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거길 만지면…….2021.08.08.
“영주님. 지금 봐주셔야 할 서류가…….”
“쉿.”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며 입을 열었던 파벨이 알테어의 손짓에 소리를 죽였다. 알테어는 상체에 붕대를 감은 채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나디아가 불편한 자세로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알테어를 간호하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알테어는 파벨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디아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침대 위에 흩뿌려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풍경에 어째서인지 묘한 긴장감이 느껴져 파벨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돌아가야 하나. 파벨이 엉거주춤하게 문을 붙잡고 있으니 알테어가 가볍게 혀를 차며 눈짓을 보냈다.
“너, 이제 함부로 문 벌컥벌컥 열지 마. 나 혼자 쓰는 방도 아니잖아.”
“마님을 찾아뵐 때는 안 이럽니다. 영주님이 계시니까 그런 거죠. 제 기척 정도는 자다가도 알아챌 분이잖습니까.”
괜히 민망해진 파벨이 헛기침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마님께서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뭐…… 며칠째 날 간호하겠다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걸 다 알면서 이렇게 엄살을 부리시네요?”
파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붕대로 꼼꼼하게 압박되어 있는 알테어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알테어는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살았다. 물론 이번 부상은 꽤 심각한 축이었지만 며칠이나 침대에 누워 운신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평소 알테어의 회복력을 생각하면 벌써 연무장을 날아다니며 검을 휘둘렀을 거다.
‘그런데 이번에는…….’
파벨의 시선이 잠들어 있는 나디아로 옮겨갔다. 무채색의 에일스포드에 사랑스러운 마님이 나타난 뒤, 딱딱하기만 했던 영주님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듯했다.
“이번에는 좀 쉬고 싶었을 뿐이야. 용을 상대하는 건 아무리 나라도 피곤한 일이었다고.”
알테어는 투덜거리며 변명하면서도 차마 엄살이 아니라는 거짓말은 하지 못했다. 어차피 파벨에게 통할 거짓말도 아니었다.
“뭘 그렇게 민망해하고 그러십니까. 쉬는 건 좋은 일이죠. 단지 제가 그렇게 쉬라고 할 땐 안 들으시다가 갑자기 이러시니 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 것뿐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그런 녀석이 서류를 잔뜩 들고 나타나?”
“그만큼 급한 일이라는 뜻이죠. 광산 개발에 갈라드 백작의 항의까지…… 영주님께서 꼭 보셔야 하는 서류들입니다.”
“갈라드 백작?”
가볍게 파벨의 이야기를 흘려 넘기던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어서 서류를 달라는 듯 손짓했다. 알테어는 파벨이 넘겨준 서류뭉치에서 어렵지 않게 갈라드 백작의 문장이 새겨진 종이를 찾아냈다. 내용 역시 길지 않았다.
“백작을 모욕한 대가를 치르라고? 그 대가는 광산의 일부 지분이고?”
“헛소리지요. 하지만 갈라드 백작은 동부에서 영향력이 꽤 강한 자라……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되었습니다.”
“앞에서는 벌벌 떨며 도망가던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겁쟁이라도 백작은 백작입니다. 작위는 절대적이지요. 그날의 일은 저 역시 속 시원했지만, 이제 지킬 것이 생겼으니 전보다는 행동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켜야 할 것이라…….”
지금껏 알테어가 막무가내로 주위를 휩쓸고 다닐 수 있었던 건, 어차피 잃은 것이 없어서였다. 덕분에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자들의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알테어에게도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
‘예를 들면, 날 간호하겠다고 낑낑대다 지쳐서 잠들어 버린 이 녀석 같은.’
알테어는 복잡한 심정으로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후계자를 얻기 위해 아내를 들인다고 했을 때는 이런 상황이 올 줄 몰랐다. 수도 출신의 아가씨들은 새침하고 도도할 거라는 편견이 있어서 그랬는지, 어차피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부부 관계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내라며 에일스포드를 찾아온 여자는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으으음…….”
엎드려 잠든 자세가 불편했는지 나디아가 뒤척이자 알테어의 어깨가 움찔했다. 파벨은 그 풍경이 신기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거침없이 살아왔던 알테어가 마음만 먹으면 한 번에 제압할 수 있을 작은 여자의 뒤척임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니.
‘뭐, 좋은 변화인가?’
위험한 상황에서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지는 알테어를 보며 부하로서 마음 졸일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이제는 그에게도 최소한의 제동장치가 생긴 셈이다.
“갈라드 백작의 항의서한은 무시해. 입이나 나불댈 줄 알지 행동으로 옮길 용기는 없는 자니까. 광산 개발 문제는…….”
알테어는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보살핌받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아 며칠 동안 침대에서 뭉개고 있었지만, 할 일이 쌓여 있으니 더는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녀석도 한계인 듯하고.’
알테어는 불편하게 잠든 나디아를 가볍게 안아 들어 조금 전까지 제가 누워 있던 자리에 그녀를 눕혀 주었다. 포근한 침대가 마음에 들었는지 나디아가 잠결에도 따뜻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 좋자고 이 녀석을 더 고생시킬 수는…… 허?’
마지막으로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던 알테어가 나디아의 손목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디아는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 멍이 들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알테어가 자세를 바로 하며 잰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파벨도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파벨.”
“네.”
“생각이 바뀌었다. 갈라드 백작을 제대로 뭉개놔야 할 것 같아. 그래야 또 이딴 짓을 못 벌이겠지.”
“상대는 백작인데…… 어쩌시려고요?”
“걱정 마라. 염두에 둔 바가 있으니. 그리고…….”
