인지, 수치심 때문인지 두 다리가 벌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놀라울 정도로 재빠른 걸음으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덕분에 발이 꼬여 요란하게 바닥을 뒹굴기까지 했으나 금세 몸을 일으켜 꽁무니를 뺐다. 알테어는 굳이 백작을 뒤쫓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와 충돌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16550921602591.png“괜찮을까요? 그래도 백작인데…….”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묻자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집어넣었다.

16550921602615.png“어차피 맞서 싸울 담력은 없는 자야. 그러니 쥐새끼처럼 주인 없는 집에 쳐들어와서 행패를 부렸지. 집을 지키는 개들은 제대로 대처도 못 했고.”

알테어의 싸늘한 눈빛이 기사들을 향했다. 그의 눈빛을 받아낸 기사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16550921602615.png“주어진 임무를 하지 못했으니 전부 징계다. 들어가서 반성하도록.”

16550921690269.jpg“예. 영주님.”

기사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평소에는 쾌활하던 카인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알테어의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기사들이 아니었다. 영주가 자리를 비우면, 영주의 아내인 내가 주인으로서 제대로 집을 지켰어야 한다. 그러나 내 대처는 빵점이었다. 남작부인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주기는커녕 백작에게 제압당해 바닥을 뒹굴기나 했다.

16550921602591.png“죄, 죄송해요!”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알테어를 향해 고개 숙였다. 정수리에 알테어의 강한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져서,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16550921602591.png“제가 있었는데…… 제대로 대처를 못 했어요…….”

16550921602615.png“…….”

기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알테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왜 그런가 싶어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어느새 알테어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려는데 알테어가 손을 뻗어 내 손목을 붙잡았다.

16550921602615.png“멍이 들겠군. 약을 바르는 게 좋겠다.”

16550921602591.png“그냥 손목을 붙잡힌 것뿐이에요.”

16550921602615.png“그래. 그랬는데 이렇게 손자국이 남았잖아. 역시 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약하군.”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꼼꼼하게 내 손목을 살폈다. 우악스러웠던 백작과 달리 어딘가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손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16550921602591.png‘그런데…….’

가까워진 알테어와 함께 익숙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오래 정체를 고민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익숙한 냄새였다.

16550921602591.png‘설마……!’

나는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단번에 알테어가 입고 있던 로브를 열어젖혔다. 그의 복부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16550921602591.png“피, 피가……!”

덜덜 떨며 고개를 들어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는 부상을 입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태연한 얼굴이었다.

16550921602615.png“아. 용이랑 싸우다 조금 다쳤어.”

16550921602591.png“조, 조, 조, 조금이라뇨! 조금 다쳐서는 이렇게 피가 많이 나지 않아요!”

피 공포증이 도져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지만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알테어의 상태를 살폈다. 지금도 계속 피가 나는 건지 검붉게 물든 영역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16550921602591.png“다, 당장 의사를 불러 와야겠어요!”

16550921602615.png“됐어. 소란피우지 않아도 돼.”

16550921602591.png“무슨 말이에요! 이,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리면 사람은 죽어요!”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차 사고를 당했던 부모님도,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려서 세상을 떠났다. 피범벅이 되어 눈을 감고 있던 부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16550921602615.png“이봐……? 왜 이렇게 떨어?”

알테어가 두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감쌌다. 커다란 손이 안정적으로 몸을 감싸는데도 전혀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눈에는 눈물까지 고였다.

16550921602591.png“여, 여기서 이러지 말고 치, 치료부터 해요. 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알테어의 로브를 붙잡아 조심스럽게 잡아 당겼다. 다행히 내 간절함이 전해진 건지, 소란피우지 않아도 된다며 내 제안을 거부했던 알테어도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16550921602615.png“알았어. 치료든 뭐든 받으면 될 거 아냐. 그러니까 떨지 마. 응?”

알테어가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알테어를 잡아 끌었다. 우선 그를 따뜻하고 편안한 침대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 * * 다급하게 불려온 의사는 거침없이 피로 범벅된 알테어의 옷을 잘라냈다. 그러자 복부의 거대한 상처가 한눈에 모습을 드러냈다.

16550921602591.png‘흐읍!’

나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치맛자락을 강하게 붙잡았다. 환자는 덤덤하게 치료를 받는데, 보호자가 꼴사납게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16550921602607.jpg“어이쿠. 이번에는 상처가 좀 크네요. 우선 지혈하고 봉합한 다음에 진통제를 처방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곧 사람이 죽을 것 같은 엄청난 상처인데도 의사는 익숙하다는 듯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환자인 알테어는 물론이고, 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파벨과 블란도 그리 동요하지 않는 눈치였다.

16550921602591.png‘다들 왜 이렇게 태연한 거야……?’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16550921602591.png‘아. 자세히 보니…….’

알테어의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최근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16550921602591.png‘엄청 아팠을 것 같아.’

종이에 손가락을 베이기만 해도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는데. 저런 흉터들이 남을 정도라면 엄청나게 아팠을 거다.

16550921602591.png‘지금도 엄청 아픈데 참고 있는 거겠지.’

나는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조르르 알테어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16550921602591.png“많이 아프죠?”

조심스럽게 묻자 알테어가 눈썹을 꿈틀했다.

16550921602615.png“아프면?”

16550921602591.png“소, 손이라도 잡아줄까 하고……. 어렸을 때 제가 아프면 어머니께서 손을 잡아줬는데, 그럼 좀 나아졌거든요……. 물론 전 이렇게까지 크게 다친 적은 없지만…….”

너무 어린애 같은 해결책이었을까? 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리자 알테어가 다시 한번 눈썹을 꿈틀하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16550921602615.png“아파.”

16550921602591.png“네?”

16550921602615.png“아프다고. 아프면 손잡아 준다며? 얼른 잡아 봐. 그럼 좀 덜 아플 것 같으니까.”

16550921602591.png“네, 네!”

나는 알테어의 재촉에 후다닥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꼭 감쌌다. 상처 때문에 열이 올랐는지 알테어의 손이 뜨끈했다.

16550921774521.png

  * * * 의사는 치료를 마친 뒤 주의사항을 몇 가지 알려줬다. 무리해서 움직이지 말 것, 아플 때마다 진통제를 먹을 것, 매일 붕대를 갈아줄 것. 나는 잊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의사의 당부를 되새기며 방문을 열었다. 진통제 기운 때문인지 알테어는 눈을 꼭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한동안 부부 침실을 떠나 있던 알테어가 이곳에 누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고개를 붕붕 저어 잡념을 떨쳐버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16550921602591.png‘우선 알테어가 나을 때까지 제대로 간호하자!’

이것이야말로 아내의 역할! 의욕을 불태우며 알테어를 내려다보니, 어째서인지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약에 취한 채 잠들어 있으니 내 착각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16550921774531.png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