“네.”
“멍든 곳에 잘 듣는 연고를 구해와.”
“네에?”
심각한 대화에 잔뜩 긴장해서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던 파벨이 맥이 빠져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알테어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기사 놈들이 쓰는 싸구려 연고 말고, 제대로 된 걸로 구해와. 알겠어?”
* * *
‘좋은 냄새가 나…….’
나는 기분 좋은 포근함에 파묻혀 행복하게 웃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는 눈을 번쩍 떴다. 포근한 침대. 고요한 분위기. 어두운 방 안.
‘헉! 시간이 언제 이렇게!’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알테어의 얼굴을 닦아준 뒤 잠시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렸던 것까지는 떠오르는데 그 이후의 기억이 완전히 백지였다.
‘게다가 침대에는 또 언제 올라온 거야.’
환자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지만, 어디에서도 알테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때마침 방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알테어가 안으로 들어오려다 말고 걸음을 멈춘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어어…….”
“설마 노크하지 않았다고 쫓아내려고?”
“아, 아니에요! 이제는 돌아다니셔도 되는 건가 해서……. 상처는 이제 안 아프세요? 피는 안 나와요? 의사 말로는 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럼 해열제를 먹어야 한대요.”
나는 조심스럽게 알테어 앞으로 다가가 그의 복부를 바라보았다. 상의를 챙겨 입은 탓에 상처 부위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으니, 알테어가 한숨을 내쉬며 대뜸 상의를 위로 끌어 올렸다.
“멀쩡해. 이젠 붕대도 필요 없다고.”
알테어의 말대로였다. 그의 상처를 꼼꼼하게 압박하고 있던 붕대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며칠 만에 이렇게까지 상처가 아물었다니 믿기 힘들 정도였다.
“난 오러의 영향으로 평범한 사람들보다 회복이 빠른 편이야.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렇구나.’
이제야 의사를 비롯한 사람들이 큰 상처에도 지나치게 태연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나니 할 말이 뚝 떨어졌다. 알테어도 나도 입을 꾹 다문 채 문 앞에서 묘한 대치를 이어갈 뿐이었다.
“그…….”
먼저 입을 뗀 건 고맙게도 알테어였다.
“연고를 가져왔어.”
“연고요?”
알테어가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안을 보니 그의 말처럼 커다란 유리병에 연고가 들어 있었다.
‘아! 상처에 바르는 약인가?’
상처가 아물긴 했지만, 한동안은 신경 써서 관리해 줘야 할 거다.
“제가 발라드릴게요!”
“……뭐?”
“아무래도 혼자 바르는 건 불편하실 테니까요. 상의를 벗고 침대에 누우시면 제가 발라드릴게요!”
아내로서 할 일을 찾았다는 생각에 반가워서 눈을 빛내자 알테어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떡 벌렸다.
‘역시 내가 미덥지 못한 거겠지?’
절로 어깨가 축 늘어질 것 같았지만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일에 쉽게 포기하지 않아야 아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잘할 수 있어요! 아프지 않게 조심해서 바를게요.”
“…….”
“역시 걱정되세요? 물론 제가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잘할 수 있는데…….”
완벽하지는 않아도 지난 며칠간 열심히 알테어를 간호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신뢰를 얻기 힘들었던 걸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고개가 푹 꺾였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끄응 앓는 소리와 함께 알테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침대에 누우면 돼? 옷은 벗고?”
긍정적인 대답에 고개를 번쩍 드니 알테어가 삐걱대며 침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역시 상처가 아물긴 했어도 완전히 나은 건 아닌 모양이다. 저렇게 불편하게 걷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니까 약을 바르는 건 아주 중요해!’
나는 더욱 의욕을 불태우며 조르르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알테어가 머뭇거리며 상의를 벗더니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걸터앉아 연고 뚜껑을 열자 약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나는 손으로 연고를 덜어 조심스럽게 상처 주변에 펴 발랐다. 말랑말랑한 내 피부를 만질 때와 달리 어딘가 단단한 느낌이 손끝에 닿았다.
‘뭔가 기분이 이상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손이 복부에 닿을 때마다 알테어가 움찔거리며 잘게 몸을 떨었다. 말은 안 해도 고통이 심한 모양이었다.
‘어떡해…….’
상처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조심스럽게 손을 놀려 보았지만, 알테어의 떨림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얼마나 아픈 건지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만,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
알테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손을 뻗어 약을 바르려는 나를 저지했다.
“네? 조금 더 발라야 해요.”
“괜찮아. 정말 괜찮으니까, 더 하면 안 될 것 같아.”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알테어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내 손목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난 발랐으니까 너도 발라.”
“전 안 다쳤어요.”
“손목에 자국이 남았잖아.”
“이건 그냥 두면 사라져요. 게다가 이 약은 제 약도 아니고…….”
“어디든 쓸 수 있는 약이랬어. 이거에도 효과가 있을 거야.”
“네? 동부에는 그런 신통한 약이 다 있나요?”
와. 신기하다. 신기한 마음에 유리병을 바라보고 있으니 알테어가 내 손목에 연고를 발라주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은 투박했지만 손길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푸흡!”
간지러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게 비웃음처럼 느껴진 건지 알테어가 손을 멈췄다. 그저 간지럼을 많이 탈 뿐이라고, 서둘러 변명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알테어의 얼굴이 눈에 한가득 들어찼다.
‘왜 이렇게…… 가깝지?’
상대의 숨결이 서로의 피부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무서워서가 아냐.’
지금 이 순간의 알테어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